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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pigoUvU

공백 포함 47,655자

 로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온다. 차이코프스키의 멜로디. 교과서에 나온 차이코프스키에 대해 배웠을 때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 없었고, 오로지 주고받던 쪽지에만 신경이 쏠려 답을 기다렸었다. 열일곱, 한창 첫사랑에 몰두할 시기였다.

 

 박문대가 의미 없이 생활 소음으로 지나갈 수 있었던 음악을 새삼스레 되짚은 까닭은 사람들 속에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세진, 첫사랑의 열병을 같이 앓던 쪽지의 주인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살이 좀 더 빠졌나. 얼굴에 붙었던 앳된 티가 세월에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거리가 벌어져 있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예식장 로비의 노란 끼 도는 조명 아래 눈을 접어 웃는 모습만큼은 10년 전과 비슷했다. 가슴이 묵직하고 빠르게 뛰었다. 지금 돌아서면 모르는 척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젠 교복 차림이 아니다. 문득 그런 사소한 것으로 충격을 받은 이유는 저 또한 교복을 입은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결혼식에 오는 사람답게 깔끔한 정장 차림새로 머리를 넘긴 그는 완연히 어른의 모습이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은 너무 멀리 가버렸다. 함께했던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긴데도, 어쩐지 그는 제 안에서 영원히 교복을 입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와 이야기하던 일행이 멀어진다. 시선을 느낀 건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문대야.

 

 그렇게 부른 것도 같다. 단지 입술을 달싹인 건지 이름을 말한 건지,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놀란 기색은 얼굴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미소가 채웠다. 반갑고 그리운 것을 보는 미소.

 박문대는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반응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이세진을 잘 알아도 그것만큼은 단정 지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고 되감기 하듯 생각했었다. 상상 속에서 이세진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저를 무시하고 돌아서기도 했지만, 문대가 생각하는 최악은 웃는 것이었다. 전에는 답을 내릴 수 없었는데, 지금 느끼기에 그랬다. 저를 그저 아름다운 추억의 파편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미소가 눈부셔서 가슴이 괜히 저릿했다. 그런 생각들을 되감는 사이, 이세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어. 너는.”

 “나도 잘 지냈지~”

 

 어색한 침묵이 대화에 부대낀다. 서로가 소중했던 것,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 정적이 어색하지 않고 그저 편안했던 것은 다 옛날 일이라는 게 선명하게 피부에 닿고 있었다. 실내 조명의 열기가 따갑다. 아니, 따갑다는 핑계를 붙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음, 신부 측 하객으로 온 거야?”

 “어. 너는 신랑 측?”

 “응, 같은 팀에서 근무해~ 원더홀 무대연출 팀. 신부도 엔터 쪽이라고 들었는데 너도 엔터 근무해?”

 “… 그렇게 됐다.”

 “크흡, 아니, 누가 뭐래? 티벳문대 표정 안 변했네~”

 

 못 참겠는지 소리 내 웃은 세진은 어제도 그랬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문대를 놀려먹고는, 뒤늦게야 이래도 되는지를 가늠하는 어색한 미소를 펴 바른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잠깐만, 하고 제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여 명함 지갑을 찾아 안을 열었다. 명함을 한 장 꺼낸 세진은 잠시 주저하다가, 브레스트 포켓에서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는 그대로 문대에게 내밀었다.

 

 “뒤에 적은 거, 내 개인 번호야.”

 “…….”

 

 문대는 그것을 받아들지 못하고 세진과 눈을 마주쳤다. 개인 번호는 왜 주는 거냐고, 그 간단한 물음 하나가 어려워 재봐야 하는 사이인데. 세진은 눈썹을 찡그리고는 살짝 웃더니,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오해한 듯 곤란한 연락 안 할게, 하고 입을 열었다.

 

 “… 그런 거 걱정한 거 아냐.”

 “그럼 받아. 같은 업계에 있으면서 계속 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촉하듯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낀 명함을 한번 까딱인다.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저에게 있다. 개인 번호를 받으면,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 그가 원치 않아도 자꾸 좋았을 때의 느낌대로 그를 보게 될 것 같아서.

세진은 조금 기다리다가, 결국 먼저 손을 뻗어 문대의 오른손을 끌어와 손바닥 위에 제 명함을 올려두었다.

 

 “네 명함은 다음에 받을게. 네가 연락하면.”

 

 천천히 손을 놓고, 손에 두었던 시선을 다시 맞춘다. 시트러스 계열의 데오도란트 향 대신 묵직한 스킨 향이 코를 간질인다. 왁스로 머리를 넘겨 서른 줄에 들어선 남자의 느낌이 풍긴다. 그때의 이세진은 이제 찾을 수 없는데도, 웃는 얼굴 하나만이 똑같아서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지독함이 미소 지었다.

 

 “나 다 잊었어, 문대야. 우리 어른이잖아. 이럴 수 있는 거지? 응?”

 “… 연락할게.”

 

 넌 그게 되냐? 다 잊는 게 돼?

 …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관계에서 먼저 도망친 사람은 저였으므로. 더 눈을 마주치면 여전히 그 겨울에 갇혀있다는 걸 들킬 것 같아 명함에만 눈길을 두었다. 손을 떨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명함을 손에 그러쥐고 몸을 돌렸다. 대리 이세진. 고딕체로 쓰인, 내가 모르는 너의 형태를 확인하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결혼식은 평범했다. 적당히 사람 많고, 꽃가루 날리고, 박수받는 5월의 신부와 신랑은 행복해 보이고, 그 사이에서 사회생활 좀 하고. 축하하러 모인 자리에 업계 사람들이 많으니 축하보다 사회생활의 장에 가까워지는 것은 예삿일이요, 그 사이에서 이세진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흘깃 눈을 돌릴 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고 그것은 문대에게 옛날의 기억을 계속 불러일으켰다.

 옛날,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있던 게 당연했던 때.

 

 

* * *

 

 

 그때의 이세진은 눈부셨다.

 

 인생에도 게임처럼 피버 타임이 있다면 그때였으리라. 일찍이 대형 기획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던 이세진은 대한민국 잘생긴 사람은 다 연예기획사 지하실에 있더라는 우스갯소리를 신빙성 있는 말로 바꿔주던 놈이었다. 아무개가 인하트에 올린 셀카 뒷배경에 곁다리로 옆모습 하나 올라간 날 그 친구는 유치원 동창의 안부 따위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단 디엠을 서른 개씩 받았더랬다. 키 또한 한국 성인 남성 평균 키 174cm에 한참 미달인 또래 놈들이 그래도 남자는 군대 가서도 큰다는 말에 매달리던 때, 이미 180cm를 훌쩍 넘겼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격도 서글서글 좋아 처음 만난 사람과도 15분 만에 다음 약속을 잡는 신묘한 재주가 있었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 꼬리표 받던 날 탈인간 소리를 들었다. 애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겼던, 그런 놈이 이세진이었다.

 그 이세진과 박문대가 처음 서로를 인식했던 것은 5월 말에 접어든 시기다.

 날이 참 좋았다. 꽃이 지고 나무에는 초록빛이 짙은 나뭇잎이 무성해졌다. 하루건너 하루 드문드문 봄비도 내렸지만, 그날은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릴 정도의 옅은 봄바람을 타고 햇볕이 따뜻하게 얼굴과 손등으로 내려앉는, 그런 봄날이었다.

 세진은 아침 일찍부터 눈을 떴다. 창밖에는 새들이 울고 전날 늦은 시간까지 연습실에 있다가 돌아왔음에도 피곤함 없이 개운해서, 괜스레 느껴지는 싸함에 기어이 내가 1교시에 늦는 날이 오는구나, 따위의 생각을 했던 세진은 아직 6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놀랐다. 이 시간이라면 밥 먹고 씻고 준비해서 네발로 기어가도 1교시에 늦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네발로 기어갈 생각은 없었고, 이왕 일찍 일어났으니 일찍 학교에 가서 댄스부실을 쓰겠다는 일념은 생겼다. 때아닌 여유로움을 챙겨가며 모닝빵 반쪽과 그릭 요거트, 드레싱 없는 샐러드 조금에 고구마 반 개 먹고 샤워하고 거울 앞에 좀 서 있다가 교복 입고 두 발로 걸어 교실에 도착한 게 8시 10분 전이었다.

 문을 열었을 때 세진은 비어있는 교실 문 앞에서 어제 자리를 바꿨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잠시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떠올렸다. 곧 창가에 붙은 1분단 셋째 줄이었던 것을 기억해낸 그는 제 책상에 무언가 올려진 것을 발견했다. 두 걸음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보낸 고백 편지인 줄로만 알았는데,―자아가 비대한 게 아니라, 그에게는 아직도 손수 편지를 써 고백하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가까이서 보니 사진 여러 장이었다. 그것도……

 

 “… 이고윤?”

 

 이고윤의 사진. 이고윤은 티넷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돌 주식회사>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이었다. 세진은 사진을 집어 들고 한 장씩 뒤로 넘기며 감상했다. 아이돌 팬들이 으레 들고 다닐법한 괜찮은 카메라로 찍었는지, 사진을 잘 모르는 눈에도 멋져 보였다. 뒷장에는 이고윤 외에도 다른 아이돌 몇몇과 평범한 들꽃, 길거리 등이 찍혀있었다. 잘 찍었는데, 왜 이게 제 책상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인제 보니 책상 옆에는 야무지게 가방도 걸려있다. 추정컨대 이 사진과 가방의 주인이 교실 창문도 열어둔 모양이다. 대체 저 말고 누가 이렇게 일찍 학교에 와서 이런 걸 두고 자리를 비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장까지 넘겼을 때,

 

 “너 뭐 해?”

 “아 깜짝아!”

 

 아무것도 없던 뒤쪽에서 차분하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진은 목덜미부터 소름이 쭉 올라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거센 바람이 열어놓은 창 안으로 들어와 힘을 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진이 천장으로 파스스 날렸다.

 이세진은 박문대와 연애했던 시절에, 그 순간 느꼈던 감정에 대해 몇 번이고 얘기했었다. 사진이 떨어지는 모습이 꼭 영화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고, 그 한가운데에 있던 문대의 심드렁한 얼굴에 가슴이 뛰었고, 바람 때문에 시야 끄트머리까지 힘차게 물결치는 제 뒤 창가의 커튼이 꼭 심장의 박동을 옮겨둔 것 같았다고. 거기에 박문대의 대답은 늘 어땠냐면, ‘흔들다리 효과 아니냐?’ 였다. 문대문대야, 무드 몰라? 누드는 안다. 이 분위기에 그 얘기 그만하고 벗어라. 꺅! 쪽.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세진이 그랬거나 말거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진은 깃털 같이 나풀대며 부유하기는커녕 봄날 소나기처럼 후두두 바닥으로 쏟아졌고 별로 안 친한 박문대는 이세진을 노려보았다.

 

 “어, 어?”

 “내 자리에서 내 사진 가지고 뭐하냐고.”

 “어, 저거 네가 찍은 거야? 너 사진 진짜 잘 찍네~ 근데 여긴 내 자리 맞는데? 내 자리에 올려뒀길래 누가 나 뭐 준 건 줄 알고 확인한 거였어, 미안!”

 

 세진은 놀라서―라고, 그때까진 생각했었다. 첫눈에 반했다기에는 자각 부분에서 수준 미달이었으니 그 말도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벌렁대는 가슴을 속으로나마 부여잡으며 그의 가슴팍에 있는 명찰을 흘긋 보았다. 박문대, 세 글자가 1학년임을 가리키는 노란 플라스틱 명찰 위에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 같은 반 애들 이름이야 3월 한 달 끝나기도 전에 외웠으니 새삼 이름을 몰라 확인한 건 아니고, 사적인 대화는 처음 해보는 상대라서 그렇다.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필요에 의한 말만 짧게 해본 사이의 상대. ‘문대야, 국어 노트 나한테 제출하면 돼! 그래.’, ‘이세진, 너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어, 알려줘서 고마워!’ 뭐, 그런 정도. 조용하고 똑똑한 애 정도로 생각했는데, 사진을 이렇게 찍을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이돌을 찍는 재주가.

 박문대는 앞의 칭찬보다 뒤의 주장에 주의가 더 쏠렸는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 한쪽을 치켜올린 채로 교탁에 붙은 자리 배치표를 확인하러 갔다. 이내 그는 힘이 빠진 얼굴로 돌아와서는 세진의 책상 옆에 걸어둔 제 가방을 앞자리로 옮겨 걸었다. 민망하고 면이 안 서는지 귀가 발갛게 된 채로 아무 말 않는 게 재밌어서 세진은 으하하 소리 내 크게 웃었다.

 

 “… 웃지 마라.”

 “아~ 박문대 재밌네!”

 “… 착각했다. 네 앞자리로 기억했는데 네가 세 번째 줄에 앉을 키는 아니니까. 아무튼… 추궁해서 미안하다.”

 “야, 그럴 수 있지, 무슨 사과야~ 난 지금 네 사진 다 날렸는데! 나야말로 미안하지~ 사진 내가 다 주울게! 앉아있어~”

 

 세진은 그에게 씩 미소를 짓고는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무릎을 구부려 책상 사이사이며 위아래로 떨어진 것들을 주웠다. 정확한 장수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것부터가 워낙 많아서인지 다 줍고 나면 문대에게 확인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한 장, 두 장 줍다 보니 어색하게 앉은 박문대가 책상들 너머로 보여 또 웃겼다. 어지간히 뻘쭘한가 보다. 그러고 보니 저를 기준으로 자기 자리를 기억했다는 것도 재밌다. 주변에 관심도 없고 기억도 안 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알고 있어도 크게 아는 척 안 하는 타입인 것 같다. 실실 웃으며 책상의 숲 위로 고개를 내밀어 문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까 문대 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 사진 인화하려고.”

 “인화?”

 “어. 사진부니까. 부실에서 인화돼.”

 “오~ 그래서 이렇게 잘 찍었구나~ 으하하, 그럼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그 귀한 사진 내가 마음대로 들춰본 걸로 보였겠다!”

 “미안하다고.”

 

 다시 고개를 숙여 사진을 찾느라 문대의 표정은 못 봤지만, 미안하다고, 하는 한 마디에 담긴 머쓱함과 약간의 못마땅함이 동시에 느껴져서 재차 나오려는 폭소를 참기 위해 입을 꾹 붙였다. 역시 부담스러워할 때는 놀려먹는 게 효과가 좋았다. 이제 차분한 생각을 하자. 손에 들린 사진 중 맨 앞장에 있는 지하철역을 보며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다른 질문을 했다.

 

 “음~ 사진부 들어가면 다 이렇게 배워? 아이돌도 찍고?”

 “아니, 대충 찍는 법 기초만. 아이돌은 대학 축제에 부장 누나 따라가서 찍은 거고.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왔냐.”

 “나야 뭐~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 일찍 등교해서 댄스부실에서 연습이나 할까 했지!”

 “무슨… 연습생이라고 했었나, MS 엔터.”

 

 오, 맞아. 알고 있었네? 가벼운 투로 대답한 세진은 몸을 일으켜 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앉은 문대에게 다가가 모은 사진을 내밀었다. 문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장수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팔락팔락 소리가 대화의 배경으로 흘러 들어갔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아… 그래?”

 “그래. 인기 많잖아, 너. … 사진은 스무 장 맞아.”

 

 바람결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옷깃이며 목덜미와 소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피가 도는 것처럼 온몸을 스친다. 눈을 내리깔았던 박문대가 대답과 함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다. 시선 하나로 바람이 닿은 자리마다 늦봄의 열기가 훅 끼치는 것 같았다.

 사진을 보면서 궁금했다. 사진을 이렇게 찍는 사람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까? 얘기해본 적 없으니까, 안 친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너무 다르니까, 그리고 이런 것들을 굳이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그에 대해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이 그 사진으로 새롭게 느껴졌다. 심지어 저는 잘 몰랐던 그가 제 뒷자리라는 둥 제가 어디의 연습생이라는 둥 인기가 많다는 둥 하는 정보들로 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묘했다. 모르는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게 당연한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어쩐지 사뭇 다른 간질거림이 가슴 속에 퍼졌다. 뭐가 다르지? 부푸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세진은 스스로 의문을 던졌다. 뭐냐면…

 그래, 이세진은 박문대가 알고 싶어졌다.

 그냥 일방적으로 이세진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박문대에게 보이는 만큼 박문대를 보고 싶었다. 세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 제 자리에 가 앉았다. 문대가 인상을 찡그렸다.

 

 “연습 안 가냐.”

 “음, 그냥? 얘기 좀 더 하다가 갈까 하고~ 아이돌 좋아하는 것 같아서!”

 

 물음을 서두로 신변잡기식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꼭 얘는 연습도 빨리 안 가고 나하고 이런 대화를 하는 거지 싶은 듯했던 박문대도 대화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편안해졌다. 거창한 대화는 분명 아니었다.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어떤 걸 찍는 걸 좋아하는지, 오늘 아침으로는 뭘 먹었는지, 평소에 사진 말고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지 등, 자잘한 화제들이 함께하는 순간을 촘촘히 채웠다. 무언가를 보는 관점이 비슷해서 뭘 얘기해도 즐거웠다. 혹여 다른 부분이 있어도 생각해보지 못한 시점 같아 재밌었다.

 8시 20분이 되어서야 다른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다. 무슨 얘긴데 그렇게 재밌게 해? 물어본 누군가에게 별것 아니라며 웃은 세진은 문대를 향해 댄스부실에 가보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세진은 처음으로 아침 연습을 거를까 하는 생각에 이미 지나온 교실 뒷문을 돌아보았다. 허나 금세 그 생각을 지우고 멈췄던 발을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더 얘기하고 싶어서 연습을 거른다니, 일곱 살이냐. 가볍게 속으로 한 자조는 생각할수록 웃겨서 계단을 내려가며 샐쭉 웃었다. 심지어 진짜 일곱 살 때도 세진은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박문대는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간다. 말할 때 슬쩍 보이는 이가 가지런하고 새하얗다. 멋쩍으면 제 목덜미를 문지른다. 열심히 하는 아이돌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사진은 다 좋아하지만 사람 찍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대화에서 알게 된 소소한 것들을 곱씹을수록 유쾌해졌다. 저와 더 친해지게 되면 저를 어떻게 생각해줄까? 장난칠 때마다 그 티벳여우같은 표정으로 저를 노려볼지도 모른다. 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오늘 인화한 사진에 나온 사람들처럼 저도 멋져 보일까? 사진에는 그 사람의 시선이 담긴다는데, 박문대가 어떤 시선으로 저를 볼까?

 제가 데뷔하면 저도 좋아해 줄까?

 기분이 좋아 월말 평가의 연습곡을 허밍으로 불렀다. 발길이 가벼웠다.

 

 

* * *

 

 

 [오늘 뭐 해?] 오전 9:01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만날래?] 오전 9:02

 

 부지런하군.

 토요일 오전 9시인데 도착한 문자를 보며, 문대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세진을 칭찬했지만, 본인 역시 직장인이므로 휴일에도 9시 전에 눈이 뜨이는 저주를 받았기에 문자가 오자마자 확인할 수 있었다. 답장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식탁에 앉았다.

 결국, 그날 밤에는 먼저 연락했다. 자긴 다 잊었다며 같은 업계에 있으니 연락하고 지내자는 사람에게 나는 아니니 꺼지라 고 할 수도 없지 않나. 그날도 지금처럼 문자 입력창을 띄워놓고 썼다 지웠다 한참 고민했더랬다.

 ‘나 박문대다’, … 삭제. 어쩌라고.

 ‘이거 내 번호인데 저장해라’, … 이것도 삭제. 새 학기 첫날 중학생도 아니고.

 ‘자냐?’, … 무조건 삭제. 구 남친이냐? 맞긴 맞는데, 시발…….

 최종적으로 보낸 메시지는 ‘연락하래서 했다’ 따위의 책임전가였다. 보내고 나서야 중학생 멘트가 차라리 나았을 거라는 생각에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나 세진은 개의치 않았는지 당일에는 다시 연락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뉘앙스의 말을 가볍게 던졌고, 요 한 달간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스몰토크를 나누며 간간이 연락을 이었다. 아마 만나자는 말에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사회생활 하면 일정한 텀을 두고 관리하는 게 이세진이다. 원래도 사회생활에 능숙한 녀석이지만, 어른이 되니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 사회생활을 당하는 게 자신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터다. 사회생활이 목적이면 개인 번호나 주지 말던가.

 끊은 지 한참 된 담배가 아침부터 그립다. 생각해보면 그 담배마저 이세진과 헤어지고 난 후 시작했었다. 대학교 첫 개총 때 술 좀 마시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호프집 뒷골목에서 충동적으로 산 담배 한 대 태우니 나 없으면 이제 걔 애교는 누가 받아주나 따위의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담배가 맵다는 걸 이유로 냅다 눈물을 두 줄기로 흘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됐다. 초면의 한 학년 위 선배가 담배 들고나왔다가 화들짝 놀라서 너 왜 우냐고 물어봤던 흑역사였다. 생각해보니 황당한 새끼였다, 박문대. 지가 차놓고 뭘 처 울고 있었나.

 자꾸 마음이 답장을 재촉해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식사는 안 된다. 둘이 식사한다면 메뉴는 분명 한식일 텐데, 앞에 두고 갈비찜이나 삼계탕 먹고 체하고 싶지 않다.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작성했다.

 

오전 9:13 [식사 말고 술은 어때]

 

 전 남자친구가 술 마시자고 하는 건 더 이상하지 않나? 섬찟한 깨달음이 벼락처럼 머리에 내리꽂혔으나 이미 전송 버튼은 눌린 뒤였다. 다급함에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오전 9:13 [식사는 선약이 있어서]

 

 선약이라니, 극도로 어설픈 변명이다. 그보다 안 물어봤는데 과한 정보 제공을 했다. 제발 박문대는 필요한 자리 아니면 안 나갔다는 걸 이세진이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혹은 정말 필요한 자리겠거니 알아서 생각해주거나.

 세진이 금방 문자를 확인했는지 입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창이 떴다. 짧게 답장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오래 떠 있는 입력 창을 보고 의아했지만, 정작 돌아온 답은 딱 예상대로였다.

 

 [술 좋지~ 선약은 언젠데?] 오전 9:15

오전 9:15 [6시에 만나니까 8시 반 어때]

오전 9:16 [XX역에서]

 [오케이~] 오전 9:16

 

 일어났던 침실로 다시 돌아가 핸드폰을 베개맡에 던졌다. 침대가 크게 일렁일 정도로 강하게 풀썩 쓰러져 몸을 뉘었다. 한번 일어났는데 다시 잠이 들 리는 없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은 기분이 밀려 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중학생 수준을 피하려고 했더니 오히려 사회성 없는 중학생 수준이 됐음에 자괴감이 들어 매트를 주먹으로 쿵쿵 쳤다. 이세진만 관련되면 박문대가 아니게 되는 것 같다. 박문대는 단물 다 빠진 10년 전을 자꾸 곱씹는 사람이 아닌데. 다급해서 바보 같은 답장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한다.

 조금 진정한 후 씻고 밥 먹고 소파에 다시 누운 채 TV만 틀어뒀을 뿐인데 어느덧 시간은 오후 6시에 가까워졌다. 문대는 이렇게 시간을 쓰레기처럼 써보기는 처음이라는 생각 따위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TV에서는 마침 예능을 하는지라, 그의 소속사에 소속된 남자 아이돌이 홍보 차 부르는 경쾌한 신곡이 거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우리 같이 있던 시간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어… 욕실로 향하는 문대의 등 뒤로 가사가 비수를 푹 꽂는다. 저 앨범 컨셉 포토 찍을 때도 이세진 생각을 해서 그런가, 칼날이 유난히 매섭다. 사실 주말에도 오전 9시 전에 일어나는 것만이 제가 받은 저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과거의 맹렬한 사랑도 이렇게 저주로 남았다. 그것도 구질구질하게 온갖 사랑 노래 듣고 그 애를 생각하는 저주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자 6월에 찬물 샤워를 감행해봤으나 머리에서 날아가는 것은 없었다. 미련인지 저주인지 사랑인지, 아무튼 그 가운데 어디쯤인 이 마음은 수용성이 아닌가 보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매만져봤으나 곧 이게 다 뭔가 싶어 대충 벅벅 흩트렸다. 한참 좋아죽던 열여덟에도 하다가 닭살 돋아 말았던 짓이다. 이세진 하나 때문에 오늘만 벌써 세 번, 중학생이었다가 서른 살이었다가 열여덟 살이 되는 무쌍한 변화를 겪는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마를 앞머리로 덮는 머리를 하고 얇은 폴라티에 슬랙스를 입었다. 현관 벽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서서 평소와 똑같은 자신을 낯설어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세진을 만나러 가는데 이렇게 어른스럽게 입었다. 당연하지, 어른인걸. 이제는 이세진을 만나지 않는 게 평소인걸. 하지만 어른이 된 박문대도 사실은 알고 있다. 가끔 평소의 박문대는 집에서 입는 반바지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계단 두어 칸을 한 걸음으로 잡고 조급하게 맨 아래층에서 기다리던 이세진을 만나러 가던 날처럼 다 제쳐두고 그를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자기암시나 하는 이런 시간 낭비가 비정기적으로 필요하다. 박문대는 상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지하철로 1시간 30분 걸리는 XX역이 먼 줄 알았는데 사람에 치이고 마음에 치이다 보니 금방이다. 3번 출구 근처라는 메시지를 보내놓고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어 벽에 기대어 섰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알았으면 자가용 끌고 나올걸. 카메라를 켜고 셀프 모드로 돌려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다 흐트러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정리했다.

 

 “셀카 찍어?”

 “그럴 리가 있, … 언제 왔냐.”

 “방금? 근데 선약이 일 때문에 만난 거였나 봐, 문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덩달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핸드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렸다. 세진이 청바지와 셔츠를 입은 제 몸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머리를 들고 머쓱한 듯 웃었다. 눈길의 의미를 느낀 박문대 역시 제 차림새를 확인했다. 주말에 선약이 있는 사람치고는 구두까지 신은 게 놀다 온 사람이라기보다는 일하다 온 사람 같다. 적어도 운동화를 신고 올 걸 그랬나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업무차.”

 “아, 난 또~ 알았으면 나도 비슷한 스타일로 입었을 텐데. 거슬리면 새 옷이라도 살까?”

 

 뭘 그렇게까지. 됐다는 뜻으로 머리를 살짝 젓고 어디 갈래, 하고 물었다. 예의상 해본 말이었는지 두 번 말하지 않은 세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마침 이 근처에 괜찮은 집을 안다고 출구 방향을 가리켰다. 어쩐지 오늘은 저번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문대는 세진의 표정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이며 세진의 옆으로 따라붙어 걸음을 옮겼다.

 

 “캐주얼한 와인 바라서 이 차림새로 가도 괜찮을 거야! 와인 좋아해?”

 “술은 대부분 좋아하지. 너는?”

 “기분 좋을 때 조금 마시는 건 좋아~ 근데 엄청나게 잘 마시는 건 아니야! 박문대는 뭔가 주당일 것 같은데?”

 “아니거든.”

 “아, 티벳여우 표정!”

 

 서로가 모르는 모습에 관해 묻고 답한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농담하고 웃는다. 사적인 영역의 대화가 지속될수록 결혼식장에서 만났을 때 느꼈던 낯선 감각이 흐려진다. 데오도란트 향 대신 스킨 향이 나도,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이세진은 이세진이었다. 이전에는 웃는 얼굴 하나만이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여러 점이 예전과 같았다. 세진이 그렇게 배려하는 것도 느껴졌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세진의 눈빛이 예전 그대로였다. 누가 이 생각을 들으면 상식적으로 10년 전이라는 세월 때문에 무언가 착각하는 거라고 하겠으나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할 만큼 박문대는 그 눈빛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저 눈빛을 어떤 단어로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꼭 소중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 늘 소년 박문대의 마음을 간질이던 눈빛 말이다.

 고심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는 아늑한 조명에 저마다 와인과 안주를 먹으며 머리를 맞댄 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사람들 덕에 잔잔한 분위기였다. 문대는 이런 가게를 알아두는 것도 사회생활의 일종인가 싶어 새삼 세진의 사회성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 대충 통유리 창가가 있는 구석의 빈자리에 앉아 직원이 추천하는 레드 와인과 잠봉뵈르를 시키고 직원이 주방으로 가는 뒷모습을 말없이 보았다.

 침묵은 준비되지 않은 채 왔다.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눈을 마주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두 사람 모두 느꼈다. 밤거리의 행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유리 너머로 진동처럼 느껴졌다. 가게 안의 목소리도 소곤소곤,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세진의 눈썹이 난처한 듯 내려갔지만, 그의 입은 하려던 질문을 멈추지는 않았다.

 

 “음,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 아니.”

 “그치? 반지가 없어서 그럴 것 같았어. 내 말은, 우리 나이면 반지를 낄 테니까.”

 

 안도한 듯 말한 것이 쑥스러운지 테이블에 올렸던 제 두 손을 겹친다. 문대는 세진의 손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세진 역시 반지가 없었다.

 

 “너는.”

 “응?”

 “왜 만나는 사람이 없어?”

 

 물어놓고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세진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세진은 슬픈 표정을 하고 시선을 내렸다가 한참이나 후에야 힘겨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 그 질문은 너무했다, 문대야.”

 “…….”

 

 정적을 깨고 직원이 와인과 잠봉뵈르를 가지고 왔다. 표정을 추스른 세진이 살짝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직원은 그들이 주문한 것을 테이블에 그럴듯하게 차린 뒤에 그들의 세계에서 나갔다. 뭐라 말할 타이밍을 놓친 채 이미 수습이 끝난 세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는 그냥 먹자고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산딸기 향이 나고 풍미가 좋고 어쩌고 하던 직원의 멘트가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간 와인이 마냥 쓰기만 했다.

 

 

* * *

 

 

 우연이긴 했으나 한번 물꼬가 트이니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박문대는 사진을 인화하려고 종종 일찍 왔고, 이세진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위해 매일같이 제일 먼저 교문 안으로 들어오는 학생이 됐다. 야, 너 요즘 학교 되게 일찍 다닌다? 등교하는 꼴을 못 봐. 같은 반 선도부 아무개가 그렇게 말했고 이세진은 그 얘기가 박문대한테 들릴까 봐 눈치 한번 보고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어제 방영한 인기 수목드라마 얘기를 했다. 문대가 그 얘기를 들었는지 말았는지는 몰라도, 그 다음번 아침에 만났을 때는 티벳여우를 닮은 표정으로,

 

 “나 앞으로 금요일에만 인화할 거니까 다른 날 괜히 일찍 다니지 마라.”

 

 라고 선언했다. 웃으며 아니라며, 나도 월말 평가도 준비하고 혼자 연습도 하느라 일찍 다니는 거라며 항변했지만 거짓말을 한다고 박문대가 한번 말한 것이 바뀌거나 이세진이 박문대랑 얘기하자고 일찍 다녔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지라 어쩔 수 없이 세진은 문대를 따라 금요일 아침에만 빨리 등교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금요일 아침만 특별한 시간인 건 아니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공기가 달라졌으니까. 큰세진과 문대문대라는, 애칭 아닌 애칭을 쓰기 시작했다. 서로를 부르는 게 편해졌다. 오다가다 가볍게 등짝을 치거나 헤드록을 걸고 장난을 쳤다. 금요일 아침에 나누는 대화가 두 사람의 사이를 두텁고 긴밀하게 빚고, 평소에 주고받는 작은 것들이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세진이 문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문대 또한 세진을 보았고, 그때 세진은 그냥 웃었다. 눈빛에 말을 담아 보내면 그걸 알아듣는 게 좋았다. 주파수가 맞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던데, 세진은 그 말이 딱 저와 문대에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또 둘만이 특별한 세계에서 텔레파시를 쓰는 거라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달라지는 게 주변에서도 보이는지 점점 너희 친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웃기게도 이세진과 박문대는 따로 물어보면 둘 다 요즘 좀 친해졌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같이 있을 때만 각자 오버하며 다른 대답을 했다.

 

 “완전 베스트 프렌드지!”

 “그냥 좀.”

 “야아~ 박문대애~ 매정하다!”

 

 그러면 박문대는 거기에 피식 웃었다. 실없이 웃는 짓 안 하는 놈이 실없이 웃는다. 물어본 사람들은 다른 답을 듣지 않아도 그 표정을 보고 친하구나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1학기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방학만을 앞둔 7월 첫날은 사진부 선배가 문대는 세진이 참 좋아하는 것 같아, 하고 운을 뗀 적이 있었다.

 참, 좋아하는, 것, 같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텐데, 마디마다 다른 갈래로 박문대의 심장에 무게추를 달아 떨어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도 그 이유를 몰라서, 문대는 단지 들은 말에 대해서만 물었다.

 

 “제가요?”

 “응! 같이 있으면 표정이 편안하잖아. 세진이도 문대 많이 아끼는 것 같고~”

 “그런가요. 잘 모르겠는데……. 이세진이 워낙 사회성이 좋으니까요.”

 

 그냥 잘 맞으니까, 이세진이 활발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문대는 그제야 새삼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 순간엔가 이세진과 박문대는 모두에게 한 세트였다. 심지어 당사자들에게도 그랬다. 문대문대야, 덥다~ 몰아치는 7월의 날씨에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공부 중인 자신의 어깨에 감은 팔을 풀지 않는 이세진을 보며 박문대는 생각했다. 얘가 언제부터 평소에 이렇게 붙어있었더라? 떠올리자니 어제도 그제도 이랬던 것 같다. 원래 옆자리인 애도 이제는 옆자리보다 이세진의 원래 자리인 뒷자리가 더 자연스러운 모양새다. 자습이라고 적힌 칠판을 보며 심드렁하게 뱉었다.

 

 “더우면 떨어져라.”

 “헉, 그거 진심이신가용? 나 떨어지면 제일 심심해하는 거 문대문대면서~”

 “내가.”

 “웅~ 문대 몰라? 저번에 국어 시간에 문대 아파서 엎드려있을 때 ‘큰세진…’ 하면서 앓았던 거!”

 “내가 그랬다고.”

 “야, 속지 마, 박문대! 그거 이세진이 뒤에서 깔아뭉개니까 잠결에 무겁다고 비키라고 한 거야!”

 

 지나가던 아무개가 낄낄대며 사실을 말하고 도망가자 세진이 벌떡 일어나 야아, 그걸 왜 말해, 하고 외치며 쫓아가는 시늉을 한다. 투닥투닥 장난스러운 실랑이를 벌이며 서로를 퍽퍽 치기도 한다. 문대는 샤프를 놓고 턱을 괴며 그 꼴을 보며 이세진에 대한 기억을 가지처럼 뻗기 시작했다.

 이세진은 선을 잘 안다. 미친 듯이 까불면서도 진짜 기분 나쁜 데까지는 안 간다. 부담스러운 상황에서도 이 까불거림은 활약한다. 고마움이나 미안함에 민망할 정도가 되면 이세진이 알아서 까불대며 마음을 덜어내 준다. 눈치도 배려심도 좋은 놈이다.

 또 가리지 않고 뭐든 노력한다. 연습생 한다면서 학교를 허투루 다니지 않는다. 밤늦게까지 회사에 박혀서 연습하는 생활을 하면 인생에 여유가 없어서 공부는 시험 기간에나 벼락치기 할 법도 한데 그냥 평소에 열심히 한다. 춤이 특기면서 춤에만 시간 다 쏟는 짓도 안 한다. 음악 가창 시험 때 보니 노래도 좀 하고, 제 피부를 보더니 피부과를 공유해달라는 둥 했던 걸 보면 외모는 열심히 관리하는 걸 굳이 말할 것도 없다.―피부과는 애당초 안 다니기 때문에 공유해줄 수가 없었다― 아이돌은 뭐든 잘해야지, 그 생각 그대로 사는 놈이다.

 잘 통하기도 한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비슷해선가, 서로의 행동이나 생각을 이해하기 쉽다. 인정하기 싫지만, 특히 이세진은 박문대를 너무 잘 안다. 박문대 은근히 통제하는 거 좋아한다는 말에 무슨 개소리냐고 받아쳤던 날, 새벽 2시까지 혼자 조별 과제 PPT를 고치면서 느꼈던 1패의 맛이 아직도 선명하다.

 

 “얍~”

 

 그때 생각을 하니 손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어느새 꽉 쥔 주먹 사이로 자리에 돌아와 앉은 이세진이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그만 쥐라는 듯 손바닥을 살살 간질이고는, 틈이 헐거워지자 손가락을 빼내고 싱글싱글 웃는다.

 

 “우리 문대문대는 그사이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성질 참을 때처럼 주먹을 꼭~ 쥐셨대?”

 “네 생각 했는데.”

 “아, 왱~ 그때 별로 힘 안 주고 뭉갰으니까 한 번만 봐줘~”

 “생각하느라 잊었는데 그게 있었네.”

 “아, 아! 문대야, 문대님, 잘못했어요! 야아, 방금 거 진짜 아팠어!”

 

 세진은 얻어맞은 등 뒤로 손을 돌려 등짝을 문질렀다. 짝하고 손바닥과 등이 연신 맞닿는 소리가 꽤 컸지만 문대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모습이다. 깨문 입술 사이로 스읍, 하고 뭉개진 숨이 오간다.

 

 “아야… 하여튼 박문대 손 진짜 매워~ 근데… 그거 아니면 내 생각은 왜? 막, 갑자기 내가 너무 잘생겨 보이고 그래? 그래서 참을 수가 없어? 그런 거야?”

 

 아픈 것도 잊고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붙는다. 두 팔을 박문대의 책상에 대고 꽃받침을 만든다. 그걸 보니 힘이 다 빠져 의자에 등을 털썩 기댔다.

 

 “됐다…….”

 “아, 왜~ 나 안 잘생겼어? 얼굴 보면 막, 심장이 두근두근하지 않아?”

 

 두근두근 같은 소리를.

 잘생긴 거야 객관적으로도 알지만, 이세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기 때문에 개소리다 싶으면서도 한번은 들여다봐 준다. 우선 눈썹이 짙고 두껍다. 눈과의 거리가 가까워 시원스러운 인상에 크게 기여한다. 쌍꺼풀이 두껍고 눈매는 동그란데, 눈꼬리가 올라가 있고 눈 아래의 애굣살도 도톰해 웃을 때가 특히 매력적이다. 코야 말할 것도 없이 미끈하고 높다. 입술은… 왜 입술색이 얼굴색이랑 똑같냐?

 

 “뭐야?”

 “어? 뭐가?”

 

 모르는 척하는 말과는 다르게 뜨끔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다. 꽃받침을 하던 팔을 치우고 몸을 뒤로 물렸다. 곧 식은땀도 흘릴 것 같다. 마주치던 눈을 슬그머니 피해버린다. 어이가 없어 저 역시 몸을 살짝 뒤로 뺐다.

 

 “… 네가 두근두근한 거냐?”

 “아~ 그걸 대놓고 물어보면 어떡해, 문대야~ 아니, 네가 나를 엄청나게 오래 뜯어보고 있잖아~”

 “우리끼리 뭘…….”

 

 쑥스러워하던 세진이 그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웃는다. 짓궂은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책상에 팔을 세워 옆으로 몸을 기댄다. 고개를 까딱 기울인 세진이 다른 손으로는 문대의 볼을 콕 찔렀다. 하지 마라. 차분한 말과 함께 세진이 ‘티벳여우’라고 표현하는 표정이 문대의 얼굴 위로 뜨자 세진에게서 으하하, 하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나온다. 그는 손을 치우고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끼리니까 그런 거지~ 아냐?”

 “… 그런가.”

 “그렇지요~”

 

 세진은 읏챠, 소리를 내고는 책상 위로 엎어졌다. 워낙 등판이 크니 책상 하나가 다 덮인다. 그는 고개만 옆으로 돌려 문대를 보았다. 얘기하고 싶어서 아침 일찍 등교하던 날들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우리 사이 이만큼 왔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여름의 햇빛이 따갑다. 콜라의 탄산이 튀듯이 피부마다 잘게 닿는다. 불현듯 문대의 볼 위로 닿는 햇살이 보여 세진은 손을 들어 올렸다. 작은 햇살 한 줌이 커다란 손바닥에 가려져 더는 볼 위로 침투하지 못했다. 박문대는 이세진이 하는 일들을 가만히 보다가, 참고서를 덮고 세진의 손을 잡아 내림과 동시에 자기도 책상에 납작 엎드렸다. 책상에 엎어진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에게 닿았다.

 

 “이러면 되지.”

 “공부하던 거 아니야?”

 “네가 이러고 있는데 공부가 되겠냐.”

 “이야, 큰일 났네~ 우리 문대문대 공부 못하면 안 되는데 세진이는 계속 이러고 싶네~”

 “누가 말리겠냐.”

 

 말을 하느라 책상에 닿은 뺨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세진은 잡힌 손을 돌려 문대와 손바닥을 마주 닿게 했다. 미지근한 온도가 손 안에 떠돌았다. 세진은 손가락을 슬쩍 움직여 문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웠다. 넌지시 문대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손을 잡는 걸 조금 거슬려 하는 얼굴인데, 쳐내지는 않는다.

 이세진은 어쩐지 그게 좋았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입안에 거치적거리는 사랑니처럼 자꾸자꾸 불역해서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친구가 되고 나니 그냥 친구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새로우면서도 익숙했다. 싫은 점이 있을 법도 한데 매일매일 좋아진다. 박문대의 손을 잡고 춤추다가 지쳐 쓰러져도 좋았다.

 

 “문대야.”

 “왜.”

 

 이름을 부른 말에 돌아온 대답이 차분했다. 자습이라는 시간도 고려하지 않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이 작은 목소리를 잡아먹을 법도 한데 유달리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박문대의 목소리는 등교하면서 듣는 노래보다 더 잘 들렸다. 그게 재밌어서 세진은 빙긋 웃었다.

 

 “나, 여름방학 중에도 연락해도 되지?”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냐?”

 “그럴 리가~”

 “그럴 줄 알았다.”

 

 

* * *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 세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 얘기를 섞어가며 비즈니스와 퍼스널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대화를 했다. 아까의 표정을 기억하는 박문대만이 거스러미가 일어난 사람처럼 초조함을 느꼈다. 사과를 해야 하는데. 문대는 세진의 기색을 슬쩍 살폈다. 사귀는 사람이 없는 건지, 왜 없는 건지 궁금했던 건 맞지만 세진을 슬프게 하면서 묻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적절한 때라는 건 오지 않고 오후 11시가 되었다. 슬슬 가게 안의 사람들도 빠져나가 한산해졌고, 둘 다 지하철을 타고 왔으니 막차가 끊기기 전에 가야 했다. 헤어질 타이밍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슬슬 일어날까?”

 “… 그래.”

 

 세진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문대는 속으로 좆됐다고 되새겼다. 사과는 입도 뻥긋 못하고 이세진이 주도하는 현란한 사회생활 토크만 두 시간을 지속했다. 계산을 끝내고 밤거리로 나오며 박문대는 피로감에 제 뒷목을 매만졌다.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자꾸 주게 된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분명 이세진도 저를 소중히 여겼고 저도 이세진을 소중히 여겼는데 서로가 너무 소중할 때마다 자꾸 어긋났다. 누구 한 명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면 편했을 텐데, 우리는 둘 다 사랑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구 하나 죽으면 따라 죽을 불나방들이었고, 서로를 공전하는 행성이었고, 줄곧 그래서 결국 헤어지고 만 놈들이었다.

 

 “… 내가 미안.”

 “뭐?”

 

 고요 속의 밤거리를 나란히 걷던 이세진이 먼저 사과를 던졌다. 왜 사과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황당함이 묻은 물음을 뱉었다. 아래를 보던 고개를 들어 문대를 바라보았다. 눌러두고 있던 씁쓸함을 더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꺼낸 얼굴이다.

 

 “보통… 아는 사람끼리 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내 감정 못 추스르고 날카롭게 받아쳐서 미안.”

 

 수습하려는 듯 정돈된 말에 이번에는 외려 이쪽에서 울컥 감정이 치고 올라온다. 찌푸려지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여과되지 않은 것을 그대로 배출했다.

 

 “우리가 왜 그냥 아는 사람인데.”

 “그럼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 아니…, 아니야.”

 

 세진 쪽에서도 감정이 격해져 단박에 받아쳤다가 답을 듣지 않고 뒤로 물러난다. 헤어지기 직전 싸웠던 일이 오버랩된다. 문대는 이를 악물었다가 이마부터 쓱 머리를 쓸어올렸다. 성질을 못 이긴 머리가 이리저리 뻗친다.

 

 “… 미안하다. 그냥 아는 사람, 그거 하자. 네가 좋으면 그러자고.”

 “… 아니야, 난…….”

 “아니, 내가 선 넘은 거 맞아.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래.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으면 그런 거 안 묻는 게 맞고 그냥 아는 사람인 거 부정하지 말았어야 해.”

 “…….”

 

 담배…, 그걸 왜 끊었을까. 그 전에 술은 왜 기분 좋은 정도로만 마셨을까. 맨정신으로 있기 힘들어 차라리 이세진을 보내놓고 먼저 담배를 피웠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 따위를 한다.

 모든 일의 원흉은 박문대다, 라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박문대는 아직도 이세진이 애틋했다. 슬픈 얼굴 보고 싶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어려운 일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되고 싶은 거 다 되고, 심지어 내가 저 녀석에게 사회생활 당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될지언정 저 녀석의 일이 무조건 다 잘 풀렸으면 좋겠다. 그렇다. 박문대는 이세진을 먼저 찬 주제에 더럽게 뻔뻔하고 구질구질한 놈이었다. 빌어먹을 순정을 가진 놈이었다.

 

 “… 연락해라.”

 

 지하철역의 불빛이 보인다. 와인 바에서의 대화 중 세진은 다른 노선을 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문대는 도피하듯 작별 인사를 건네고 역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아마도 다른 노선에서 더 가까운 출구로 갈 테니 잔뜩 일그러진 제 표정은 못 볼 것이 뻔했다.

 그러나 개찰구를 통과하려고 앞에 섰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대야, 잠깐만!”

 

 누구의 목소린지 바로 알았기에 정말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꾹 다문 입가에 힘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뛰어왔는지 볼이 빨간 이세진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천천히 문대의 앞에 다가선 세진은 어쩐지 살짝 젖어있었다. 앞머리는 헝클어졌고 셔츠에도 군데군데 물방울로 만들어진 듯한 얼룩이 있었다. 그는 가까이 오더니 눈을 크게 뜨고 박문대의 양 뺨을 잡았다. 손에도 물기가 어려 차가웠다. 싸늘함에 몸을 움찔 떨자 세진은 정신을 차린 듯 뺨에 댄 손을 다시 내렸다.

 

 “미안, 우는 줄 알고 놀라서.”

 “넌 내가 이런 일에 우는 거 봤냐.”

 “못 봤지, 못 봤는데… 그래도 혹시나 싶었어. 네가 안 슬펐으면 좋겠단 말이야.”

 

 지나가는 말에 담백한 진심을 듬뿍 넣어 던지는 이세진을 보며 박문대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기가 앉은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쉰 문대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세진에게 건넸다. 세진이 고마워, 하고 인사하며 손수건을 받아 제 얼굴이며 손등, 옷에 닿은 물기를 닦았다. 문대는 가만히 그것을 기다려주다가, 젖은 손수건을 다시 돌려받을 때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아, 맞다. 지금 밖에 비 와서. 나도 5번 출구로 지하철 타러 가다가 맞았어. 문대 너 우산… 아니다, 너 내리는 역에서 집 가려면 버스 타야 한다며.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리 집 가까워. 20분이면 가고 역에서 나가서 3분 거리야. 오늘은 자고 가.”

 “제정신이냐?”

 

 무의식적인 대답이 나왔으나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세진은 이런 반응도 예상했는지 변함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완전. 누가 나 얼빠진 놈 만들고 가서 술도 다 깼어.”

 “…….”

 “근데 그 누구 씨는 아직 취해서 따라가는 거라고 쳐도 돼. 비도 오는데 그냥 아는 사이끼리 뭐 어떠냐고 생각해도 되고. 나는 그냥… 빗속에 우산도 없이 너 안 보내고 싶어서 그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상대가 박문대라서일까, 이세진이 다정해서일까. 이세진을 사랑했던 입장에서는 답이 명확했지만 반론하지 않았다. 5번 출구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며 세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짧은 말에 세진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걸음을 옮기며 박문대는 같은 업계고 뭐고, 아직도 애틋하고 뭐고, 그런 생각을 다 버리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던 게 문제였다. 박문대는 머릿속으로 세진에게 서로가 가진 이 감정들을 다 버리자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궁리했다.

 

 

* * *

 

 

 ‘세월이 유수 같다~’, 이 씨 가족의 대장, 최 여사가 종종 하는 말이다. 세진은 그 말을 빌려, 새삼 근 1년이 유수 같다고 느꼈다.

 막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회사의 댄스 트레이너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었다. 교복 입기 시작하면 눈 깜빡할 사이에 고등학교 3학년 된다? 그 말을 떠올리며 세진은 아마 트레이너 선생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세진의 열여덟, 곧 열아홉이 되는 인생은 박문대의 존재를 기점으로 전후로 나뉘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이 금요일인지 생각한다. 금요일일 때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간다. 등교하면 문대의 반으로 곧장 간다. 슬프게도 2학년이 되고 나서는 반이 갈렸다. 아침부터 예습 복습을 하는 박문대의 앞자리를 빌려 장난을 좀 쳐주고 대화를 나눈다. 8시 50분이면 문대네 담임인 과학 선생님의 호통을 듣고 반으로 간다.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문대의 반으로 뛰어간다. 하필이면 한 층 내려가야 하는 데다가 이 끝에서 저 끝이라 뛰어도 왕복 4분이 걸린다. 가끔은 박문대가 먼저 온다. 엇갈리지 않기 위해 꼭 중앙계단을 이용하기로 약속해서, 마주칠 때는 꼭 중앙계단이다.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다가 세진을 발견할 때 꼭 큰세진, 하고 부르는 박문대는 세진의 눈에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번 꼭 끌어안는다. 이제는 다들 익숙해서 지나가면서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는다. 매번 박문대만 이거 놔라, 한다. 학교가 끝나면 박문대와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간다. 801번 버스를 타고 문대는 청솔 도서관에서, 세진은 세 정거장 뒤인 청솔역에서 내린다. 하차 문 앞자리에 앉은 터라 문대가 먼저 내리려고 일어나면 문대가 앉아있던 바깥쪽 자리로 옮겨 자리에 선 문대의 꼭 손을 잡는다. 지하철을 타고 네 정거장 가서 회사에 도착한 후에는 트레이닝을 받는다. 밤늦게 그날의 연습이 끝나면 회사 샤워실에서 씻고 나와 버스를 타러 간다. 집 근처에서 멈추는 버스인데, 정류장까지는 20분 정도 걸려서 거기까지 걸어갈 때 박문대에게 전화를 건다. 뭐하냐고 물어보면 박문대의 대답은 늘 똑같다. 공부 중. 20여 분간 통화 후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오면 학교에서 오늘 공부한 내용을 다시 보고, 박문대를 상각하며 잠이 든다. 이렇게 세진의 하루는 박문대로 시작하고 박문대로 끝난다.

 규격에서 벗어나더라도 문대와의 매일은 즐겁다. 모의고사 때문에 일찍 끝난 날은 박문대를 데리고 노래방에도 갔고―노래를 아주 잘했다. 아주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기 아까울 정도로―체육대회 날은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로 1등을 해서 바로 박문대에게 가 얼싸안은 적도 있었다. 수련회 때는 박문대네 방에 갔다가 한 이불에서 잠들어서 다음 날 아침부터 방장이 찾으러 왔었다. 이세진의 인생은 이제 박문대가 없으면 상상할 수 없었다. 박문대의 존재 하나가 이세진에게 선물 같았다.

 느닷없이 이런 것들을 돌이켜보는 이유는 이제 한 발 나갈 때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언젠가, 라고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침에 박문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 유달리 강하게 들었다. 2학년 2학기가 끝나는 지금이 아니면 박문대도 저도 여유가 없을 거다.

 그래서 이세진은 고백했다. 당일에.

 

 “좋아해.”

 “… 너는 무슨 고백을…….”

 

 제때 잘했군. 잘한 건 아닌가? 거슬릴 게 없기야 하지만 다소 뜬금없긴 하다. 고민하는 사이 뒷말이 애매한 타이밍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오늘, 이세진과 박문대는 신나서 청솔 사거리로 나가 제일 먼저 요즘 인기 있는 영화를 봤다. 이름있는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인데, 둘 다 별로 재밌다고 느끼진 않았다. 어쩌면 둘 다 흘긋흘긋 서로의 얼굴을 보느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영화관에 딸린 게임센터에서 펌프를 밟았다. 이세진은 연습생 체면 안 구기고 뭔가 보여줬다. 같은 건물의 2층으로 내려가 코인노래방도 좀 땡겨줬다. 문대가 지른 고음 때문에 바깥에서 사람들이 미어캣처럼 한 번씩 기웃대고 지나가는 게 재밌어서 세진은 막 웃었다. 노래방에서 나오니 다섯 시라서 맥도날드에 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흐물흐물한 감자튀김의 존재를 용인해도 되는지 같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같이 박문대 집까지 걸어갔다. 오늘은 마침 세진이 가족 모임 때문에 연습을 빠지니 시간이 넉넉하다는 핑계로 말이다.

 12월은 5시만 돼도 이미 어둑해지는 터라, 문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로등이 켜졌다. 그저께 내려 아직 녹지 않은 눈은 누군가 치워 길모퉁이에 덩어리째 얼어있었다. 날이 추워 안 그래도 사람 없는 동네에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였다. 내일부터는 고등학교 2학년보다는 예비 고3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바쁜 시기에는 흔히 누구나 감정 같은 것들을 포기하기 마련이라, 문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진에게 자꾸 마음이 기우는 것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이런 시기뿐 아니라 박문대는 애초부터 전반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학기 중에는 학교 공부를 하면서도 상금이 걸린 각종 공모전이나 대회에 나가고, 방학이 되면 편의점이나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했다. 큰이모는 돈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삶에 성큼 들어온 게 이세진이었다. 이세진은 그냥, 저를 좋아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없는 여유도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피차 고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대의 앞에서는 늘 진심으로 웃었다. 그가 포지션에 대해 고민하던 날도 그랬다. 별다른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너 같은 유형이 팀플레이에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황에서 제 몫 하는 사람은 드물다, 말했더니 그 말을 그렇게 좋아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와 잘 맞는 사람을, 제가 하는 말 하나까지 좋아하는 사람을, 저를 아끼고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다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을까?

 문대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 세진이 눈앞에 얼굴을 기웃댔다.

 

 “왜~ 너무 황당해서 싫어? 싫은 것 같진 않은데? 다른 날 할까?”

 

 이렇게 단박에 제 표정을 읽어서 얄미운 데가 있지만. 순식간에 얼떨떨함이 잦아들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자 세진은 그것도 읽었는지 크게 으하하, 웃어버린다. 문대문대야, 지금이 딱 고백하기 좋은 타이밍인데? 이 조명, 온도, 습도……. 맞기 전에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응. 실없는 대화를 하면서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가로등 불빛이 내린 얼굴이 새하얬다. 선뜻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박문대에게 이세진이 성큼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져 살짝 머리를 들었다. 위험을 방어하듯이 생각하기 전에 앞서 말이 나왔다.

 

 “… 너 아이돌 한다며.”

 “음~ 그렇지. 그렇다고 문대한테 고백 못해서 여태까지 해온 걸 원망하는 것도 싫어. 어차피 말 안 하면 다들 각별한 친구라고 생각할 텐데, 우리도 쉽게 생각하자~ 문대문대!”

 

 자기도 뭘 생각할 때는 어렵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으면서, 말은 잘한다. 한순간의 치기나 단순한 장난 혹은 변덕은 아닐 것이다. 쉽게 말하는 척 했지만 여태까지의 태도를 보면 세진도 계속 고민해보고 꺼낸 말이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괜히 커플이니 이란성 쌍둥이니 하는 농담을 듣는 게 아니다.

 까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나풀대고 내리기 시작했다. 문대는 세진의 앞머리에 앉은 눈송이를 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진도 덩달아 위를 보았다. 내리는 눈송이는 점점 굵고 촘촘해졌다.

 

 “문대야, 그거 알아?”

 “뭐.”

 “눈 많이 올 때 하늘 보고 있으면 꼭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 스노우볼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나 싶어 다시 세진을 보니, 이미 문대를 보고 있던 세진은 눈을 빛내며 그림같이 씩 웃는다.

 “난 너랑 같이 그런 거 매일 보고 싶어. 이것만 생각하면 안 돼?”

 “…….”

 

 문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 난놈이다. 닭살이 쭉 돋는데 맥박이 미친 듯이 뛰는 건 무슨 조홧속인지 모르겠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세진이 몸을 수그리고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커다란 손이 등을 끌어안는 것이 외투의 위로 느껴졌다. 품 안에서 움찔 움직인 문대가 세진을 노려봤다. 두어 번 움직였으나 이세진은 뭐가 유쾌한지 웃음소리를 못 참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야, 아직…….”

 “아직?”

 “아직 대답 안 했어.”

 “그치만 문대 표정이 오케이였는데? 세진이한테 두근두근한 거 같던데?”

 “말을 들으라고, 표정을 읽지 말고.”

 “말로도 거절 안 했잖아~ 근데 문대야, 너 맥 진짜 빨리 뛴다, 으하하! 목에 심장 있는 것 같, 악! 잠깐만, 문대야! 아퍼! 어! 너 지금 귀도 완전…, 아냐! 말 안 할게! 잘못했어!”

 

 입을 가만히 못 두고 나불댄 세진은 그제야 포옹을 풀고 몇 번이나 주먹질 당한 옆구리를 감싸 쥔 채 움츠러들었다. 나 너무 아프다, 문대문대야. 꾸깃꾸깃 눈썹을 찡그리며 울상을 짓고 제 옆구리를 문지르는 건 좀 안쓰러워 보였다. 꼴이 곰 같다가도 여우 같고 여우 같다가도 곰 같다. 혀를 한번 쯧, 하고 찬 문대가 차가운 공기에도 뜨끈해진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너는… 앞으로 폼 잡을 생각 하질 마.”

 “아, 그치~ 세진이는 귀여움 담당이잖아! 원래는 가만히 기다리려고 했는데~ 문대 고백 기다리다가 할아버지 될 것 같아서 말했지, 흑흑. 폼 잡기는 우리 문대가 전문이니까~ 우리 100일에는 꼬옥~ 폼 잔뜩 잡고 얼마나 세진이를 좋아하는지 말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

 “까불지도 마라.”

 “진짜? 이러면 문대문대가 제일 좋아하는데? 지금도 웃고 있는데? 세진이가 그렇게 귀여워?”

 

 제 얼굴 가까이서 잔망을 떨면서 오버스레 윙크까지 하는 세진의 말에 문대는 어이없어하며 제 손을 들어 입을 만졌다. 짜증 나게도 진짜 웃고 있었기에 일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진 쪽에서 귀여워 못 견디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도 하지 마라.”

 “하지 말라는 것도 많아~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대답은?”

 “… 사귀자.”

 

 대답 대신 세진이 눈을 접어 미소 지었다. 눈이 와서 낮아진 체온으로, 또 맹렬한 마음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두 사람은 내리 웃었다. 뜬금없고 멋없는 고백에 잔소리를 동반한 서투른 대답, 그래도 두 사람은 좋았다.

 눈은 언젠가 첫사랑이 시작되던 날의 사진처럼 나풀나풀 내리고 이제 막 연인의 이름을 달게 된 고등학생들은 가로등 불빛 아래 오랫동안 서로를 껴안았다. 100일 같은 거 세본 적도 없고 셀 생각도 없던 박문대가 진짜 100일을 세어서 이세진이 바라던 대로 이세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적은 편지를 줬을 때, 그것을 읽은 세진이 행복에 젖어 우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 * *

 

 

 세진의 집에 가는 동안 밤거리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은 모두 거품이 터지는 것처럼 가라앉아 사라졌다. 막차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해도 그렇지, 지하철 안은 오늘따라 놀랍도록 고요했고 문대는 문득 이 상황이 우스워졌다. 밤 11시 반에, 남자 둘이 한산한 지하철 안에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면만 보고 있다.

 

 “이세진.”

 “왜?”

 “너, 집에 술 있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은 세진은 문대에게 고개를 돌리고 오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아니, 하고 가볍게 부정했다. 술이야 밖에 나가면 마셔야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굳이 사 마시지 않는다. 기분 좋아서 가끔 한 잔 마실 때야 사서 들어가면 그만이다. 세진은 집 안의 냉장고 풍경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근데 집 앞에 편의점 있어. 거기서 사 가자~”

 “그래.”

 “… 문대야.”

 “아니, 아무 말 하지 마라. 뭘 얘기하든 나는 술 다 깬 맨정신에 못 하겠으니까.”

 

 박문대는 정말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20분이면 간다는 거리가 사실은 30분이었지만 굳이 이세진의 그 필사적인 거짓말을 지적하지도 않았고, 역의 출구로 나갈 때 이세진이 제 셔츠를 벗어서 안에 입은 하얀 반팔 티 차림새로 저와 문대의 머리 위로 뒤집어썼을 때도 어이없다는 표정이기는 했으나 벗어나지 않았고, 네 캔 만 원짜리 맥주 여러 개에 장우산, 안주로 먹을 짭짤한 과자 이거저거 섞어 거의 7만 원어치 사는 동안에도 이세진이 계산하겠다는 말에 뒤에서 팔짱만 끼고 서 있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이세진의 아파트 안에 들어와서였다.

 

 “집 좋네.”

 

 문대는 신발을 벗으며 널찍한 현관을 둘러보고는 세진을 보았다. 칭찬하는 것치고는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지 않는 얼굴에 픽 웃은 세진이 어깨를 으쓱이곤 복도 끝을 가리켰다.

 

 “화장실은 여기랑 저기 복도 끝에 있는 내 침실에 하나씩 있는데~ 침실 쪽은 내가 쓸게. 샤워할 거지?”

 “어.”

 “수건은 수납장 안에 있고~ 문 앞에 옷이랑 속옷 벗어두면 내가 세탁기에 넣을게.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도 문 앞에 놔두고. 먼저 씻으러 들어가.”

 

 문대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진이 옷을 챙기러 가는 발소리가 작게 들렸다가 멀어졌다. 웬만하면 샤워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았겠으나 나중에 우산을 사서 썼다고는 해도 많이 젖었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세진이 문 앞에 놔둔 헐렁한 속옷과 라운드 티,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온 박문대는 긴바지 츄리닝 차림으로 오픈형 키친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진을 보았다. 대충 그럴듯하게 차릴 생각인가 보다. 따로 안주를 만들 거면 과자를 왜 샀나 싶었지만, 굳이 질문할 만큼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므로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까만 소파는 이세진 혼자 쓰는 소파치고는 상당히 크다는 생각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 역시 질문하고 싶지 않았으나 심야의 손님이라 묻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고개를 들고 세진에게 물었다.

 

 “야, 너 혼자 사는 거 맞냐.”

 “응? 맞는데, 왜?”

 “소파가 너무 무식하게 큰데.”

 “아~ 그거 소파베드라서 그래. 내가 키가 크니까 점원이 알아서 큰 거 추천해주더라고. 거기 옆에 버튼 누르면 발판도 들려.”

 

 다른 가족이 없다는 것 하나는 안심해도 좋겠다. 알고 오긴 했으나 혹시라도 있었으면 격 없는 손님이 될뻔했다. 그러다가 또 이걸 왜 따지고 있나 싶다. 이세진 말마따나 아는 사이인데 비 오면 좀 들를 수도 있지, 두세 번 올 것도 아닌데. 가족이라 하니 세진과 사귀던 시절 세진의 집에 가서 여러 번 뵌 세진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저를 아들이라고 부르며 예뻐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무슨 생각해?”

 

 방울토마토와 참치를 올린 카나페 접시를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은 세진이 맥주 한 캔을 문대의 앞에 놓았다. 다른 맥주 캔들은 미지근하지 않게 하려고 냉장고 안에 넣은 모양이다. 문대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내려와 등받이처럼 기대앉은 채 제 앞에 놓인 캔을 따고 조금 주저하다가 크게 한 모금 마셨다.

 

 “… 어머님 잘 계시나 싶어서.”

 “우리 여사님? 잘 지내시지~ 맞아, 대학 다닐 때 요즘 문대 뭐하냐고 친구가 돼서 연락도 안 하냐고 나 한참 구박하셨는데.”

 “어머님 다우시네.”

 “말은 그랬어도 우리 무슨 일 있었다는 거 다 아셨을걸?”

 “…….”

 “머리 다 말랐으면 수건 줘, 빨래 바구니에 넣어놓고 올게.”

 

 수건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세진의 뒷모습을 보며 남몰래 신도 아니고 여사님께 속으로 빌었다. 여사님, 죄송합니다. 오늘 귀하의 아드님과 끝장 봅니다. 빌어놓고는 말할 용기가 없어서 한 모금 마시고, 할 말 못하고 다른 말이나 하는 제 모습이 낯설어서 한 모금 마시고, 이런 고민을 지속하는 지금이 씁쓸해서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는… 마셨다. 계속. 접시는 진즉 비웠고 테이블 위와 옆으로 맥주 캔이 수북이 쌓여갔다. 제정신 아닐 때 말하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더럽게 취하지를 않는다. 다만 미친 듯이 졸렸다. 새벽 세 시에 이러고 있으면 당연히 졸리지. 세진 역시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잠에 취했다. 옆으로 눌린 볼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의 여름방학 직전이 생각난다.

 

 “문대야…….”

 

 테이블에 엎드린 주정뱅이에게서 숨을 토하듯 작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문대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때처럼 저 역시 세진의 옆에 엎어졌다. 수마에 함락당한 눈 두 쌍이 마주쳤다.

 

 “왜.”

 “나 그때, 결혼식장에서 너 만났을 때… 신기하더라. 네가 교복 차림이 아니니까.”

 

 꼭 저의 마음 같아서 대답이 길을 잃는다. 잠이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마음이 간지러웠다. 제가 느꼈던 것을 세진 역시 느꼈다는 게 이상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한 닮은 두 사람이라 당연한 건데도.

 

 “어렸을 때 나 계속 생각했거든? 너랑 사귀다가 결혼… 아니 결혼까지는 못해도 반지 하나 나눠 끼고 평생 같이 살고 싶다고.”

 

 세진이 졸음에 절여진 채로도 피식 웃는다. 제 손가락에 힘을 줘 확인하듯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가 약지의 빈자리를 보고 다시 힘을 뺀다. 박문대 손가락도 아니고 자기 손가락을 확인하는 이세진의 모습이 괜히 아팠다. 꼭 그 약지에는 박문대와의 반지 외에는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그런데 그때는 너무… 이상했어. 분명 상상해봤는데… 흐흐, 우리 좋았을 때가 교복 입었을 때가 마지막이라 그런가?”

 

 뭐가 웃긴지 실없이 웃는 소리를 멈추지 못하는 세진에게 뭐라고 하지도 못한 문대는 그냥 가만히 그 웃음을 들었다. 네 꿈의 주체가 나고 그 꿈을 부순 것도 나다. 그 한 가지가 주는 어색함과 거북함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이거 되게, 미안한 말인데…….”

 “…….”

 “문대 너는 나한테 아는 사람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너 보면 예전 같은 느낌 들어. 그냥, 그때 그 느낌으로 널 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 졸음 때문일까. 아니, 사실은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아서겠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 너를 만나고 나서 5월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으니까. 그리고 너도 그걸 느꼈으면 좋겠으니까.

 비록 그 뒤에 다시 떠나가는 게 잔인하다고 해도.

 상념과 졸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오늘은 얘기가 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저는 대충 자더라도 집주인은 침실로 들여보내야 하지 않나. 눈을 깜빡이고 세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세진.”

 “…….”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서 자.”

 

 축 처진 몸을 테이블에서 떼어내려고 배가 있는 곳으로 팔을 찔러넣어 몸을 들어 올렸다. 세진은 그것을 느끼고 잠에 완전히 빠져들기 전 잠깐 눈을 떴으나, 이내 문대의 몸 위로 고꾸라졌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쓰러지며 옆에 있던 맥주 캔이 자기들끼리 부딪혀 와장창 소리를 내고 덩달아 쓰러졌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나마 잠이 좀 달아난 문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야, 일어나봐…….”

 

 고개를 옆으로 돌린 문대는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붙어있는 세진의 얼굴과 흐리멍덩하게 저를 보고 있는 눈에 흠칫 놀라고는 몸을 빼려고 뒤척였다. 허나 세진이 팔을 들어 올려 문대의 어깨를 잡았다. 누워있는 어깨에서 목덜미로 손이 천천히 올라간다. 쓰다듬듯 매만지는 손이 조심스럽다. 머리맡에 쓰러진 맥주 캔 입구에서 덜 마신 사과 향 맥주가 방울방울 나와 사과 향이 진동했다. 그동안 세진의 손은 귀를 지나 볼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볍게 쓰는 세진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대야… 우리… 오늘만 그때처럼 사랑하면 안 될까? 내일부터는 아는 사람으로 돌아가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자신 없는데… 지금 너한테 키스할 수 있으면 노력해볼게. 너도 알잖아, 나 마음먹으면 노력하는 거.”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출 자신이 없어 눈을 꼭 감고 코앞에 있는 세진의 입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사실 그러라고, 노력해보라고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끝이 나지 않는다. ‘그’ 박문대가 웃기게도 제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도망치는 거다. 웃기지만 웃을 여유도 없다.

 세진이 입술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무게감이 덜어지나 싶더니 성큼 위로 기어올라 팔 안에 그를 가두고 다시 몸을 겹쳤다. 문대는 손을 뻗어 세진의 머리카락 속으로 제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입술이 맞물린 형태를 따라 서로의 살을 오물대고 빨았다. 미지근한 혀가 입안을 구석구석 쓸고 이를 건드렸다. 중간중간 숨을 뱉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아 목덜미가 간지럽고 열이 올랐다.

 티셔츠 아래로 세진의 손이 침범했다.

 

 “… 아!”

 

 

* * *

 

 

 사랑의 존재로 삶에 행복만이 충만한 날들이었다. 마음이 교차하는 곳에 서로가 있었다.

 이전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나면 또 다른 특별함이 느껴지는 법이다. 3학년이 된 두 사람은 다시 같은 반으로 묶였다. 청솔고 커플 올해는 같은 반이가? 공부 우예할라꼬. 1학기 첫날 수학 시간에 들은 우스갯소리에도 웃음이 미식미식 나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사귀는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 별생각 없이 박장대소하는 애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짜 커플이 된 걸 누가 눈치라도 챌까 봐 서로 눈빛만 교환했다. 어이없게 처음부터 유별난 티를 내고 다녔더니 이세진이 대놓고 손을 잡아도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뽀뽀는 참았다.

 학교 안팎에서 같이 노는 시간이 ‘데이트’로 명명된 것이 익숙해졌을 여름방학 무렵에는 처음으로 세진과 잤다. 세진의 가족들이 집을 비운 날 세진의 방에서. 문대는 욱신대는 허리를 이끌고 씻은 후─그걸 다 넣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오래 걸렸기 때문에, 같이 씻자고 달라붙는 것도 지쳐서 떼어내지 못했다─세진과 나란히 누운 채 혼자서 왜 ‘잤다’는 말이 사용되는지 생각했다. ‘자다’는 통상적으로 눈이 감기고 몸이 활동을 쉬는 행위가 아닌가?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좋기는 했으나 살색으로 뒤덮인 회상은 절대 쉬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아무래도 세상 연인들이 속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니 무조건 쉬는 행위라고 표현하는 게 아닐까. 박문대로서는 심장이나 몸이나 운동장 30바퀴를 도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물론 하자면 또 하겠지만. 피곤하니 별생각을 다 하다가 까무룩 잠에 빠진 날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공부와 일도, 사랑도 바빴다. 세진의 회사에서는 새 그룹을 만든다는 소문이 연습생들 사이에 돌았고, 문대는 문대대로 미친 정시러처럼 바쿠스F를 물처럼 마시며 공부했다. 그러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사랑에 허우적댔다. 세진의 집에 아무도 없는 주말이면 함께 방에서 넷플러스를 보다가 입을 맞추고 뒹구는 게 습관 같았다. 분명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흐르는데도 두 사람 다 이 분주함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게 좋았다.

 11월에 접어들 즈음, 이세진의 회사에서는 새로운 보이그룹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다음 월말 평가를 잘 보라는 팀장의 귀띔에 월말 평가가 제일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과 사실상 데뷔 조에 드는 것이 거의 확실해진 상태임을 세진도 알았다. 가끔 회사 앞에는 연습생을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는지라, 세진은 오가며 본 익숙한 누나들에게 벌써 축하받았다. 이제는 정말 학교생활보다 연습에 집중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그래서 새벽에 전화해서 이 아침부터 등교를 시켰다?”

 “그치만~ 우리 문대문대 많이 안 보고 가면 힘이 안 나니까!”

 “전화도 있고 인터넷도 되는데… 너 혼자 파발 띄우는 시대 사냐?”

 “와~ 이렇게 낭만이 없어요, 이렇게! 사랑하는 문대문대를 매일매일 봐도 또 보고 싶은 건 나뿐? 흑흑.”

 

 입으로 흑흑 소리를 내며 눈물 닦는 시늉을 하는 세진을 보고 문대가 혀를 찼다. 가증스러운 새끼. 오늘부터 시작해서 당분간은 매일같이 조퇴한다고 학교에 일찍 나와달란다. 한창 바빠질 연습생의 정강이를 차고 싶은 걸 참으며 박문대는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못 알아듣냐. 끝나면 전화하라는 소리잖아.”

 

 앞자리에 앉아 문대를 향해 방향을 돌린 세진은 이때다 싶어 문대가 몸을 뺀 만큼 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히죽 웃으며 팔을 책상 위로 올려 턱을 괴었다.

 

 “진짜? 영상통화 해두 돼?”

 “영상… 하, 그래. 영상통화 해라.”

 

 새벽부터 전화를 받고 금요일에 오는 것보다도 일찍 등교한 문대는 은은한 피곤함에 지친 한편 내심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세진이 대중 앞에 서게 된다. 세진은 끼도 출중하니 회사가 어지간히 일을 못 하는 게 아닌 이상 그룹이 어떤 컨셉이든 잘 소화할 거고, 노래와 춤을 잘하리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예능과 인맥 관리도 능할 테니 차후에 아이돌로서의 수명이 다하면 솔로 가수뿐만 아니라 배우나 예능인으로 살아도 좋을 것이다.

 … 그때가 와도 세진은 자신의 옆에 있을까?

 이전에도 세진의 데뷔 이후를 상상하면 늘 마지막으로 생각이 정착하는 지점이었다. 문대는 솔직하게 확신할 수 없었다. 세진이나 자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사랑은 너무 유약한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하겠습니다, 맹세하던 사람 중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혼할까? 결혼까지 갈 것도 없다. 얼마나 많은 연인이 헤어질까?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나서도 이세진과 박문대는 서로밖에 없는 사람들일까?

 

 “세진이를 앞에 두고 딴생각?”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어느새 코앞으로 세진이 가까워져 있었다. 턱을 괴던 팔을 빼고 문대의 귀로 뻗어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잘게 떨었다. 이 징조는… 키스다. 문대는 제 귀를 만지는 세진의 손목을 턱 잡고 시선을 올렸다.

 

 “잠깐.”

 “응?”

 “앞자리에 서서 내리누르지 말고 옆자리에 앉아서 평범하게 해라.”

 “푸흑!”

 

 무슨 말을 하나 들어봤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한다는 말이 분위기를 다 깨서 웃기다. 으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는 세진을 보고 문대가 눈총을 줬다.

 

 “웃지 마라. 너 존나 무거우니까.”

 “아~ 알았어, 알았어! 옆자리로 갈게!”

 

 환하게 웃는 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정리하고, 문대의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몸을 서로에게 틀고 의자를 가까이 붙였다. 무릎끼리 서로 닿고, 숨이 느껴졌다. 이제 됐지, 묻는 것처럼 한 번 고개를 옆으로 까딱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귓바퀴와 뒤로 이어지는 목덜미를 만지며 입술을 붙였다. 양손으로 얼굴과 뒷목을 감싸는 세진의 손목을 문대가 붙잡아 꾹 쥐었다. 천천히 야금야금 서로의 입술을 빨고 여린 살을 느끼며 입 안을 핥았다. 잇새의 틈이나 입천장 안쪽의 미끈한 곳을 혀로 따라갔다. 첫 키스를 할 때는 이가 부딪혀서 무척 아팠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키스를 나누고 나면 어쩐지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세진은 입술을 완전히 떼기도 전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지 못했고, 왜 웃냐고 묻는 박문대 역시도 픽 웃어서 두 사람은 이유 모를 웃음을 공유한 채로 입맞춤을 멈췄다.

 2학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이라 한 달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짧을 줄 알았으나 전혀 짧지 않았다. 하루에 서로를 두어 시간 겨우 보는 게 너무 아쉬웠고, 늘 옆에 있다가 없으니 허전했다. 세진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하는 영상통화가 그나마 즐거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각자 시간이 얼른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든, 당연하게도 시간은 매분 매초 일정하게 흘러갔다.

 월말 평가 당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세진은 전날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파트를 익힌 후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일찍 잠이 들 수 있었다. 이전에 미리 세진과 문대 둘 다 전날과 당일에는 신경 쓰일까 봐 연락하지 말자고 입을 맞췄으나, 세진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문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른 후였다. 아직 안 일어났는지, 전화는 소리샘으로 넘어갔다. 회사에 도착하면 다시 걸기로 했다.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에 한 번, 도착해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두 번 걸 때까지도 박문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공부 중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박문대는 늘 핸드폰을 옆에 두고도 잘만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전화가 온다면 못 볼 리 없다. 박문대 성격에 핸드폰을 고장 낼 사람도 아니고. 연락하지 말자고 해서 그거 지키는 건가? 괜히 그런 약속을 했다고 생각하며 착잡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세진, 전화 그만하고 빨리 와, 다음 차례야! 같이 월말 평가를 보는 놈들이 복도 저 끝에서 소리쳤다.

 

 “지금 갈게!”

 

 대답을 하고 걸고 있던 연락을 끊으려는 찰나, 박문대가 전화를 받았다. 세진은 다급하게 전화에 대고 말했다.

 

 “어, 여보세요? 문대문대야?”

 “여보세요? 계속 전화가 와서 받았습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기대한 것과는 달랐지만 조금 안심했다. 문대, 핸드폰 잃어버려서 연락이 안 됐구나. 웬일인가 싶었으나 월말 평가가 끝나면 주워준 사람에게 사례하고 받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평범하게 응답했다.

 

 “아~ 네, 핸드폰 주인 친구인데요.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경찰인데요, 핸드폰 주인이 교통사고가… 청솔병원… 출혈이 많아서 수술 중…….”

 

 숨이 턱 멈췄다. 말을 들어보려고 애썼는데, 이명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잡았는데 말도 없이 뿌리치고 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데스크에 다급하게 물었다. 박문대, 박문대 환자 찾아왔는데요. 입 밖으로 내기 전까지는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흐렸는데, 말하고 나니 공포로 인해 선명해졌다. 박문대의 수술실 앞 의자에 앉은 세진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손을 덜덜 떨었다.

 택시를 타고 있었다고 했다. MS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했다고. 거긴 왜 가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친구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응원하러 간다고 말했단다.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돌 때 반대편에서 음주 운전자가 운전하는 차량이 달려왔고, 그리고 박문대가…….

 전화를 받았던 경찰은 세진에게 어깨를 두드리며 다행스럽게도 대낮의 사거리라 목격자가 많았고 택시 기사는 타박상에 그쳐 진술이 가능했기에 가해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으며 피해자도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니 수술은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만하다고 했다. 뭐가 다행이고 뭐가 긍정적인가. 박문대는 지금 차에 치였는데. 다시 곱씹어도 화가 나, 이를 으득 갈았다. 그 와중에도 박문대는 연락할 보호자가 없어 그나마 하나 연락처가 저장된 큰이모에게 연락했다. 큰이모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놀라 당장 병원으로 오겠다고 했지만, 서울에 거주하지 않으셔서 몇 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가시처럼 돋는다. 연락하지 말자고 안 했으면 괜찮았을까 가정해보다가도 터무니없는 것에 매달려봤자 지금의 박문대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이 좋았는데, 지금은 뭘 해도 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울 수라도 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너무 무서워서 눈물 한 방울이 안 났다. 가슴이 답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 됐는지 모르겠다 싶을 무렵, 수술실에서 의료진 두 명이 걸어 나왔다. 앞에 선 사람이 의자에 앉은 세진을 보고 말을 걸었다.

 

 “박문대 환자 보호자분?”

 “네, 네.”

 “학생인가요?”

 “네, 친구예요. 문대 보호자…, 이모는 늦으신다고 하셔서……. 경찰 아저씨가 있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한 글자씩 뱉을 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린 듯 아팠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제 입으로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의료진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가슴팍에 유리창 파편이 파고들어 수술을 진행했고 파편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상태이며 깊이가 깊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의식도 금방 돌아올 거라고. 세진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연신 말했다. 막혔던 숨이 이제야 쉬어지는 것 같았다.

 병실로 옮겨진 박문대는 환자복을 입은 채 꼭 자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세진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힘이 다 빠져서 어쩔 수 없었다.

 문대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새벽녘이었다. 고개를 돌린 박문대는 옆에 있던 세진과 이모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문대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세진이 이모보다도 먼저 벌떡 일어나 문대의 가까이 몸을 수그렸다.

 

 “정신 들어? 박문대, 나 잘 보여? 잠깐만, 선생님 호출하고.”

 “이세진.”

 

 세진이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누르고 문대의 부름에 그를 쳐다봤다.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한 문대는 잠시 머뭇대다가, 월말 평가는, 하고 조용히 물었다. 세진은 잠깐 말을 잃었다가, 그건 지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뒤이어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커다란 기계들이 몸에서 제거되는 동안, 박문대는 그 답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눈치채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밀히 말하면 세진은 후회하지 않았다. 전혀, 라고 하면 거짓이 맞지만, 만약 전화를 받았을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박문대를 사랑하니까, 박문대가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 그것은 너무도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마음이었고 그 마음의 목적지인 박문대 본인도 바꾸지 못할 이세진의 오롯한 순애였다. 세진은 이런 제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세진의 그런 사랑을 박문대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때문에 이세진의 앞으로가 불투명해졌다는 것.

 세진이 이모님과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동안, 문대는 세진이 놓고 간 핸드폰을 확인했다. ‘김 실장님’으로 저장된 번호에서 부재중이 10통, ‘지형이’로 저장된 번호에서 부재중이 13통, ‘승원 형’으로 저장된 번호에서 온 메시지 앞줄,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가 전원 화면에 떠 있었다. 핸드폰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고 세진도 원래 숨기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굳이 비밀번호를 풀어가며 이것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박문대, 이모님은 잠깐 통화 좀 하고 오신다고…….”

 

 세진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하다가 자신의 핸드폰을 보고 있는 문대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세진을 향한 눈초리가 너는 이걸 확인했냐고 나무라서, 세진은 말없이 머리를 주억였다. 주먹을 꾹 쥐었다가 푼 문대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세진이 천천히 다가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여전히 주먹을 쥔 박문대의 왼손을 제게로 가져와 살살 펴고 제 손에 맞잡았다. 웃기게도 세진은 지금 이 순간, 바늘을 찔러넣은 문대의 손등이 아파 보이는 게 제일 신경 쓰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문대야. 이번 월말 평가만 월말 평가인 것도 아니고, 다음에도 기회는 있겠지. 네가 말했잖아, 나 잘한다고. 난 그거 믿어.”

 

 말은 문대를 위한 것 같기도 하고, 세진 자신을 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는 아직 현실감이 없었다. 몇 년을 기다린 일이 이렇게 쉽게 어그러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한편으로는 사실 이세진도 알았다. 이세진은 이제 곧 스무 살이 될 거고, 나이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는 순간 지금 서 있는 곳의 발판은 더 좁아진다는 것도, 지금 만들어지는 그룹이 데뷔하고 나면 다음 그룹은 언제 만들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도.

 갑작스럽게 와주신 이모는 사고를 당한 조카를 혼자 둘만큼 매정한 성정의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세진은 매일 병원에 오가며 이모님을 뵙게 됐다. 출석이라도 하는 것처럼 병원에 오는 세진은 첫날 이후로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지 않았기에 문대는 속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대놓고 물어봤으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지, 다른 말은 들을 수조차 없었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고 마침내 일주일 후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박문대는 이제 이세진을 놓아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퇴원 허락을 제 상처 아문 것처럼 좋아하는 세진이 어쩐지 이세진도 박문대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세진의 삶에서 첫 번째는 이세진이어야만 했고, 그걸 박문대도 알았다. 그의 꿈을 짓밟은 게 그의 첫 번째인 자신이었으므로 박문대는 그에게서 돌아서야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오래 걸렸기 때문에, 겨우 말을 꺼낸 날은 졸업식이었다. 박문대는 졸업식이 시작된 강당 건물 뒤편에서 이세진과 입맞춤을 나눈 후 헤어지자고 했다. 그때 이세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결국 혼자 자리를 벗어났고, 문대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졸업식이 끝나고 해가 져 한기에 몸이 떨릴 때까지 잘한 일이라고 되뇌어야 했다. 그의 인생에 그늘을 만든 게 자신이었다는 걸 알았으므로 양보할 수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 후 제일 황당한 것은 어디서도 이세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박문대는 별로 인사할 사람도 없는 청솔고 동창회도 나갔고 시즌2 이후 욕 더럽게 처먹고 돌아온 재상장 아주사까지 봤다. 혹시라도 있을까 봐, 잘 지내는지 멀리서라도 볼 수 있을까 봐. 동창회에서는 도리어 요즘 이세진 뭐하냐는 질문을 잔뜩 들었고, 재상장 아주사에 나온다던 이세진은 다른 사람이었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부하고, 공부하지 않을 때는 재상장 아주사에서 데뷔한 스티어를 대학 다니면서 내내 찍었다. 무슨 기업행사, 지역행사, 스티어를 쫓아다니며 별 무대를 다 다녔는데 어느 그룹에도 박문대가 아는 이세진은 보이지 않았다. 이세진을 찍고 싶었던 카메라에는 다른 아이돌만이 가득했다.

 

 

* * *

 

 

 약간의 술기운과 지대한 졸음으로 만든 일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어제의 흔적들을 치운 후 각자 샤워했고 정적 속에서 이세진이 끓인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혼자 몇 년을 살아서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맛있네, 그래? 그게 아침상에서 한 대화의 전부였다. 숙취 때문인지 두통과 울렁거림이 심해서 세진의 집에 있던 두통약 한 알을 먹었다.

 어젯밤에 세탁기에 돌린 옷은 그대로 세탁기 안에 둔 채 잠들어서, 결국 오늘 빨래를 다시 돌렸다. 박문대가 입었던 이세진의 티셔츠와 바지, 속옷도 함께. 세탁기 앞에 앉아 드럼통이 돌아가는 걸 말없이 보다가 세진의 권유로 대낮부터 남은 맥주 한 캔을 쥐고 넷플러스를 틀어 티넷에서 얼마 전부터 시작한 아이돌 오디션을 1화를 봤다. 세월이 10년이 지났는데 이놈의 아이돌 오디션 유행은 왜 다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쟤네 너희 회사지? 어때? 쟨 카메라보다 실물이 나아.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이 TV만 보고 있는 두 사람의 가운데서 나왔고 별다른 얘기는 더 하지 않았다. 점심은 거른 채 넷플러스를 끄고 음악방송을 틀었고, 눈이 마주쳤을 때 TV를 끈 채 키스할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 키스는 하지 않았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행위는 그저 유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이 집을 떠나면 정말 끝이 온다는 걸.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해가 점점 길어져 저녁인데도 환했다. 건조기까지 돌린 박문대의 옷은 다 말랐고, 이세진의 티셔츠에도 어제의 흔적은 없었다. 박문대는 입고 왔던 폴라티를 다시 입고 가겠다고 했고, 이세진도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빗방울 자국도 없고 몸에 남긴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검은 폴라티 차림으로, 박문대는 왔을 때처럼 가기로 했다. 현관에 서자 센서등이 탁 켜졌다. 조명이 구린 저예산 로맨스 영화의 마지막처럼.

 

 “… 잘 있어.”

 

 문고리를 잡은 문대가 돌아섰다. 하지만 등 뒤로 세진이 다가섰다. 문고리를 잡은 문대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 다른 팔을 뻗어 벽에 짚었다. 다시 몸을 돌려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보다 먼저 세진의 절박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가기 전에 딱 하나만. 하나만 알려줘.”

 “… 뭔데?”

 “나하고 왜 헤어지려고 한 거야?”

 

 모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몰랐나? 제게 닿은 물음에 긴 시간 꺼내지 않았던 빛바랜 기억을 꺼낸다. 그때 했던 생각들, 결국 서로를 떠나는 것만이 세진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었던 때로 돌아간다. 복잡하게 덧붙이자면 사랑밖에 되지 못하는 이유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때도 지금도 진심으로 매몰차지는 방법을 모르겠다.

 사랑이 한때라면 얼마나 좋을까. 두 번째 이별인데도 이세진이 없으면 살 수 없을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네 최우선이 나인 게 싫어서.”

 

 고르고 고른 단어로 쥐어짜듯 단호한 이유를 꾸며 말한다. 몸을 돌려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일렁이는 눈에 고인 눈물이 센서등의 빛을 받고 반짝인다. 그제야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세진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알고 있지만 확인받은 거였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이 없었다.

 

 “너…….”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박문대.”

 “알아, 아니까…… 아니까 떠난 거야.”

 “너 없으면 내가 어떨지도 생각했어? 너는? 너는 나 없어도 괜찮았어? 그동안 어땠는지…….”

 “…….”

 

 세진의 말끝이 울컥 눈물로 흐려졌다. 문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통약을 먹고도 남아있던 통증이 짙어졌다. 너 없어도 괜찮았냐고? 안 괜찮았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추위 속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방향을 잃었는데 계속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떠나는 게 옳았다.

 

 “… 내가 네 꿈 다 망쳤으니까.”

 “뭐?”

 “아이돌 하겠다면서 밤낮 안 가리고 연습하던 이세진, 데뷔하면 내 사진 찍어달라고 웃던 이세진, 내가 다 망쳤으니까. 월말 평가 그거 한 번? 그럼 다음 월말 평가 때 나한테 또 무슨 일 생겼으면? 그러다가 데뷔는 언제 하고 네 꿈 네 노력은 언제 사람들이 알아주는데.”

 

 박문대는 이세진이 좋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좋은 것만 보자고 웃던 얼굴, 애교 많고 다정한 말투, 커다랗고 힘줄이 불거진 손, 저보다 한 뼘 더 크던 키, 글씨를 쓸 때 리을을 특이하게 쓰던 버릇, 단 것보다 짭짤한 걸 좋아하던 입맛,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면 중간중간 교실을 올려다보며 창가에 있던 제게 손을 흔들던 것, 키스하고 나면 꼭 눈가나 볼에 뽀뽀를 한 번 더 하고 떨어지던 것, 니베아 립밤을 늘 가방 앞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것, 작은 것 하나까지도 이세진은 사랑스러웠다. 누군가의 삶에 첫 번째가 되는 감각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었고, 다들 그걸 알게 될 날이 올 거라고 기대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으로 발목이 붙잡힌다면, 그 사랑을 받는 이가 해야 하는 건 그 사랑을 부수는 게 아닐까.

 

 “문대야, 나는…….”

 “내 마음 같은 거 됐고, 그냥 네가 보상받고, 사랑받고…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나는.”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일렁였다.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머릿속에서 단어가 뒤죽박죽되어 정리가 안 됐다. 시야가 확 뒤집혔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박문대를 이세진이 붙잡았다.

 

 “문대야, 박문대!”

 

 이름을 부르는 세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자는 것도 깨는 것도 고역인 날들의 연속이었다.

 춥고 허전해서 잠들 수 없다. 잠들면 꿈에 박문대의 얼굴이 나왔다. 다만 새로운 것은 이제 만들 수 없다는 듯, 지나간 일들만 필름 영화처럼 지나갔다.

 생일을 축하받아도 계절이 지나고 세월이 흘렀다는 감흥이 없었다. 늘 교복을 마지막으로 입었던 날 그 겨울에 마음이 머물러있으니까.

 이세진은 박문대가 어떤 것을 고민하는지 대충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교통사고 이후로 세진은 박문대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은 느낌 속에 살았다. 평범하게 웃고 얘기하다가도 혼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손을 잡으면 한번 흠칫 놀랐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그런 작은 것들이 축적되어 결론이 났다. ‘박문대는 이세진과 헤어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마침내 그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세진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문대에게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터임을, 그래서 결심을 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느꼈다. 박문대는 잘게 어깨를 떨고 있었고 오랫동안 고민해서 피곤해 보였다. 문대가 그만큼 오래 고민했다면 수긍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세진은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문대에게 말은 안 했지만, 졸업식 일주일 전 회사는 그만뒀다. 세진 없이 데뷔 조가 확정된 지금, 계속 있어도 그곳에서는 데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원래 MS에 있다가 타 엔터로 이직한 팀장님이나 괜찮은 그룹 하나 가지고 있는 고만고만한 중소형 엔터 한두 군데에서 연락이 왔지만, 박문대와 헤어진 이후로는 고민해보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박문대와 만나기 전에도 숨을 쉬고 꿈을 꾸었는데 박문대가 없어지니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세진은 일단 공부부터 다시 시작했다. 돌연 연습생을 그만둔 아들을 걱정하고 있던 여사님께 말씀드려 어렵지 않게 재수학원에 등록했고, 하루 12시간씩 공부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본래 하던 게 있어 공부는 하는 대로 제 걸로 만들 수 있었다. 꽤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수능을 치기 전까지 진로도 고민하고 마음도 다잡으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고 12시간을 공부하면서도 중간중간 박문대는 생각났다.

 마음을 정했던 날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을 때였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예고와 함께 주제가인 ‘바로 나’ 영상이 뜨던 날. 이전에 작가로부터 인하트 디엠으로 연락받았으나 출연 제의를 거절했던 세진은 점심을 먹다가 그것이 생각나 순전히 궁금한 마음에 ‘바로 나’를 틀었다.

 영상 속의 참가자들은 얼핏 필사적으로 보였다. 진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카메라에 미소를 짓고 윙크해가며 자신을 빛나는 별로 만들어달라는 노래를 하며 군무를 추는 영상 속 연습생들은 잊고 있던 느낌을 줬다. 열망 같은 것들.

 또 평소에도 그랬지만, 박문대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다. 박문대는 그런 필사적임을 좋아했다. 열정으로 살아 숨 쉬는 아이돌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문대는 이 애들도 찍고 싶어 할까?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이세진은 무대와 아이돌의 가까이에서 걷는 앞날을 선택했다. 박문대가 찍고 싶을 만한 아이돌을 제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 공부가 정말 재밌었고, 취직한 후에는 주변에서 인정받으며 자신이 잘 해내고 있음에 만족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박문대를 다시 만난 날, 비로소 5월의 짙은 향기를 다시 느끼게 된 것이다.

 

 

* * *

 

 

 “좀 누워계시다가 가면 되세요.”

 “약이나 다른 치료는 필요 없나요?”

 “네. 환자분은 그냥 잘 쉬는 걸로 충분하실 거예요. 혹시나 추가적인 증상 있으시면 재방문해주시면 되고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간호사가 멀어진 후에야 세진은 문대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갑자기 쓰러져 큰 병인 줄 알고 놀랐는데 이석증이란다. 스트레스나 과로 같은 원인으로 어지럼증이 생기는 거라고. 무리하지 않으면 별다른 치료 없이도 낫는 가벼운 수준이라는데, 박문대가 일을 워낙 좋아해야지. 세진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옛날에도 그랬지만… 너무 안 쉬어.”

 “…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지금은 멀쩡해.”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문대야~ 그리고 실려 왔으면서 뭐가 멀쩡해! 회사 일 한다고 잠 안 자고 그랬지, 너.”

 

 그렇지, 이러지 않으면 박문대가 아니지. 세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문대는 미소를 띤 채 말하면서도 속상함을 눌러 참는 듯 구겨지는 세진의 미간을 가만히 보다가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민했던 것들을 10년이나 지난 후 말하고 나니 어쩐지 얼굴을 보기 쪽팔렸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문대의 머릿속에는 교통사고 나던 날 새벽, 병실 안에서 손을 붙잡고 문대를 위로하던 세진이 떠올랐다. 세진 역시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박문대, 나 봐봐.”

 

 세진이 나지막이 문대를 불렀다. 그는 눈을 돌려 세진을 보았다. 어느새 구겼던 미간을 펴고, 어쩐지 뭔가를 결심한 것 같은 태도에 박문대는 현관에서 했던 말에 관해 이야기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는 말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나 어떻게 보여?”

 “뭐?”

 

 문대가 다소 뜬금없는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세진은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살짝 웃었다. 문대를 데리고 구급차를 탔을 때부터 계속 생각했다. 10년 전에 들었으면 좋았을 이야기를, 10년 후인 지금 어떻게 답해줘야 할지를. 고민했던 그는 결국 천천히 담백하게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 이제는… 그때의 이세진 아니야. 서른 살이나 돼서 아이돌은 이제 못하고, 다시 할 마음도 없어. 지금 하는 일에 충분히 보람도 재미도 느껴.”

 “…….”

 “그때 나 스무 살이었잖아. 누구 때문에 그만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직접 선택한 거야.”

 “… 이세진.”

 “MS가 아니라도 기회는 있었어. 다른 회사에서도 연락 왔고, 그해 말에 <아이돌 주식회사>도 다시 시작했는데, 기억나? 거기 작가한테도 인하트 디엠 왔었다? 그런데 내가 안 한다고 했어.”

 

 모를 리가. 제가 아는 이세진이 나올까 봐 첫 방송 내내 긴장한 채로 시청했고, 첫 방송이 끝난 후에도 편집을 당했을 경우를 생각하고 참가자 목록에서 그를 찾았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거절했다니, 웃기는 일이다. 그런 속을 모르고 세진은 이를 드러내고 얼굴을 활짝 폈다.

 

 “못하게 돼서 아쉬운 마음 같은 거… 물론 있었지~ 근데 그 상태로 멈추고 싶진 않았어. 살다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은 또 생기더라고. 진로 바뀌고, 대학 가고, 취업하고, 내 인생에 그런 큰 굴곡이 있을 때마다 네가 생각났어.”

 “…….”

 “너도 그런 걸 겪었을 텐데, 그럴 때… 너한테 내가 아니더라도 기쁜 일이나 슬픈 일 생겼을 때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너 만났을 때 느껴지더라. 그거 다 내 거짓말이구나. 위선이고 방어기제구나. 사실 나는 너한테 계속 일부로 남고 싶었구나, 하고.”

 

 세진이 문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지난밤에도 느꼈던, 여전히 따뜻한 손이다.

 

 “문대야.”

 “…… 어.”

 “그동안은 네 생각을 몰랐으니까 그냥 아는 사람 되는 것도 노력해보겠다고 했지만… 내 생각엔 이제 우리한테 거리낄 거 없을 것 같거든. 그리고 다른 것보다 내 눈엔 아직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문대 생각은 어때?”

 

 조심스럽게 문대의 동의를 구하는 말은 차분했고, 말 안에 단단한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아서, 박문대는 누운 채로도 가만히 끄덕였다. 세진은 조금 울컥했는지 물기 있는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바라는 거, 네 입으로 말해. 다시 시작하자고,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거 한마디만 해줘. 내가 말하고 싶은데 기다리는 거야. 박문대 통제하는 거 좋아하잖아. 네 말대로 휘둘릴 테니까 말해.”

 

 문대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세진이 옆에 없던 시절, 다시 처음부터 쌓았던 자신의 세계를 또 말 하나로 무너트릴 준비를 했다. 버석한 진심이 입에서 나온다.

 

 “…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생각했었나? 이런 걸 바라고 있었나? 처음으로 말이라는 간결한 형태로 만든 진심이라, 꼭 제가 내는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이세진이 누워있는 박문대의 손을 꼭 잡았다. 호박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웃으며 접힌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볼 아래로 흘러내렸다. 누운 상태로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어 잡힌 손에 힘을 줘 꼭 맞잡았다.

 

 “그래, 또?”

 “아직도 좋아해.”

 “응, 그리고?”

 “… 앞으로 계속 내 옆에 있어.”

 “… 응. 그럴게, 문대야. 계속 있을게.”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걸 바라고 있었다. 줄곧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답을 들으니 비로소 마음에 확신이 갖춰졌다. 대의나 죄책감, 서로를 위한다는 말 같은 고결함 따위 거창한 건 필요 없었다. 그냥 서로가 없으면 안 됐다. 서로를 만났을 때부터 전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결국 우리는 멀리 돌아 다시 서로에게 간다. 서로의 부재로 영혼과 피와 살이 반분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날들을 인정하고 뒤로한다.

 

 함께 여름으로 향한다.

 Playlist

 ​♥     눈기린  /  도리  /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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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pigoUvU

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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