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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아@pollna_big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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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흐트러졌다. 살랑이는 바람은 끈적거리는 땀을 식혀주기는커녕 더욱 엉키도록 부추겼다. 아스팔트 위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도로에 실수로 쏟아진 얼음물은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여름이었다. 에어컨 지대를 벗어나자마자 더운 숨을 뱉게 만드는 무기력한 여름이었다. 얼굴 곳곳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애써 정리한 남자는 몇 번이고 헛웃음 치며 길을 걸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온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차라리 일을 더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태양열로 인해 뜨끈해진 정수리를 살짝 문지른 그는 빠르게 이번 달 잔액을 계산했다. 이 정도면 집에 가서 에어컨 틀어도 되겠네. 다행히 올여름은 주식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주식이 안정적이라니, 아마 이런 생각은 그밖에 못 할 것이다.

 집을 향해 느릿하게 걷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숨은 쉬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둥 북극에 사는 털뭉치에게 변명하던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털뭉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북극에 사는 털뭉치와 같은……. 물론 이 녀석은 흑갈색이었지만, 아무튼 곰이라는 소리였다. 딱 보자마자 든 생각은 더워죽겠는데 눈앞에 뭔 털북숭이가 있나 싶었고, 몇 초 뒤에는 그것을 인형으로 정정했고, 지금은 그것이 움직이는 걸 봐버렸으며……. 아니다. 남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괜히 손부채질하면서 무시하고 걷던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문대야, 혹시 봤냐.]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곰 말이야. 곰.]

 

 “……곰이요?”

 

 [그래. 아까 어떤 손님이 자기가 곰을 봤다는 거야. 당연히 이렇게 더우니까 헛것을 본 거라며 한바탕 웃고 넘기기는 했는데…….]

 

 “……그런데요.”

 

 [문득 궁금해서 말이지. 마침 너희 집 가는 길 골목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서 전화했다. 어때?]

 

 “곰이요?”

 

 [그래! 정말 있어?]

 남자는 스마트폰을 입에서 멀리 떼어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괜찮았고, 위치도 집과 가까웠다. 일 자체도 힘든 것은 없었다. 동네의 작은 빵집이었으니까 진상도 별로 없었고. ……문제는 사장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저번에는 어디 미용실이 생겼는데 거기 옆 골목의 고양이가 귀엽더라, 라는 시답잖은 것을 확인하게 시킨 적이 있었다. 미용실과 고양이의 연결점이 한참 벗어나 있는 것부터 지적을 해야 하나 망설이던 남자는 무심하게 고양이가 있긴 하더라고요, 라는 말을 돌려줬다. 그리고 또, 이번 일인 것이다. 물론 곰? 신기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요새 얼마나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과 섞여서 살고 있는데, 새삼 신기할 일일까. 우뚝 자리에 서서 전화를 받는 남자의 옆을 벌써 다섯 번째쯤의 수인이 지나갔다. 수인과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니, 수인 또한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세상에서 동물을 귀엽게만 여기는 사장은 딱 전형적인 수인 차별자로 보였다. 남자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쉰 뒤에……. 어……. 그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문대야? 정적이 너무 긴데? 혹시 놀라서 굳은 거야? 박문대?]

 

 “아, 사장님.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요. ……잠시, 잠시만요. 내일 다시 얘기해 드릴게요.”

 

 [어, 어……. 그래.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다……]

 

 남자는 황급히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달렸다. 그의 품에는 열이 펄펄 오른 털뭉치……가 아닌 어린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물고 찬찬히 기억을 뒤졌다. 분명…… 이 근처에 새로 개업한 수인 병원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현관문에 붙어있던 전단을 버렸던 기억이……. 찾았다! 그는 병원 자동문 너머로 넘실거리는 시원한 공기를 만끽할 틈도 없이 접수처에 아이를 보여줬다. 다급하게 아이를 안고 들어간 의사를 보고 그는 안심한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더라.

 곰을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던 남자는 얼떨결에 길어지는 통화로 그 자리를 머물게 된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곰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남자는 정에 더없이 약했다. 곰은 꼼지락거리면서 몸을 작게 움직였다. 옅은 숨소리가 고롱거리는 것으로 보아 깊은 잠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 그랬건만……. 그가 수인 차별 금지법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을 때쯤 곰의 외형이 천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마법 소녀처럼 뿅! 하고 변하는 건 아니고, 정말 서서히…… 털이 줄어들고 인간의 손과 발이 되었다. 그제야 보이더라. 땀이 송골송골 맺힌 둥근 이마와 열을 견디지 못해 시뻘게진 볼 같은 것이. 시발. 남자는 작게 욕설을 뱉었다. 남자는 정에 약해도 너무 약했다.

 “보호자님?”

 “아, 네.”

 

 “길에 쓰러져 있던 아이를 데려오셨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 아이는 신원 등록이 되어있지 않아요.”

 

 이 대한민국에서 신원 등록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말해 불법 체류자라는 뜻이다. 특히 수인법 개정 당시에 공무원들이 온갖 곳을 다 뒤져가면서-그 시절 익명 게시판에는 일명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는 행색의 공무원 발견 실화가 유행했었다- 신원 등록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지금까지도 외딴 수인이라는 이유로 등록을 못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소리다. 결국 뉴스에서 매번 떠도는 가설은 두 가지다. 인간이 전혀 모를 야생 속 무리에서 나와 지금에서야 발견된 경우, 돈 많은 작자가 작정하고 수인을 숨겼다가 도망쳐 나온 경우. 후자는 명백한 인신매매다. 아직도 수인을 애완용으로 생각하는 취향 더러운 작자들이 있으니까. 더는 반려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게 된 지도 오래인데-현재는 동거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반려라는 뜻 자체는 인간 사이에서도 쓰이지만, 반려동물과 의식해서 구분할 필요가 있다나- 그들은 여전히 ‘애완’이라는 단어를 붙이니 참 그 수준 지랄 같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절차가 꽤 복잡해서요……. 아이의 상태가 괜찮아지면 정밀 검사와 예방접종 후에 신원 등록 절차도 밟아야 하고, 아이를 돌볼 보호자도 찾아야 하고. 아이가 많이 어린 건 아니니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가벼운 진술서를 적어서 경찰에 신고도 해야 하고요. 다행히 정부 소속 병원이라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게끔 되어있어서, 잘 찾아오셨네요. 제가 알기로 이 동네에 정부 소속 병원은 저희가 유일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측에서 해결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뒤로 남자는 한참이나 절차에 관련된 설명을 이어 들었다. 내내 심각한 표정이던 그는 비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부 지원금이 충분하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안심한 기색이었다. 40분 넘게 이어진 설명 겸 교육은 그를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으나 남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이를 그 상태로 방치했을 가정이 더 끔찍했기 때문이라.

 

 “그럼 다 이해하셨을 거라 믿고 서류부터 드릴게요. 임시 보호자님 신원증명서와 아이의 진료서입니다. 아이 부분은 저희가 검사하면서 채울 거라, 발견 당시 정황만 적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남자는 빈 종이를 삐뚤빼뚤한 글씨로 채워나갔다. 하얗게 비어있던 자리에 익숙한 글씨들이 그려진다. 종이 뭉치를 펄럭거리며 검토하던 그는 미처 채워지지 못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이름, 종, 나이, 생일……. 생일.

 

 아이는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남자는 조금 서글퍼졌다. 그 아이의 처음을 기억하는 자가 아무도 남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남자가 아이를 발견한 순간이 아이의 처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남자는 지독한 고독을 삼켰다.

 

 과거의 남자는 말했다. 자신이 모두에게 잊혔을 때, 그래서 자신마저 잊어버렸을 때, 그것은 죽음과 같지 않을까. 남자는 죽은 채 삶을 살았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고, 지금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 아이는 지금, 죽어있는 걸까.

 

 남자는 그건, 어쩌면……. 자신이 방해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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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셨네요.”

 

 남자는 강렬했던 첫 만남과 달리 쭈뼛거리며 겨우겨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어색하게 시선을 굴리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은 의사가 진료서를 정리했다. 의사는 의외로 감동한 상태였다. 수도 없이 많이 자신의 병원에 어린 수인을 버리고 간 사람들과 약간은 다를지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남자를 안내했다. 그는 어쩐지 들떠 보이는 의사를 찝찝하게 바라보다가 순순히 따라나섰다.

 

 “아직 아이의 몸 상태가 좋진 않아서 만나실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저희가 각종 검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설명해 드리자면, 아이의 신체는 약 7~8세 정도의 나이 같아요. 종은 보시다시피 곰이고, 우리나라에서 평범히 볼 수 있는 수인 종이에요. 수인의 나이는 인간과 다르게 흘러가는 거 아시죠? 수인마다 다르지만, 성장기 때는 한두 달이면 신체 나이로 1살 정도 흐른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다가 완전한 성체가 되면 인간과 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고요. 이 아이가 지금 7세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일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물론 정확한 성장 속도는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 하겠지만……. 저희의 예상대로라면 아직 한글도 배우지 못했을 것 같네요. 현재 영양 섭취는……”

 

 이날 남자가 얻은 소득은 색색거리며 잠든 아이의 나이가 7세 정도라는 것이 다였다.

 

 그 다음 날은, 병원의 예상을 깨고 이미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 정도였고,

 

 “이세진, 이요. 이세진. 그쪽……은 요?”

 

 “박문대.”

 

 또 다음 날은 병원 측에서 이세진의 신원 등록을 마쳤다. 의사는 아이가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수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성장기에 큰 열병을 앓고 나면 그 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본래는 그래봤자 몇 개월 치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정도인데, 이 아이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해 크게 기억이 손상된 것 같다고. 아마 아이를 납치한 새끼들은 그 점을 노리고 아이를 길가에 버린 것 같다며 화를 냈다. 심호흡하며 천천히 진정한 의사는 의학적인 방법을 쓰더라도 아이가 기억을 찾기는 어려울 거라고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짧은 몇 개월뿐이겠지만……. 아마 기억을 잃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것 같았다. 그 일을 회상하던 남자는…… 아니 박문대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의사는 박문대가 병원을 나서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아이가 보호자님은 기억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보호자님 옷을 붙잡았다고 하던데, 어떤 골목에서 자기를 안아서 달리기 시작했다고, 정말 또박또박 말하더라고요. 저희한테 계속 보호자님이 언제 오는지 물어보면서 기다리고……. ……긍정적으로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부담가질 필요도 없이 그저 동거인이니까요. 아이는 슬퍼할 틈도 없이 금방 커버릴 테니까.’

 

 박문대는 거기에 뭐라 답했더라. 그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이세진을 쓱 바라보고 병원을 나섰던가.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사소한 것은 중요치 않았다. 멍하게 식탁 위를 바라보던 그는 작게 한숨인 듯 욕설인 듯 짓거리더니, 계속 째려보고 있던 도장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병원에 가는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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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대는 지금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이세진의 퇴원일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병원에서 퇴원 절차를 밟고, 수인 보호소에 가서 간단한 서류만 작성하고 집에 오면 되었다. 이세진을 보호소에 두고 혼자서 집에 오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지금 좁아터진 빌라에 이세진과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이미 병원에 처음 갔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될 거라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집에는 이미 칫솔부터 시작해서 이불까지 전부 두 세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병원을 처음 방문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었다.

 

 “문대문대 있잖아.”

 

 “그래.”

 

 “있잖아~”

 

 “왜.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좋아서!”

 

 “그래…….”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박문대는 자신의 품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를 쓰다듬었다. 잘 정돈된 머리칼이 부스스 그의 손바닥을 따라 흩어졌다. 이세진은 박문대의 손바닥에 머리를 마주 비비다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곰 귀가 뿅! 튀어나온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직 제어가 서툰 탓이었다. 박문대는 그런 이세진을 향해 피식 웃고는 귀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어김없이 귀는 천천히 납작하게 밀리다가 쏙 사라지고 없었다. 이세진은 자신조차 본인을 잘 모르겠는데, 이럴 때면 박문대가 마법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 만난 골목에서 보았던 박문대. 이세진에게 그는 뜨거운 여름날의 햇살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서늘한 겨울이었다.

 

 “문대야……. 잘자…….”

 

 “잘자.”

 

 밥을 먹을 때부터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 박문대는 품에 안고 있던 이세진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혀주고 방을 나왔다. 의사의 말로는 애가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새로운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이 무서워서 내내 깊은 밤을 바라보고만 있었단다. 박문대는 그저 새 출발이 그렇게 무서운가, 가볍게 중얼거렸다가 의사에게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사실을 구태여 들었다. 보호자님이랑 헤어지기 싫은 모양이라고. 그는 그 말을 꼭꼭 씹어 넘기다가, 그러다가 이세진의 수인 수첩을 보고서야 머리가 띵해졌다. 또 그놈의 생일 칸이었다.

 ‘그래도 이건 임시 보호자님이 채워서 보호소에 제출해주세요. 아이도 그걸 좋아할 것 같아요.’

 박문대는 회상하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세피아 색이던 눈앞이 금세 환해졌다. 천천히 차오르는 색 중 단연 눈에 띈 것은 곰 모양을 한 수인 수첩이었다. 표지를 넘기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밝게 웃고 있는 이세진의 얼굴과 그 이름이 보인다. 오른쪽 구석에는 그가 태어난 해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의사가 기어코 성장 속도를 예측해 뽑아낸 연도였다. 아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절쯤에 발매된 노래를 이세진이 흥얼거리고 있었으므로.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이런 예측밖에 남지 않았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면 예방접종 목록과 날짜가 적혀있고, 수인 종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있다. 다만…… 그 어디에도 그의 생일은 적혀있지 않았다. 박문대는 조심스레 수첩을 닫았다. 그의 눈앞은 다시 세피아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아! 잠시만요! 그, 임시 보호자 박문대 씨?’

 

 ‘서류에 빈 곳이 있어서……. 이러면 저희가 제대로 절차를 진행할 수가 없어요.’

 

 ‘아…… 생일을 모르신다고요. 그럴 수 있죠. 흔히들 그러니까요.’

 

 ‘음~ 보통은 보호자님께서 정하실 때도 있고, 아이가 즐거웠던 날을 정해주기도 해요. 이세진 씨의 경우는…… 저도 조금 어렵네요.’

 

 ‘박문대 씨는 생일이 무슨 날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번에는 그냥 처리해 드릴게요. 잘 선택하셨어요! 이젠 임시가 아니라, 정말 동거인으로…… 잘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다행이에요. 이세진 씨가 처음 본 사람이 박문대 씨라서. 아, 이런 말 실례겠죠! 죄송합니다!’

 

 박문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식탁에 엎드렸다. 잠깐, 아주 잠깐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박문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환한 아침이었고, 그의 품에는 따끈한 곰 한 마리가 안겨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

 

 그로부터 약 6개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이세진은 박문대의 우려와 달리 쑥쑥 커서 그의 키와 엇비슷하게 자랐다. 박문대는 이미 한참 작아져서 입지 못하는 옷가지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마 몇 주 내로 자신보다 키가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곰 수인이지만…… 너무 큰 거 아냐?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의사조차도 점점 얼굴을 굳히고 있으니 말 다 했다. 둘이서 가끔…… 그렇게 귀엽던 애가 어쩌다 이렇게……라는 대화를 나누다가, 성장기는 언제 끝나는지 박문대가 슬쩍 물으면, 의사가 항상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띠링!

 

 아, 그러고 보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이세진이 처음으로 수인 학교에 간 날이었다. 사실 이세진의 비상한 머리나 성장 속도를 보면 그는 수인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었다. 신체 나이도 입학한 다른 애들에 비하면 꽤 있는 편이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박문대가 고집스럽게 그를 학교에 보낸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이세진. 아무리 그래도 우리 둘 다 각자의 사회생활은 조금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세진은 툭하면 박문대와 온종일 붙어있기 일쑤였고, 박문대는 이제 막 사회에 들어선 1년 휴학한 대학생이었다. 지금은 괜찮을지도 몰라도 내년에는……. 아무튼 박문대는 이세진의 분리불안증을 고칠 의무가 있었다. 의사가 판단하기로는 그건 분리불안증이 아니라 그냥 애정이 과한 것이라 했지만…… 암튼! 박문대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시발 그래 사실은 나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것 뿐이다. 아니……. 시발……. 암튼 그렇게 이세진은 아침에 밝은 표정으로 집을 나섰고, 지금은 하교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문대는 대충 눈에 보이는 아무 겉옷이나 챙겨서 집을 나섰다. 공기에서 푸른 맛이 느껴졌다. 봄이었다.

 “문대문대~!”

 

 “오냐.”

 

 “잘 있었어~?”

 

 “왜 그걸 네가 묻냐…….”

 

 박문대는 이세진을 노골적으로 한 번 훑어보더니, 손을 떡하니 내밀었다. 잡으라는 소리였다. 이세진이 박문대와 동거인이 된 날부터 줄곧 잡아 왔던 하얀 손. 분명 그때만 해도 제 손이 더 작았었는데, 이제는 훨씬 작게만 보이는 그 손. 조만간이면 정말 그 손을 삼켜버릴 정도로 제가 더 커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박문대가 이세진의 보호자가 아니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세진은 툴툴거리며 자신의 손을 낚아채 가는 박문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주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이세진은…… 사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벚꽃이네.”

 

 “어? 어……. 여기 길가가 다 벚나무래. 친해진 애가 그러더라.”

 

 박문대는 갑자기 말이 많아진 이세진을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관뒀다. 그가 아는 이세진은 뭐든 장난스럽게 진심을 전하는 것 같다가도 숨기는 게 많은 놈이었다. 박문대가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대, 저놈이 어릴 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박문대는 조용히 놈이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 있을 뿐이다. 언젠가…… 안 좋은 일은 전부 말해준다면 같이 욕하는 정도는 하겠지만, 저놈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지금은 딱 그 정도다. 박문대는 매번 이세진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고, 언젠가를 기약하면서 미루길 반복했다. 이세진은 그게 조금 불안했을 뿐이다.

 

 “있잖아, 문대야. 여기가 벚나무 길이라는 걸 알려주던 애가 그런 말도 했다?”

 

 박문대는 황홀하게 물든 분홍색의 절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이세진으로 옮겼다. 둘 사이에 하늘거리는 벚꽃잎이 찬찬히 흩날렸다.

 

 “자기는 탄생화가 벚나무래. 생일도 봄이고……. 그래서 벚꽃을 볼 때마다 매일이 생일인 기분이래. 지금 떨어지는 이 벚꽃잎이 자기가 이 자리에서 웃고 있구나를 알려준대.”

 

 “…….”

 

 “난 그런 기분이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냥 듣기만 하면서 있었는데, 걔가 물었어. ‘너는 생일이 언제야?’”

 

 “……이세진.”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혹시 문대문대는 알고 있어? 내 생일.”

 

 기다렸다는 것처럼 세찬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들이 부딪치면서 푸스스스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어쩐지 아이의 웃음소리 같았다. 웃음소리를 따라 벚꽃잎이 춤을 추듯 아이를 감쌌다. 아이는 그 순간 깨닫는다. 아, 내가 지금 웃고 있구나. 마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명제처럼 아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삶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축복받는다. 그건 다르게 말하면 생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벚꽃을 볼 때마다 생일인 것 같이 느낀다고. 그럼 나는? 이세진은. 무엇을 보며 벚꽃을, 삶을, 기쁨을, 축복을, 그리고 생일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이건 이세진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박문대에게 물었고,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아니라, 문대에게 더 난이도 높은 문제가 아닐까. 박문대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직 반쯤 죽어있는 그에게는 이것이 풀리지 않는 미제라고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참을 망설이다 뱉은 말에는 힘이 없었다.

 “생일 말고도…… 축하할 날은 많아.”

 

 무엇을 축하할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무슨 수로.

 

 이어지지 못한 말은 벚꽃잎과 함께 떨어졌다.

 

 “그건 그래. 문대야, 사실 난……. 문대문대 생일만 있으면 돼. 내게 생일은 그거면 충분해. 무슨 뜻인지 알지?”

 

 “……그래.”

 

 그 뒤로 박문대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잡고 있던 손에 살짝 더 힘을 주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똑같은 속도로 걸었다. 벚나무를 지나쳐 푸른 길을 걷는 순간에도 그랬다. 그랬으므로 둘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던 둘은. 마주 잡은 두 손바닥에 벚꽃잎이 붙어있던 것을 집에 도착해서야 알아차렸다. 벚꽃은 두 사람 곁에 계속 붙어서 쫓아오고 있었다.

 

 

%

 

 또다시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약 4개월 후. 그 사이에 이세진이 얼마나 자랐냐고 묻는다면 답은 딱 하나였다. 바로 오늘이 이세진의 수인 학교 조기 졸업 날이라는 것을. 박문대는 매번 꺼내서 입던 노란 후드티를 뒤로 하고 깔끔한 흰 반소매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꺼내입었다. 그중에 검은 바지는 대학 면접 볼 때 이후로 입어본 적이 없어 괜히 제 옷이 맞긴 하나 싶을 정도로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는 나가기 전에 현관에 놓인 달력을 한참이나 바라보고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미세하게 ‘왜 하필 오늘이냐…….’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문을 열고 나간 바깥은 박문대가 격렬하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했다. 방금 세팅한 검은 머리카락들이 그새 이마에 붙어서 지저분하게 보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끈적한 온기를 머금고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눈앞에서 뜨끈한 열기가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것을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대한민국의 여름은 영 적응이 안 된다니까. 박문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고로 그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자란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무기력한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박문대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위해 힘내서 걸었다. 태양열로 인해 뜨끈해진 정수리를 만지며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방긋 웃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이세진!”

 

 미세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간 박문대는 이세진의 표정을 보고 뒷걸음질 칠 뻔했다. 내가 아는 네가 아닌 것만 같아서. 단정한 흰 와이셔츠의 단추가 두세 개 풀어져 있었고, 검은 바지의 길이는 조금 짧아서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박문대와 같은 복장을 한 그에게서는 낯선 여름의 향이 풍겨왔다. 여름이라고 항상 덥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비가 오기 전에는 서늘한 바람이 온몸 곳곳을 쑤셔 얇은 겉옷을 챙겨 다녀야만 했고, 비가 오는 순간에는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정말 총체적 난국인 날씨가 되어있었다. 그러다가 비가 그치면 언제 또 흐렸냐는 듯이 해가 쨍쨍거려 사람들의 옷을 훌렁 벗게 했다. 그런 여름이었다. 변덕스러운, 그리고 겨울을 품은 박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름이었다.

 “문대야.”

 박문대가 이세진이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우중충한 장마 구름과 닮아있었다. 눈동자에 뿌옇게 먼지가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박문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양옆에서 두 사람은 가만히……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둘이 서 있는 공간만 시간이 멈춰서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아마, 박문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세진 또한 그처럼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야, 더운데 일단 어디라도 가서……”

 

 박문대가 익숙하게 뻗은 손은 멈춰진 공간 속에서 아무것도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꿋꿋하게 버티던 팔은 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떠밀려 내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태양에 팔이 녹아서 흐물거리는 모양새였다. 손에 축축하게 고인 땀은 그의 팔이 녹은 어떠한 액체였다. 이세진은 잠시 내리깐 눈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멈춘 시간이라지만, 날이 너무 더웠다. 모든 감정을 삼켜버릴 정도로.

 

 “문대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뭐?”

 

 “내가 너보다 훨씬 어리다는 건 인정해. 그런데…….”

 

 멈춘 공간의 넓이가 줄어들었다. 이제 그 공간은 약 세 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엉켜버린 감정들이 태양을 향해 뻗어가지 못하고 다 타버렸다.

 

 “야, 너……”

 

 박문대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그 입은 장애물에 막혀 닫쳐버렸다. 커다란 손이 작게 떨리는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박문대는 지금 처음으로 이세진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니지. 모든 관계는 영원히 같은 형태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곁에서 하나둘 떠나간 이들을 떠올리며 숨을 참았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숨에 심장이 익어버릴 것만 같이 더웠으므로. 박문대는 애써 부정하던 과거의 벚꽃을 꺼내야만 했다. 이세진과 헤어져야만 하는 그날이 오늘은 아니겠지, 하고 넘겨온 그 모든 두려움을 이제는 감당해야만 했다. 박문대는 하루 중 가끔 이세진과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고는 했고, 이세진은 그걸 알고 있었다. 둘은 그저 아무런 것도 아니었으니. 이세진은 이걸,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박문대를 보고,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면서도, 계속, 휩쓸려 멀어지고 있었다.

 

 “문대야, 피하고 싶으면 피해. 안 피할 것 같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한 차례 다시 붙었다가 멀어졌다. 박문대는 멀어진 만큼의 거리를 가늠했다.

 

 “넌 이제, 누구에게도 내 보호자라고 불리지 않을 거야.”

 

 “…….”

 

 “우린 부모와 자식 관계도 아니고, 친구도 아냐. 그런데 이젠 내 보호자 행세도 못 하겠네. 그렇다면 문대야.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못하는 관계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보이지도 않고, 정의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쉽게 말라붙어버려 건조한 모래가 되어있지는 않을까. 손 틈 사이로 다 쏟아져 내려서 다시는 찾을 수 없지는 않을까. 우린 그렇게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린 뽀뽀도 참 쉬워. 키스도 말리지 않지. 넌 언제나 그보다 더한 것도 해줄 것처럼 굴면서…….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무엇에도 정의되지 않은 채……”

 

 여름에 먹히고 있는 걸까.

 

 박문대는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목으로 살짝 문지르고 다시 내밀었다. 그의 시선 끝에 손이 걸쳤다. 작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이제는 명백히 저보다 작은 손. 이세진은 그 손을 자신의 손안에 살짝 가뒀다가, 깔끔히 거두었다. 붙었던 온기는 가볍게 여름으로 동화되었다. 잡았던 흔적도, 온기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미안. 나 잠깐만 편의점 들렀다 갈게. 먼저 들어가.”

 

 박문대는 이세진이 황급히 돌아서 뛰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의 광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수인 학교 조기 졸업자들을 위한 단출한 야외 식장의 모습은 생각보다 잘 차려져 있었고, 온화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물론 이 날씨에 야외에 자리를 마련한 것은 박문대가 욕을 짓거리기에 안성맞춤이었으나, 지금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도 더 눈에 띄는 것은 조기 졸업자들의 모습이었다. 식장 속 수인들은 각자가 사랑하고, 애정하고, 아끼는 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축하받고 있었다. 법적으로 동거인이라 정의된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동거인을 넘어선 ‘가족’처럼 보였다. 물론 박문대는 가족처럼 보이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본 적이 없었으나, 순간의 감상이 그랬다는 것이다.

 

 친해 보이는 친구와 웃으며 떠들고, 부모쯤 되어 보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과 다 같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박문대는 그들을 보며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일찍이 아무런 가족 없이 홀로 지내왔던 자신과, 그런 자신이 좋다며 따라왔던 이세진. 어쩌면 이세진이 아무런 정의 되지 못한 채 홀로 이 세상을 걸어온 것은 온전히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 박문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아스라이 멀어지는 세상 속에서 미뤄둔 답을, 박문대는 지금 절벽 끝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풀어보지도 않은 상태로 미제라 놔두었던 하나의 삶을, 그 삶의 풀이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고.

 

 

%

 

 컴컴한 집 안에는 아직 시원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거실의 불을 켜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집에 혼자 돌아온 박문대는 몰래 숨겨두었던 화병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달달한 향은 더욱더 그가 혼자 외로이 앉아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꺼풀이 간간이 감기는 것 외에 그가 하는 것은 없었다. 곧이어 짧은 숨을 뱉은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아무런 알람도 뜨지 않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는 또다시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의 가는 손가락이 스마트폰의 화면을 가볍게 두드리면, 하얀 화면과 함께 시간이 떠올랐다. 그 행동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시간은 이세진의 졸업식으로부터 약 2시간이 흐른 뒤였다. 길고 긴 그의 인내심은 슬슬 바닥나던 참이었고, 그러니 그는 움직였다. 현관문으로 향하기 전에 창밖으로 본 풍경은 이글거리는 태양이 모든 것을 녹이고 있었으며, 비의 기운은 보이지도 않았다. 박문대는 현관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은 충분히 이세진에게 시간을 줬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이세진이 마음대로 굴었으니, 이제는 그가 마음대로 굴 시간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앞으로 향하는 발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한 거리를 지나갔다. 박문대는 잠시 추억에 잠겼다. 자신은 지금 그 추억을 역주행하고 있었다. 추억 속 돌아왔던 길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거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감기 한 세피아 색의 목적지에는 쪼그려 앉은 이세진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둘러본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박문대는 살포시 웃으며 몸을 숙였다. 정확히 작년에 보았던, 그 골목이었다.

 “이세진. 이런 곳에서 울면 눈 건조해진다.”

 

 무심한 목소리는 이세진이 한없이 기다렸던 찬란한 벚꽃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매번, 몇 번이고, 어떠한 사람을 기다려 왔던 것 같다. 기다리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마땅히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세진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분명 날씨는 모든 수분을 날려버릴 정도로 뜨거운데, 왜 자신의 얼굴의 바다는 날아가지 않는지. 꾸역꾸역 고개를 밀어 넣던 곰은, 어떤 사람의 목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멈춰버렸다.

 “이세진. 네가 물었지.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그 사람은 차가운 겨울 같아서,

 

 “우린 동거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이미 그의 안에서 얼어버린 정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바꿀 수 없었다.

 

 “그럼 세진아. 너는 동거인이 뭐라고 생각하냐.”

 

 하지만 때때로 겨울은

 

 “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내 가족이 되어주길 바랐어.”

 

 차갑지만, 무척 순수하고 하얗게 눈이 부신 빛을

 

 “우린 동거인 아냐? 그러니까…….”

 

 내려주고는 한다.

 

 “우린 이미 법으로 묶였다고. 계속 의무적으로 혹은 너와 내 선택으로……. 묶인 동거인.”

 

 박문대는 붉게 물든 두 눈동자를 보면서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음~ 보통은 임시 보호자님께서 정하시죠? 어디 용한 무당집에 다녀오시는 분도 계시고, 그냥 특별해지고 싶은 날로 정하기도 하고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의미는 부여하는 자의 마음이니까.’

 

 ‘보호자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미루시는 건지는 알겠지만, 세진이가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아요. 교육자로서 해드리고 싶은 말은…… 어떤 고민은 입 밖으로 꺼내야만 온전해지는 것도 있다고 해요. 이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음~ 보통은 보호자님께서 정하실 때도 있고, 아이가 즐거웠던 날을 정해주기도 해요. 이세진 씨의 경우는…… 저도 조금 어렵네요.’

 

 ‘박문대 씨는 생일이 무슨 날이라고 생각하세요?’

 

 박문대는 그날, 어떤 대답을 했을까. 확실한 것은 그 대답이, 그때 그 과거의 박문대가 지금의 박문대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세피아 색은 찬찬히 지워져 맑은 하늘만이 그의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이런 맑은 하늘을 추억으로 가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며. 그는 덧없이 웃었다.

 

 “이세진.”

 

 그는 시선을 올려 박문대의 눈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자신이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 내가 지금 웃고 있구나.

 

 이세진은 생각했다. 내가 처음 느낀 ‘벚꽃’은 몹시도 짰기에, 그저 한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벚꽃을 볼 때마다 매일이 생일인 기분이래. 지금 떨어지는 이 벚꽃잎이 자기가 이 자리에서 웃고 있구나를 알려준대.’

 

 그리고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의 매일을 생일로 만들어주는 벚꽃을.

 8월 1일. 그것이 박문대가 정의 내린 이세진의 처음이었다. 이세진의 가장 오래된 주변인인 박문대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첫 장면이었다. 그가 이세진을 축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이었다.

 

 이세진은 박문대가 생일 축하라는 것을 통해 제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박문대가 이세진과 만났을 때, 그제야 이세진의 존재가 비로소 이어졌다. 이세진마저 잊어가던 존재를 박문대가 기억했다. 생일은 그런 날 아닌가. 살아있음을, 나란 존재 자체를, 축복하는 것. 널 만나서 다행이다. 네가 살아남아서, 내 곁까지 와줘서 다행이다. 그런 널 내가 발견함으로써 네 삶의 존재가 다시 이어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많은 다행들이 모여서, 박문대는 이세진을 축하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널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해. 그리고 축복해.

 

 생일 축하한다, 이세진.

 

 이것이 내가 네게 전할 수 있는 ‘벚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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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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