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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불가항력’이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꼬꼬마 연습생 시절, 이세진은 기껏 잘나가다가 열애설 하나로 이미지를 말아먹는 선배님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한 적이 없었다.
‘순간의 감정도 자제를 못 해서 팬들을 기만하다니, 프로 실격이지.’
 비록 신분은 연습생이나 마음가짐만큼은 현역 1군 아이돌인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그때. 마냥 웃으며 추억하기엔 씁쓸했던 기억이 많고, 그렇기에 지금의 단단한 자신이 완성될 수 있었던 그 고된 시절을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하고 고개를 저으며 회상할 줄은 정말 추호도 몰랐다.
 ‘어떻게 데뷔해서, 어떻게 거머쥔 자리인데.’
 이세진은 죽도록 노력한 자신의 지난날을 평가절하할 생각도 없지만, 성공의 조건이 그것뿐만은 아님을 아주 잘 알 만큼 영리했다.
 방송에서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데뷔 이후 여태까지 줄곧 팬들이 보내준 성원이 아니라면?
 결코 혼자 잘났다고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서 이세진의 성공이라는 계단을 든든하게 지탱하며 쌓아올리는 존재는 팬들이었고, 그 사실을 알기에 이세진은 그들이 쌓아준 계단을 망설임 없이 밟고 더 높은 곳에 올라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고 싶었다.
 자신을 향해 퍼부어지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신뢰. 연인이 생긴다 한들 이렇게까지 애틋한 유대감을 느낄 수는 없을 테니, 연애는 하지 않기로 결심한 제 삶이 전혀 아쉽지 않다고.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지독한 첫사랑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박문대는 타인에게 대놓고 선을 그으면서도 결국 못이기는 척 곁을 내어주는 녀석이었다. 적어도 그를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아주사 시절의 이세진에게 박문대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지만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고, 옆에 있으면 일이 잘 풀리다 못해 대박이 났다.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고 낭떠러지에서 겨우 끌어올려졌을 땐, 이 바닥에 들어온 후 아주 오랜만에 신뢰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뜻하지 않게 마주한 박문대의 고난에,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낭떠러지로 걸어가려는 그를 자신이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세진이 박문대의 ‘결국 못이기는 척 곁을 내어주는 점’을 파고들어 그의 곁을 지키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자연스러워 보이길 바랐다.

 같은 팀으로 데뷔하고, 누구보다 마음이 잘 통하는 상대가 자신임을 거의 확신하는데도 박문대는 이세진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나중이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 꺼내지 않을 뿐 아니라 멤버들의 그런 말에 동조하려 들지도 않았다.
 분명히 처음에 박문대가 그어놓았을 선 그 안쪽으로 자신을 들여놓은 게 맞는데,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유대가 불편한지 처음의 거리감을 잡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그런 주제에 아주 가끔은 급발진하는 차의 운전대를 어떻게든 잡고 주행하는 사람처럼 긴박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안정되었나 싶어 잠시 고개를 돌리면 고장이 난 차를 끌고 나가 사고를 낼 것만 같아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도록.
 그러니 사실은 진심과 진실, 어느 쪽도 쉽게 내어놓지 않는 박문대의 곁을 꾸역꾸역 지키려 들었던 것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오기였고, 오기 이상의 불가항력이었다.

 박문대의 위태로움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게 된 후로는 더 그랬다.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다간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는대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제는 박문대가 없는 삶을 사는 게 더 끔찍할 테니까.

 이세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은 절대 순간의 감정일 수 없으며, 왜 불가항력이란 단어가 그리도 오래 이 감정을 설명하는 말로 쓰여 왔는지를. 박문대를 향한 호기심과 걱정, 기대와 바람, 이 모든 것이 아주 오랜 시간 자신을 기쁘고 또 괴롭게 만들리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시작 역시 그랬듯 끝을 정하는 것도 본인의 몫이 아니었다. 이 감정이 애초에 대항할 수 없다고 정해진 것이라면 부정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세진은 계산이 빨랐고 이미 휩쓸려버린 파도에 아예 몸을 맡기는 것을 택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고, 시도 때도 없이 붙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직업과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인식까지. 그의 짝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복지가 좋은 환경이었고, 이세진은 이내 잠겨있던 바다에서 수면 위로 올라와 숨 쉬는 법을 터득했다.
 연애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했었지만,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한 적이 없으니까. 편의대로 갖다 붙인 합리화였지만, 쓸데없는 감정 소모에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그간에 열심히 이 사랑을 쏟아붓는 편이 나았다. 그렇지 않아도 목숨을 건 일과 사랑이 연관되어있으니 의욕이 두 배로 붙었고, 덕분에 시너지가 엄청났다. 일방적인   짝사랑도 계속하다 보면 마음이 고갈되기 마련이라는데 이세진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다.

 이세진이 박문대를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했다. 박문대가 이 사랑을 유별난 우정으로 오해하거나,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처음엔 오해로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종종 인간관계에서 멍청하게 구는 면이 있는 박문대지만 그가 정말 천치도 아니고 자신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애초에 이세진이 바란 것은 후자였다. 모르는 척. 박문대가 알게 모르게 일정 선을 알려주면 거기에 맞춰서 딱 그 선까지만 다가갈 생각이었다.
 박문대가 이 감정을 모르는 척하리라는 것도, 그 선까지만 다가가는 것도 모두 자신 있었다. 이 그룹을 소중히 여기고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건, 그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테니까. 괜히 자신의 감정을 직시시켜 관계를 어색하게 만드는 일도, 박문대라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믿음직스러운 동료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도박이었다.

 

 방금 막 마스크팩을 떼어내 매끈하고 촉촉한 피부 위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책 없이 올인한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잃기 직전이었다.
 박문대와 함께 자신의 방 침대에 나란히 앉아 애꿎은 벽지만 노려본 지도 벌써 몇 분째. 불러놓은 당사자는 말이 없었고, 적막 속의 이세진은 평소처럼 분위기를 풀어볼 생각도 못 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정확히는 자꾸 박문대가 있는 오른쪽으로 가려는 시선을 끌어다가 왼쪽에 고정하는 일을 반복했다.

 박문대는 3초 전까진 분명히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어느새 베개 주변에 있던 팬메이드 솜인형을 쥐고 있었다. 자신을 닮은 인형의 팔다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어쩐지 기분이 묘해서 이세진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박문대의 모습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어색한 거였다.
 ‘먼저 사과할까?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그럼 일단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나?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거라면? 다른 문제 때문에 불렀을 가능성은 없나?’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야, 이세진.”

 “어?”

 다행히 박문대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어서, 이세진은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쭈뼛거리며 그를 향해 상체를 돌려 앉았다. 여전히 박문대의 손에는 싱글벙글한 표정의 이세진인형이 들려있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나는 테스타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너는 무슨 그런 소릴 남의 침대에 앉아 남의 캐리커처 인형을 주물럭거리면서 하니.

 차마 머릿속에 튀어 오른 단어를 참지 못하고 뱉어버린 이세진이 속으로 자기 입을 때리며 정정했다.

 “아니아니, 문대문대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고~ 당연히 더 잘 돼야지 우리!”

 “…그래,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로 박문대가 한 말을 되짚어보니 알 것 같았다. 이건 역시 거절이라는 것을.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룹의 미래를 생각해서 이쯤에서 멈추라는 뜻이었다.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다정한 거절이어서, 이세진은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평소엔 엄청 직설적으로 쳐내면서 이럴 때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세진은 평소처럼 웃었다.

 “뭐야~ 그런 말 하려고 여태 세진이 못 자게 붙잡아둔 거야? 얼른 조금이라도 가서 자, 우리 이따가 샵 가야 하잖아. 오늘도 잘해야지! 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착잡한 마음으로 덧붙인 말은 다정한 거절에 대한 대답이었다. 네 말대로 앞으로는 네게 치근덕거리지 않고 늘 그래왔듯이 그룹 활동 열심히 하며 팬들에게 충실하겠다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었다.

 ‘아~ 오늘 잠은 다 잤네….’
 
 정리되지 않을 마음을 정리할 막막한 생각에 이세진이 상체를 완전히 젖혀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아직 할 말 남았다.”

 이어지는 박문대의 말에 스프링처럼 다시 허리를 세웠지만.
 솜인형 이세진을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박문대는 천천히 이세진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했지만, 이세진은 박문대의 초조함을 읽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 언젠가 호텔 방에서 허무맹랑한 ‘사정’을 털어놓던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의 박문대를 확인한 그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조금 뒤로 물렀다.

 “무슨… 얘긴데?”

 너는 내 마음을 거절했고, 나는 지금 알겠다고 했잖아?

 눈빛만 주고받아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읽히는 두 사람이었다. 좋아한다 어쩐다, 섣불리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두 사람 모두 조심하고 있었을 뿐. 이세진은 박문대가 그런 이유로 팀을, 테스타를 언급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설마.’하고 피어오르지 않았으면 했던 희망이 길어지는 정적 속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 1분이 초 단위로, 그 1초가 다시 더 짧은 찰나의 순간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박문대는 사과도 서툴지만, 부끄러운 말에는 더 면역이 없는 놈이었다. 평소엔 그마저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하얀 얼굴 그대로 귀끝만 달아오른 박문대가 제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였다. 조금 길게 숨을 뱉는 소리도 들렸다. 모로 보나 긴장을 한 모습이었다.

 꼭, 고백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일단,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은 전부 그… 전제가 성립해야 하는데…….”

 “…….”

 “…………너…, 나 좋아하냐?”

 크흡.
 이세진은 가까스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문대문대  세진이 상대로 연기 연습하는 거 아니지?’하는 말이 턱 끝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마주 보고 있는 필사적인 눈빛이 연기라면 박문대는 빌보드가 아닌 아카데미 시상식을 노리고 있어야 했다.
좀 전의 착잡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눈앞의 사람이 귀엽다는 생각만 남아서, 이세진은 이성을 지키기 위해 손에 잡히는 이불을 세게 쥐었다.

 박문대는 고작 한마디, 자길 좋아하느냔 질문을 던졌을 뿐이지만 이세진은 그의 말이 아닌 행동에서 아주 여러 가지 것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태껏 혼자만 애태우고 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 형언할 수 없는 설렘으로 온몸에 벅차올랐다. 좋아한다고, 제대로 대답해주고 싶은데 어쩐지 입술을 떼기가 힘들었다.
 메인 댄서라는 포지션이 우스울 만큼 삐그덕거리는 움직임으로 이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박문대의 안색에 퍼진 안도감을 이세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박문대를 좋아하는 일이 박문대에게 안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박문대가 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이세진의 가슴팍으로 머리를 기대왔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떼어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이불을 놓지 않은 채로 시선을 내린 이세진의 눈에 새빨개진 박문대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모자라게 느껴질 만큼, 박문대의 모든 비언어적 표현들이 이세진의 감정에 화답하고 있었다.

 “우리 지금 엄청 중요한 시기인 거.”

 “알지.”

 “그럼 연애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지.”

 “안다는 놈이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냐?”

 박문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술 따라붙던 이세진의 목소리가 멈췄다. 미안하단 말이 나올 타이밍인 걸 알았지만, 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이세진이 그대로 감정을 묻어버린 채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맞닿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간의 감정 표현들이 이세진을 좋아하지만, 그저 참고만 있던 박문대를 조금 괴롭게 했다고 해서, 사과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이세진은 사과하는 대신에 조심스럽게 제게 기댄 박문대의 몸을 끌어안아 보았다. 그간 몇 번이고 팔을 감아보았던 어깨와 허리인데 왜 이렇게 낯선 기분이 드는 건지, 꼭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질 꿈 같았다.

 “진짜 몰랐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래서 그랬어.”

 품에 안아본 온기는 익숙하게 단단하고 또 따뜻했다.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아도 부서지거나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박문대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아서, 이세진은 좀 전에 눈으로 보았던 박문대의 안도가 자신에게 옮겨오는 것을 느꼈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안정감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안돼.”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에 단호한 목소리가 감성에 젖어가던 이세진의 장난기를 흔들어 깨웠다.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이세진이 말했다.

 “아아~ 안되는 거 아는데, 한 번 이러고 나니까 떨어질 자신이 없네.”

 “…….”

 “어떡하지? 나 진짜 박문대 엄청나게 좋아하나 봐.”

 이세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박문대가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제법 진심으로 때렸지만, 이세진은 타이밍 좋게 배에 힘을 주더니 말로만 아프다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기분상 때린 주먹이 더 아팠다.

 “문대문대~ 세진이가 자꾸 달라붙어서 참기 어려울 만큼 세진이가 좋아?”

 “그건 네가 너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니까...”

 “아무리 그래도 세진이가 그 정도로 선을 넘진 않은 것 같은데~”

 “…야.”

 

 “알아~ 그냥. ……그냥 내가 실감을 못하겠어서 그래.”

 박문대를 살포시 감싸고 있던 팔에 점점 힘이 가해지더니 곧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했다. 박문대는 이세진과 자기 몸 사이에 갇혀버린 두 팔을 힘겹게 꺼내어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이세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안다. 이세진에게라면 진심을 보여주기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 번 입 밖으로 뱉고 나면, 그다음을 참을 수 있을까? 한 번 이러고 나니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이세진의 말은 그 혼자만의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아무리 약해져도 지금은 안된다. 어쩌면 편견에 의해 비밀이 지켜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눈속임은 결국 팬을 기만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그렇다면 과연 아이돌에게 연애가 허락되는 때는 언제란 말인가. 답 없는 질문을 떠올리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다 큰 남자 둘이 이게 무슨 꼴값을 떨고 있는 건가 싶어져서, 어쩐지 맥이 빠졌다.

 “미안, 못하겠다.”
 
 “…그래?”

 자신을 끌어안은 팔의 압력은 여전했지만, 대답한 목소리엔 기운이 없었다. 박문대는 이제와 이세진이 오히려 제게 질려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박문대를 품에서 놓아준 이세진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박문대는 그의 표정을 보는 게 어쩐지 두려웠지만, 이제 와서 눈을 피할 수는 없었기에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영원히 이렇게 지낼 생각은 아니라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조금이 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어쩌면 이세진이 지금 바로 자신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급격한 불안감에 입술이 제 맘대로 벌어졌다.

 “이세진, 내 말은…”

 “이래야 좀 박문대 좋아하는 보람이 있지.”

 “…무슨 뜻이냐?”

 풀이 죽은 얼굴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세진은 아주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승부욕 생기고 좋다고.”

 박문대를 보는 이세진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렸다. 그 무엇을 말하든 거짓말일 수 없는 눈이었다.
 박문대는 잠시간 벙찐 얼굴로 그런 이세진을 바라보다가 평소의 티벳여우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조금만 빨랐으면 이세진에게 거의 매달리는 꼴이 될 뻔했다는 게, 드라마 같은 대사로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보다 더한 민망함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게 했다.

 “그래 그럼, 잘됐네. 이제 자라.”

 잽싸게 하려던 말을 무르고 대화를 정리한 박문대가 서둘러 방을 나서려고 하자, 이세진이 곧바로 그의 손목을 잡아 멈춰세웠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을 마주하자 이세진의 입매가 시원한 웃음을 그렸다. 청량감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이세진이 그 입술을 떼기도 전에, 그의 눈빛을 읽은 박문대가 그가 할 말을 예상했다. 이세진의 손에 잡힌 손목에서 맥박이 빠르게 박동했다.

 “좋아해.”

 이세진은 온몸으로 어떤 확신을 전하고 있었다.

 “좋아해 박문대.”

 자신들이 처한 현실도, 지금은 이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단 듯이.

 “너는 지금 대답해주지 않아도 돼.”

 이 마음이 변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언제가 되리라고 미리 날짜를 정해둘 수는 없지만, 분명히 찾아올 그 언젠가의 미래를, 박문대가 이세진의 마음에 대답할 수 있는 그날을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박문대는 자신을 붙잡은 손의 온기와 마주한 눈동자의 색깔과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 기억 어딘가에 영원히 새겨져 버렸음을 알았다. 이제는 정말로 물릴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관계였다. 오로지 나아갈 수밖에.
 박문대는 말없이 승부욕이 생긴다던 이세진의 말에 동감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 결국 우리는, ‘우리’가 될 테니까.

 “…그래.”

 박문대가 미소 짓는 것을 본 이세진이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박문대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때에 잠시 잘 자라는 인사가 오갔을 뿐.
거실을 지나쳤을 박문대가 제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이세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쓰러지듯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눕혔다. 박문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끝에서 아직도 박문대의 맥박이 느껴지는 것처럼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잠을 자긴 글렀지만, 내일 컨디션은 걱정하지 않아도 최고조가 확실했다. 양심 한구석에서 팬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피어났지만, 그들을 기만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연애의 유예였다. 100%의 정답은 없는 길이 될 테지만, 그마저도 박문대와 함께라면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신뢰와 견고한 애정이 존재할 수 있는 건지 스스로가 놀라웠다.

 이세진은 졸음기 없는 눈을 감고, 가만히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D-Day가 오기까지 아주 작은 단위가 될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모두 귀한 선물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매일 색다르게 주어지는 선물의 포장지를 하나하나 뜯다 보면, 아주 간절히 원하는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을 품에 안는 날이 온다는 걸 미리 알아버렸으니까.
 부푼 설렘을 주체하지 못한 이세진이 속으로 익숙한 음계를 흥얼거렸다.

 이세진의 삶에서 가장 길고 즐거운 기다림을 시작한 밤이었다.

 Playlist

 ​♥     눈기린  /  도리  /  마리
​ ♥     팽  /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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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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