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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포함 12,940자

“좋아해”

 

 

힘이 잔뜩 들어가 되려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짧은 잠에 빠져있던 나조차 순간 정신을 차리게 할 정도로 간질거리는 음성이었다.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텅 빈 강의실, 애들은 다 어디로 가고 한 쌍의 남녀만 남아 저러고 있다.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 여학생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용감하게도.

 

 

“너도 내가 싫은 건 아니잖아”

 

“승아야”

 

“나도 알아. 너 나 안 좋아하는 거. 근데 생각은 해볼 수 있는 거 아냐?”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짓이냐.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한숨을 내쉬며 슬쩍 고개를 푹 숙였다.

자느라 강의실에서 나갈 타이밍을 놓쳤는데 눈 뜨자마자 뭐 이런 서프라이즈를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제가 잠에 깊게 빠져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여자애는 아까보다 단단해진 목소리로 고백을 뱉어내었다.

 

 

“일단 사귀어봐. 사귀고, 니가 싫으면 헤어지면 되잖아”

 

 

정적이 흐른다.

이세진은 곤란한 낯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고만 있다. 아마 저 애도 알 것이다. 저 이세진이 그런 제안을 승낙할 리 없단 것을. 자기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 마는 스스로에 환멸을 느꼈다.

 

 

“미안하다”

 

“야 이세진”

 

“나 너 안 좋아해”

 

“안다니까. 그냥….”

 

“아마.”

 

“...”

 

“앞으로도 안 좋아할 거야.”

 

 

와. 직설적으로 꽂히는 그 말에 또다시 정적이 흐른다.

 

 

“...닌 진짜”

 

“미안해”

 

 

여자애는 손가락을 꼼질 거리다가 손톱 끝으로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울음을 참는 듯한 행위였는데 이미 예상한 듯 얼굴은 묘하게도 메말라 있다. 깊게 숨을 삼킨 그 애는 알았어. 라며 짧은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

 

 

또 불편함은 나의 몫이다.

 

 

“문대야 너 안자지”

 

“...”

 

“깼으면 가자”

 

“...어”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큼, 목을 풀자 이세진이 웃는다. 뭐가 웃긴가 물어보려다 저렇게라도 웃는 게 낫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짐을 챙겨 걸음을 옮겼다. 이세진은 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 안 고파?”

 

“고프지”

 

 

나는 힐끔, 놈을 쳐다보았다.

고백을 받은 후의 이세진은 언제나 저런 얼굴이다. 버석하게 메말라버린 사막 같은. 하여튼 쓸데없이 잔정많은 놈이다. 진짜 쓰잘데기 없이.

 

 

“문대야 오늘은 석식 먹을래?”

 

“뭐 나오는데”

 

“육개장”

 

“아 시발”

 

 

냅다 내뱉은 욕설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놈이 푸스스 웃었다.

나는 놈을 따라 픽 웃으며 등짝을 툭, 두드렸다. 대신 니가 사.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그 자연스러운 장난에 이세진은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는다.

 

전부, 웃기지도 않는 연극이었다.

 

 

 

8월 2일

 

 

 

 

01.

 

이세진과 박문대.

생각해보면 묶어 부르는 그 문장이 어색할 정도로 기이한 조합이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덕에 그놈과 미미한 연결고리는 존재했으나, 공부만 죽어라 하는 전교 1등과 만인의 첫사랑 소리나 듣던 학생회장 놈이 접점이 있어 봐야 뭘 얼마나 있겠는가.

 

 

“안녕하세요! 1학년 이세진입니다!”

 

 

애초에 저놈은 날 기억도 못할 텐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세진은 난 놈이었다. 선배 동기 가릴 것 없이 파리지옥처럼 사람을 붙게 만드는 이상한 놈. 있던 인연도 밀어내는 박문대 자신과는 하늘과 땅보다도 더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인간, 그게 이세진이었다.

 

 

“저기”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떨떠름하게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놈을 올려다보았다. 새터랍시고 끌려와서 술만 퍼먹이는 탓에 슬쩍 도망쳐 나왔는데 어디 나랑 같은 놈이 하나 있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 그때 눈깔도 마주치지 않고 도망을 쳤어야 했는데.

 

 

“박문대. 맞지?”

 

“...어”

 

“나 알아? 너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는데”

 

 

무심코 마주한 얼굴이 예상치 못한 인물인지라 안면근육이 빳빳하게 굳는다.

널 어떻게 모르겠냐.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전교 회장, 방송부 부장. 달에 한 번은 고백을 받는다는 그 별세계 인간. 온몸으로 번쩍번쩍 빛을 내며 시선을 끌어대는 탓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던 놈. 여기서 볼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던 놈인지라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나 놈은 나의 침묵을 대답으로 여긴 것인지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미안, 좀 뜬금없었지”

 

“...”

 

“여기 와서 아는 사람 보니까 신기해서 좀 들떴다.”

 

 

서글서글 웃어 보인 이세진이 내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슬쩍 가리켰다. 여기 자리 없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그 뻔뻔한 작태를 비웃을 틈도 없이 놈은 나에게 얼굴을 스윽 들이밀었다. 순간적으로 가까워진 거리에 미간을 찌푸리자 이세진은 맑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아 미안, 그딴 소리를 덧붙이면서.

 

 

“너 이 학교 들어왔다곤 들었는데 여기서 다 보네”

 

“...”

“너도 안에 시끄러워서 나왔어?”

 

“...어”

 

“너도 술 안 좋아하나 보다. 나 술 진짜 못 마시거든.”

 

 

그냥 인간이 싫은 거지 술이라면 궤짝으로 마신다고 말하면 뭐라고 하려나 싶다.

괜히 심술궂은 마음을 갈무리하며 놈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못 알아챈 것이 이상할 정도로 뺨이 잔뜩 붉어져 있다.

 

 

“...그렇게 보면 좀 민망한데”

 

“아 미안”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 시선에 부끄러워진 것인지 웃음을 흘린 이세진이 제 목덜미를 매만진다. 술기운 때문인지, 저의 시선 때문인지 몰라도 어느새 놈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있다.

 

 

“무슨 노래 듣고 있었어?”

 

“그냥 뭐….”

 

“너 아직도 줄 이어폰 쓰네”

 

 

이세진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나의 이어폰을 주워 건네었다. 대충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니 두어 걸음 뒤에 서 있던 놈이 꽤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성큼. 긴 다리를 뻗어 제 바로 앞까지 다가온다. 순간적으로 덮쳐온 당황스러움에 놈을 의아하게 쳐다보자 싱글벙글, 멀끔하게 웃어 보인 놈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었다.

 

 

“...뭐냐?”

 

“친해지자는 뇌물”

 

“뭔 유치원생이야?”

 

“내가 좀 동안이긴 해”

 

“나 뇌물 안 받는다”

 

“그럼 선물하지 뭐”

 

 

멀뚱멀뚱 뻗은 손만 쳐다보고 있는 나를, 놈의 손이 빠르게 잡아챘다. 단단한 손아귀에 손목을 붙잡힌 채로 얼떨결에 손을 내어주고 나니,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은 놈이 제 손 위로 무언가를 떨구었다. 폭신폭신한, 인형 같은 질감이었다.

슬쩍 손아귀에 힘을 풀고 그 안을 보니 어릴 적에나 몇 번 보았던 쪼글쪼글한 곰 인형 모양의 이어폰 마개가 하나 얹혀있다. 상상도 못 한 물건에 기가 막혀왔다. 이게 술 좀 마셨다더니 꼴아버린 건가.

 

 

“쓰레기 짬처리 하냐?”

 

“와 말 개심해”

 

“뭔데 이거”

 

“선물 선물.”

 

“...이게?”

 

“요즘 줄 이어폰 되는 핸드폰 없잖아. 전에 귀여워서 샀는데 못 쓰고 있었단 말이야.”

 

 

떨떠름하게 그 물건을 쳐다만 보고 있으니 그 모습에 한참을 시원하게 웃던 놈이 내 옆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다.

 

 

“절대 버리지마 확인한다?”

 

“술 취해서 기억도 못 할 것 같은데”

 

 

어정쩡하게 손에 쥔 것을 쳐다보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놈은 또 뭐가 재밌는지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아 맞다. 너 나 모른댔지”

 

“...어 뭐”

 

“음, 나는 이세진이야.”

 

 

눈꼬리를 곱게 접은 놈은 맑게도 웃었다. 반가워, 문대야. 하면서. 나는 가만히 그놈을 바라보다 손에 쥔 곰돌이를 쳐다보았다.

갖기에도, 그렇다고 버리기에도 부담스러운 걸 받아버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다지 말수도 없고 까칠하기만 한 나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세진은 그날부터 성큼성큼 잘도 다가왔다. 문대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불러대며 들러붙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는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결국엔 그냥 무기력하게 놈이 휘둘리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려지는 수밖에 더 있나.

 

전부 다 순식간이었다. 너랑 팔자에도 없는 친구 놀이를 시작하게 된 건. 가장 친한 친구. 이딴 단어로 엮여가면서 2년이 넘도록 호구 짓을 하게 된 것도.

 

 

 

 

02.

 

두 번째 소주잔을 깨트린 순간부터 야차처럼 나를 노려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한 잔 더 술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한 잔만 더-. 이렇게 마신 것이 벌써 4병이 넘어간다.

 

 

“그만 좀 마시지”

 

“이것까지만 다 마실 거예요”

 

“학생, 그 소리 내가 지금 몇 번째 듣는지 알아?”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제 앞에 내려놓아 지는 것은 따뜻한 어묵 국물이다. 짜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꾸벅이다 몰려오는 어지럼증에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통을 처박고 말았다.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차가운 테이블에 머리통을 박은 채로 들고 있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툭-. 손가락 끝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자 익살맞은 표정을 한 채로 웃고 있는 놈의 프로필 사진이 보인다. 힘이 빠진 고개를 늘어트리며 툭툭, 몇 번 더 옆으로 넘기자 가장 최근 프로필이 떴다.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곧 휴대폰 화면이 새까맣게 변한다.

 

 

“...”

 

 

푸우, 깊게 숨을 내쉬며 폰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방 가장 안쪽에는 익숙한 것이 보인다. 꼬질꼬질하고 작은 곰돌이 이어폰 마개. 별생각 없이 들고 다니던 것이 습관이 되어 신경도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 와 눈에 밟혀온다.

 

테이블을 더듬어 지갑을 챙겨 들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은 진즉부터 내리던 안개비로 인해 보기만 해도 눅눅할 따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눈을 끔뻑이며 시계를 바라보다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10시 58분.

이세진의 생일이 끝나기 한 시간이 남은 날이었다.

 

 

 

03.

 

이세진은 언제나 눈에 띄는 놈이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배경에 붙어가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던 박문대와는 다르게 이세진이라는 인간은 어디서나 돋보이지 못해 안달이 난 인간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일 점심 방송에는 놈의 목소리가 나왔고 어디서든 그 이름을 피하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그래, 박문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우습게도 마음보다 빠른 것이 시선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존재치 않음에도, 나의 시선이 그 애한테 자꾸 머물기 시작한 것을 깨닫고 만 그 순간. 그 순간에 어떤 승자도 존재하지 않는 그 싸움의 패배가 확정된 것이었다.

 

 

“문대야”

 

 

놈의 자취방, 침대에 반쯤 드러누워있던 이세진이 별안간 허리를 세웠다. 의자에 널브러져 게임을 하던 와중에도 고작 그 시선에 신경이 곤두선다. 힐끔, 놈을 바라보자 이세진은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주제에 뭐가 그리 좋다고 히죽 웃어 댔다.

어제 술 마셨다고 하더만, 숙취에 절어 빌빌거리면서도 얼굴은 멀끔해서 재수 없다. 괜히 혀를 차며 말을 무시하자 이세진은 익숙하게 턱을 괴고 제 쪽을 쳐다보았다.

 

 

“운명 같지 않아?”

 

“뭔 개소리야”

 

“아니 우리, 고등학생 땐 마주친 적도 없는데 대학 와서 친해졌잖아”

 

 

히죽, 이세진이 한 번 더 신나게 웃는다. 나는 괜히 얼굴을 구겼다. 마주친 적도 없긴 개뿔이. 그때 니 얼굴을 내가 지금 땅바닥에 그릴 수도 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그저 꾹 다물어버렸다. 대화를 하다보면 내 속만 터지는 걸 이미 깨달은 이후였다.

 

 

“난 진짜 너 몰랐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잘 살았겠지”

 

“아냐 세진이 외로워서 말라 죽었어”

 

“어 그래.”

 

“말투 왜그래?”

 

 

찡찡거리며 제 옆구리에 들러붙으려는 놈의 머리통을 손쉽게 밀어내고 다시 마우스를 붙잡았다. 달칵 달칵. 열심히 키를 누르면서도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잔뜩 엉켜있었다.

 

운명 같다.

놈이 뱉은 그 말에 어울리지 않게 동의를 했던 것도 같다. 평소의 박문대였다면 상상도 못 할 비과학적이고 이상한 발상이었다. 제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도파민의 화학작용으로 시작되어 번식 욕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던가.

 

 

“문대야”

 

 

말갛게 웃으며 제게 손을 내미는 이세진이 보인다. 장난인 걸 아는데도, 저에겐 도저히 장난일 수가 없다. 나는 애써 웃음을 가장하며 손가락으로 욕을 뱉어버렸다.

 

그러니까, 박문대로서는 저 재앙같은 놈에게 속절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온갖 이론과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박문대에 남은 것은 이제 기도뿐이었다. 제발 제 뇌에서 날뛰는 이 호르몬과 화학작용이 멈추길. 항체에 잡아먹혀 흔적도 없던 것처럼 전부,

 

 

“...”

 

 

부서져 버리길.

 

 

 

04.

 

뒤늦은 취기가 몰려온다. 시야가 흐려진 탓에 몇 번의 헛손질을 한 뒤에야 겨우 휴대폰 화면을 켜내었지만, 화면에 곧장 뜨는 창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세진 지현이랑 사귐??]

[오늘 강남에서 둘 봄ㅋㅋㅋㅋㅋㅋㅋㅋ 뭐냐]

[사진]

[사진]

[엥 진짜 사귐???]

 

지랄한다. 굳이 저런 얘기를 과톡에서 떠들어대는 미친놈이 누군지 모르겠다. 괜스레 둘이 함께 찍힌 사진을 확대하고 줄이길 반복하다 쯧, 혀를 차곤 주머니에 휴대폰을 쑤셔 넣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술기운 때문인지 날이 더워서인지. 얼굴이 자꾸만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열대야라는 이름은 지독한 날씨에 비해 너무 낭만적인 것 같아. 어느 밤, 열기에 죽어가던 이세진이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열대야-. 입안에서 굴릴수록 동글동글 예쁘게 달라붙는 이름에 괜히 성질을 내면서 불지옥의 밤, 이딴 걸로 이름 바꿔야 한다고 내내 징징거렸는데. 괜히 또 이세진이 떠올라 웃음이 터진다.

 

 

“...”

 

 

생각해보면 그렇다. 고통스러울수록 왜 그 대상에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대는지. 부르기라도 예쁘라고 그러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다, 곧 멎고 만다. 온통 새까맣게 변한 간판들 사이에 홀로 여전히 빛을 내는 빵집 간판이 보인다. 눈을 끔뻑이며 진열대에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비틀거리며 빵집 문을 열었다.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알바생의 인사가 들려온다.

 

 

“생크림 케이크 하나 주세요”

 

 

그래서인가 이세진. 그 이름은 쓸데 없이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05.

 

여기가 무슨 MT냐. 무덤이지.

부스스, 잠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보다 그대로 굳고 말았다.

거실엔 개가 된 인간과 떡이 된 인간들이 죄 섞여서 지옥도를 그리고 있다. 그나마 바닥에 김치전을 뿌려놓은 놈은 없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입에서 무언가를 줄줄 뱉어내는 인간이었던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문대야 깼어?”

 

 

소곤소곤, 작게 들려오는 속삭임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떠 고개를 들자 언제 일어나 씻은 것인지 뽀송뽀송한 얼굴로 나를 보며 씨익 웃는 이세진이 보였다. 똑같이 술 처먹은 주제에 쟤는 왜 멀쩡한지 모르겠다. 약간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다가온 이세진이 내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해돋이 보러 갈래?”

 

“둘이?”

 

“밖에 이미 예은이랑 1학년 애들 나가 있어.”

 

 

자기야 우리 데이트는 글렀다-. 장난처럼 내뱉은 말에도 내심 찔려와 괜스레 픽 웃어 보였다. 지랄한다. 그런 소리를 내뱉으며.

초여름도 나름 여름인데,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양평의 새벽은 아직 쌀쌀했다. 가진 것이 얇은 가디건 뿐이라 아쉬운 대로 담요로 돌돌 둘러매고 나가니 이세진이 나를 보고 웃었다. 저도 바람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주제에 뭐가 그리 웃긴지. 나는 별다른 말 없이 놈을 따라 웃었다.

 

 

“추워?”

 

“어”

 

“빨리 보고 들어가자”

 

“애들은?”

 

“저어기”

 

 

턱 끝으로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저 멀리 한 덩어리가 된 채로 사진을 찍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아직 온통 새카만 어둠에 잠겨있는데 뭐가 찍히나 몰라. 멀리서 봐도 잔뜩 들떠있는 것이 발이 자꾸만 방방 댄다.

 

 

“갈래?”

 

“됐다. 늙은이들끼리 놀아야지.”

 

 

그 말에 이세진은 킬킬 웃었다. 맞다 늙은이 동지. 그딴 속 편한 소리나 내뱉으면서.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었다. 길의 끝에는 짧은 낭떠러지가 있었다. 바위에 부딪혀 철퍽거리는 파도 소리가 울린다. 나와 이세진은 그 앞에 주저앉았다.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 없는 그 조용한 평화가 좋았다.

 

 

“...”

 

 

파도가 친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짙은 어둠 사이에서도 빛을 내는 너의 눈동자가 보인다. 아직 어두운 주변 탓인지 이세진은 쉽사리 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게 어둠을 빌려 너를 맘껏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시야 끝에는 언제나 저놈이 맺혀있다. 처마 끝에 달린 작은 물방울처럼, 고작 그놈 하나가 뭐라고 쉬이 떨어지지 않고 대롱대롱 매달려 사라지질 않았다.

 

 

“해 뜬다.”

 

“...어”

 

“소원 빌어봐”

 

“이 나이 먹고 소원은 무슨….”

 

“아이고 문대야, 누가 들으면 한 팔순 먹은 줄 알겠다.”

 

 

여전히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세진이 웃는다.

나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 바다보단 너한테 비는 게 빠를 텐데.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숨겨가면서 놈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밤을 지나 먼동이 튼다.

지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미끄러져 올라오고 눈이 아릴 정도의 빛이 서서히 어둠 위로 내려앉는다. 새벽에 잠겨있던 너의 얼굴 위로 빛이 드리운다. 나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아직 여물지도 못한 채 낡아 문드러진 나의 슬픔.

흐린 빛으로도 나의 시선을 알아챈 듯, 이세진이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처음으로 두 눈을 맞추었다.

 

 

“...”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지.

너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닳아버린 기대였고 알 수 없는 호승심이었다. 혹은, 언제나 그렇듯 마음속에서 불어온 풍향이 나의 눈동자까지 붙들어 맨 탓일지도 모르고.

너를 향해있던 시선 위로 너의 시선이 얽혀 들어온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머금고, 나를 향한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기분. 아주 뜨겁고, 따듯하고, 엉망진창의 무언가를 내뱉을 것만 같은, 이상한.

 

 

“...”

 

 

이상한…….

 

 

“...어”

 

 

눈동자가 떨린다.

누군가 나의 머리 위로 얼음물을 쏟아부은 느낌이다. 너의 얼굴에 낯선 균열이 인다. 마법이 깨어지듯이 순식간에. 그것은 마치 태양의 붉은 빛 위로 다시 새벽을 퍼붓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뱃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태양이 순식간에 얼어 빛을 잃고야 말았다.

 

 

“...아까 춥다고 했지?”

 

“...”

 

“이제 들어가자.”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이세진이 태연스럽게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균열이 져 있던 얼굴 또한 순식간에 예의 익숙한 그 미소를 지은 채였다.

 

 

“어. 가자”

 

“너 먼저 들어가. 애들 데리고 갈게”

 

 

이세진이 뒤를 돌아 걸어간다.

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헛숨을 터트렸다. 자조적으로 내뱉는 숨은 조소를 닮아있었다.

 

멍청한 박문대.

멍청한 인간아.

이세진은, 널 안 좋아해.

 

바람이 분다. 목덜미에 닿는 공기는 아까보다 따듯해져 있는데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있었다.

 

그래, 그 애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07.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이 도달한 곳은 결국 익숙한 골목길이다.

저 스스로도 그것이 참 한심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한 박문대. 짐승 새끼도 이 정도 학습능력은 있을 텐데, 그렇게 당하고도 다시 여기다. 다시 또, 너의 집 앞.

 

 

이세진은 그날, 해돋이를 본 그날이 지나서도 여전히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문대문대-. 그딴 말투로 사람을 불러대면서 아무렇지 않게 어깨동무를 하고 말을 걸면서 잘만 다녔다.

그래서 기대를 했나 보다. 니가 모르지 않을까 하는. 가끔 헛다리 잘 짚는 놈이니까 착각이겠거니 하면서 넘어가 주진 않을까.

 

그리고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박살이 났다. 니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척을 하고 있단 것을 깨달았을 때. 이 허울뿐이 남지 않은 관계도 친구라고, 나를 붙잡고 애원하는 너의 방식이란 걸 알아챘을 때.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니가 알려나.

네가 모른다고 해도,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겠지만.

 

잔뜩 늘어진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꼬꾸라지고만다.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까지도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킬킬, 괜히 그 상황이 우스워 헛웃음을 터트리며 벽에 이마를 받았다. 술기운으로 둔해진 감각에도 얼얼한 고통이 느껴진다.

 

바닥을 보며 눈을 끔벅이다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3층, 익숙한 방의 불은 꺼져있다. 이해할 길 없는 아쉬움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자고 있으려나. 동기 놈이 오늘 김지현과 함께 있는 걸 보았다고 하니 안 들어온 것일 수도 있겠다.

온갖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다 다시 쓸려내려 가길 반복한다. 머리가 멍했다.

 

이세진-.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내뱉으려다 다시 삼켜냈다.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모든 것이 까발려졌음에도 나는 여전히 의미 없는 거짓을 반복했다. 이세진이 그걸 원하니까. 그 잔정많은 놈이 이기적인 나를 붙잡아가며 친구라는 선에서 벗어나지 않길 그렇게 바라는데 내가 뭘 어떡하겠어.

나는 항상 너한테 지고마는데.

 

 

“...문대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에 접착제로 붙여놓은 듯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뿌옇게 보이는 시야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세진이 선명하다. 순간적으로 꿈인가 싶어 헛숨을 들이키자 질척이는 알코올 향이 내게 지독하게 들러붙었다.

 

 

“너 뭐…. 여기서 뭐해?”

 

“...어”

 

“술 마셨어?”

 

 

얇은 흰 티 한 장에 검은색 가디건을 걸친 이세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주저앉는다. 나는 쪼그려 앉아있던 몸을 일으키려 손을 허우적대었다. 이세진은 습관처럼 나를 잡아주려 손을 뻗다 그대로 움찔, 멈추었다. 허공을 휘젓던 손이 지지할 것을 찾지 못한 채 결국 바닥으로 축 늘어진다. 나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지금 왔냐”

 

“어…. 넌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냥”

 

 

아까 전에 벽에 부딪힌 이마가 긁힌 것인지 홧홧한 고통이 느껴진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정적이 둘 사이를 유영한다. 언젠가는 이 정적이 편안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러한 순간마다 이세진에게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다. 너의 친구를 빼앗아 가버린 것 같아서. 이세진의 소중한 친구 박문대, 그 가련하고 부러운 인간을 잡아먹은 괴물이 된 것 같아서.

 

 

“문대야 일단 집 들어가자. 너 취했다”

 

“이세진아”

 

 

침묵을 견뎌내던 이세진이 별안간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으킨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이세진아. 어떡하냐. 코가 아릴 정도로 지독한 알코올 향 사이에서도 난 희미한 네 향을 맡을 수 있는가 보다. 어떡하냐. 진짜 너무 끔찍하지 않냐.

 

탁, 이세진의 팔을 뿌리쳤다. 무심결에 나를 놓친 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비틀거리다 부딪힌 등이 아려온다. 그럼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세진의 저 멍청한 표정이. 바닥에 뭉개져 버린 케이크가. 끈적한 여름의 습기가. 전부 온통 엉망이라서.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익숙한 마음과 같아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세진”

 

“문대야 내일 얘기하자”

 

“너 생일선물, 줘야지”

 

 

알고 있다.

시간은 12시를 한참 지나 있었다. 8월 2일.

나의 존재처럼.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날.

 

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 놈에게 내밀었다. 멍청한 얼굴로 그 손을 바라보는 놈에게 비틀비틀 다가가 그 팔을 들어 올렸다. 이세진은 마치 끈이 잘린 인형마냥 무기력하게 팔을 늘어트린다.

 

 

“세진아”

 

“...어”

 

“내가 너 진짜 싫어하는 거 알지”

 

“...”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진짜 싫어했다.”

 

“...”

 

“야 난 진짜로….”

 

 

니가 왜 이렇게 싫지….

마지막 말은 숨결을 타고 아주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마치 한숨처럼 내뱉어진 말에도 이세진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세진의 손 위로 들고 있던 것을 내어주었다. 이세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그 커다란 손 위에 올라간, 때가 탄 익숙한 곰돌이 이어폰 마개는 웃길 정도로 놈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세진은 제 손 위에 올라간 것이 유리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손가락만 움찔거릴 뿐이었다.

버리기엔 무섭고, 가지기엔 부담스러운 마음이란 그런 거였다.

 

 

“다음 생일부턴 안 챙겨줄 거야”

 

“...”

 

“씨발 진짜로….”

 

 

손등으로 얼굴을 북북 닦아냈다. 선물은 니가 원하는 걸 주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네가 나에게 원하는 건 언제나 단 한 가지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도저히 줄 수 없는 그 하나라는 것이 너무 서러웠다. 취기를 빌린 설움이 북받쳐 올라온다.

 

그래도 니가 원하면 내어줘야지.

마음을 노력해서라도 주어야지.

나는 아직도 개호구 새끼니까.

 

착 달라붙어 차마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자그만 목소리를 새어 보내었다. 네가 들을지 듣지 못할지도 모를 말을.

 

 

“생일 축하한다.”

 

 

나는 작은 미련 한 줌만을 남긴 채 뒤를 돌아 비틀비틀, 벽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눈이 감긴다. 나는 그 깊은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느리게 눈꺼풀을 내리었다. 눈을 감고 걷는 길은 온통 어둠뿐이라 무서웠고, 고요했다.

 

 

내일이 되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잖아. 사내놈이 낯간지럽게 한밤중에 집 앞까지 찾아와 이러는 거 얼마나 추하냐. 그것도 마음 다 들킨 놈이. 무슨 애인도 아니고.

우린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닌데.

 

“...”

 

내일이 되면, 눈을 뜨고 나면 아마 엄청나게 후회할 거다. 그냥 다른 애들처럼 기프티콘 몇 장으로 퉁칠 걸. 적당한 거리에 적당하게 불편한 친구처럼.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케이크같이 간질거리는 거 말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처럼 오글거리는 거 말고. 그냥 친구처럼. 평범한 남자애들처럼. 그럴걸.

 

더운 여름의 습기.

뭉개진 케이크.

어두운 골목.

8월 2일.

이세진에게 두고 온 나의 마음.

 

그냥, 그런 날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날. 아무것도 아닌 여름

 

 

그런, 어떤 날.

 Playlist

 ​♥     눈기린  /  도리  /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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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1XO8yMF4gmokjvp

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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