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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름@ondamianlv120

공백 포함 11,017자

 “너는 대체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하냐.”

 덩치는 산만 한 놈이. 

 박문대는 갈색 체크무늬 손수건을 꺼내 이세진에게 건넸다. 맞은편에 앉은 다 큰 녀석은 그 보드라운 천으로 시큰한 눈가를 닦지도 않고 꾹 쥐고만 있었다. 티슈 대신 이런 걸 들고 다니는 점마저 박문대는 정말 은근히 아저씨 같았다. 놀려봤다 돌아올 답은 뻔했다. ‘그럼 내가 이제 아저씨지, 뭘.’ 이세진이 잠자코 코만 한 번 훌쩍이고 말자, 박문대는 손을 들어 식당 직원을 불렀다. 

 “이모님, 여기 노지 한 병이랑 사이다 한 병 주세요.”

 박문대가 자주 찾는 단골 한식집은 노지,하면 곧바로 한라산 21도짜리를 한 병 가져다줬다. 그것도 냉장고 바깥에 두어서 미지근한 걸로. 그럼 박문대는 고개 꾸벅 숙여 가며 반갑게 소주 뚜껑을 땄다. 자기 잔엔 소주를, 이세진의 잔에는 사이다를 채워서 친절하게도 밀어줬다. 잔 한 번 부딪치기도 전에 박문대는 먼저 샷을 한 번 때렸다. 크으, 소리만 안 낸다 뿐이지, 소주 한 잔 마시고 바다 한 번 보는 그 옆모습이 아주 제주도 동네 아저씨가 따로 없었다. 이세진은 늘 그렇듯 박문대의 시선 끝을 함께 쫓았다. 소박한 식당의 전면 창 너머로는 멀찌감치 삼양 바다의 검은색 모래가 내다보였다. 바닷가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예쁜 광경은 아니었다. 이세진은 피, 입술을 조금 삐죽이더니 갈비찜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나 문대가 해준 갈비찜 먹고 싶었는데.”
 “그것도 맛있으니까 그냥 먹어. 나 이제 손가락 관절 마디마디가 쑤셔서 이런 거 직접 못 해준다.” 
 “이제 겨우 서른 중후반밖에 안 됐으면서 무슨 소리야 자꾸… 너 이런 데 혼자 틀어박혀서 사니까 빨리 늙는 거야.”
 “인간적으로 ‘중’자는 빼자, 우리. 그리고 너야말로 무슨 소리냐. 제주도 얼마나 살기 좋은데.”
 “아니, 제주 휴양 즐기고 싶으면 그 뭐야, 연예인들 많이 사는 애월이나 뭐 그런 데 가지. 아니면 다른 데도 유명한 곳 많잖아! 곽지나 월정리나… 넘쳐나는 게 핫플인데 넌 또 굳이.”
 “야, 살기엔 여기가 더 좋아. 좀만 위로 걸어 올라가면 병원도 종류별로 다 있지, 동네 마트도 여러 군데지, 맛집이며 카페 많지, 그리고 거, 여기 바닷가가 아무 때나 산책하고 해수욕하기 좋아. 핫플 그런 데는 조개껍데기 많아서 발 따갑다.”

 기껏 댄다는 이유가 사람이 많아서도 아니고 발이 따가워서란다. 이세진은 한숨이라도 참으려고 소주잔을 들었다. 두 번째 잔을 채운 박문대가 그제야 가볍게 건배를 해왔다. 그런데 막상 이세진은 입가에 잔을 가져다가도 내려놓았다. 

 “……문대문대, 이거 제로사이다 아니지.”
 “동네 식당에서 뭘 찾냐. 여기 인하트 맛집 아니거든.” 
 “나 담주부터 새 프로 들어간단 말야~” 

 이세진이 한껏 힝힝, 소리를 흉내 냈다. 

 “넌 대체 왜 나이 먹을수록 어려지냐.”

 박문대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 입꼬리는 흐물흐물 힘이 풀려있었다. 그래, 이걸 보려고 여길 왔다. 초성수기인 8월 초, 사람이 붐벼도 너무 붐비는 김포공항과 제주공항을 거쳐서 박문대가 사는 이곳 바다까지 왔다. 생일날만 되면 늘 먹던 갈비찜이 그리워서,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마는 저 얼굴이 그리워서.

 그래, 그러고보니까 벌써 일 년이 지나버렸네. 이세진은 양념이 자작하게 벤 고기를 조금 떼어서 입에 가져갔다. 육 년 전이었나, 팔 년 전이었나. 어느 순간 박문대는 이세진의 생일만 다가오면 갈비찜을 한 솥 가득 해두었다. 생일 기념 덥앱 라이브며 온갖 스케줄까지 다 끝내고 돌아오면, 숙소엔 업소용 냄비 한가득 푹 익은 고기가 있었다. 그 손 많이 가는 음식을 14인분씩 끓여놓고도 박문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예전에 너 생일상에 올라갔던 고기 뺏은 게 생각나서 해봤다. 애들 먹일 겸 한 거니까 억지로 안 먹어도 돼. 너는 집 가서 어머니가 해주신 밥이나 먹고 설거지라도 하고 오든가.’ 그들이 데뷔한 첫해, 숙소에 혼자 남아 열이 펄펄 끓던 박문대에게 밥반찬 배달 한번 해 줬던 걸 그 애는 참 오래도록 기억했다. 덕분에 이세진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연례 행사처럼 두 배로 얻어먹고 다녔다. 딱 재작년까지만. 

 재작년에 사실상 은퇴한 박문대하고는 연락을 자주 하지도 못했다. 작년 8월엔 어땠더라. 줄곧 잠적하던 애한테서 선물용 한우 세트 기프티콘이 하나 왔었고, 그게 다였다. ‘너 이거 생닭 기프티콘 복수냐’는 너스레에도 읽음표시만 사라질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올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지난 십여 년간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지냈으니 혼자 있고 싶은 만큼 있게 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세진의 서울 생활이 숨 가쁘게 돌아갈수록 꾹꾹 눌러 담던 서운함과 그리움은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게 결국 펑 터져나간 날, 이세진은 인생 최초로 충동 여행이란 걸 해봤다. 

 “너 숙소는 잡고 내려온 거냐.”

 박문대가 밥 한술 떠먹으며 물어도 해줄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그냥 오늘 아침에 비행기표만 예매해서 온 건데.” 
 “이 미친놈이… 지금 초성수기라 왕복 비행기 기름값만 20만원이다, 이놈아!”
 “급하게 남는 자리 잡으려다 보니 좀 더 낸 거 같은데…….”
 “자랑이다, 아주! 그럼 호텔 방은 널널할 거 같냐?”
 “몰라. 네가 안 재워주면 모래사장에서 노숙이라도 하지, 뭐.”

 이 답 없는 새끼……. 박문대는 밀려오는 두통에 결국 소주잔을 새로 채웠다. 대낮부터 드시는 폼이 아주 예사롭지 않게 자연스러웠다. 배세진 형이 보시면 아주……. 

 “아, 맞다. 너 세진 형 조만간 드라마 하는 거 알지. 거기 OST라도 불러보는 건 어때?”

 이세진은 가벼운 어조를 가장했지만, 눈꼬리를 살짝 찡긋거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표정 감추기는 이세진의 여러 특기 중 하나였는데도 그랬다. 박문대는 그걸 다 읽고도 심드렁히 반응했다.

 “OST는 무슨 내가 부르고 싶다고 불러지냐.”

 “왜에, 세진 형한테 말이라도 꺼내 봐. 그 형이 너 예능도 꽂아주고 우리 뮤비 촬영진도 다 섭외했던 거 까먹었어?”

 그 형 인맥 파워 요즘 더 장난 아냐. 이젠 천만 아역 아니고 그냥 천만 배우다, 천만 배우. 

 이세진이 괜히 더 들뜬 목소리로 연신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박문대는 여전히 밥이나 푹푹 떠먹다가 폰과 지갑을 챙겼다. 

 “너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 시내 호텔 쪽으로 태워다 줄 테니까.”
 “뭐어!”

 이세진이 스물 몇 살짜리처럼 데를 쓰든 말든 박문대는 봐주는 것 없이 일어나 계산까지 해버렸다. 박문대가 모는 중형차 조수석에 후다닥 올라탄 이세진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냥 한 번 물어나 보자니까, 응? 내가 전화 함 걸어볼까? 너 세진 형이랑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언제야?”
 “안전벨트나 매.”

 이세진이 그 긴 다리를 접고선 벨트를 쭉 당겨 맸다. 그 나이가 돼도 관리는 여전히 독하게 하는지, 그 키에 살집은 거의 없었다. 테스타 해체한 지가 언젠데 얘는 아직도…… 좀 편하게 살지. 옆에서 이세진이 아등바등 애쓰는 것도 몰라주고, 박문대는 딴생각만 줄창 해댔다. 덕분에 이세진은 전략을 바꿔 다른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 문대문대 지금 서쪽으로 가는 거지? 시내 가지 말고 좀만 더 달려서 바다 가자, 바다! 이호테우 해수욕장!”
 “방금까지 본 건 바다가 아니고 뭐냐.”
 “거기랑 거긴 다르지! 이호 거기 포토존 많잖아~ 나 그 빨간 말 모양 등대랑 도두봉 키세스 모양 나무에서 사진 찍을래! 관광객 다들 하는 건데, 난 일만 하느라 제주도 여러 번 와서도 사진 한 방 제대로 못 남겼단 말야.”
 “이러다 감귤초콜릿도 사자고 하겠네.”
 “오오, 그거 완전 좋은데!”

 박문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핸들을 돌렸다. 일부러 빙 돌아가며 해안도로를 타기까지 했다. 차는 그대로 이호테우 해변까지 쭉 달렸다. 유리창을 내리면 선선하고 짭쪼름한 바닷바람이 산들산들 들어왔다. 햇볕도 뜨겁기보단 따사로웠다. 조수석 떼쟁이가 콧바람 쐬면서 조용해지자, 박문대는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딱 여름날에 알맞은 이지리스닝 곡이 흘러나왔다. 요즘 남자아이돌 1군 수장이라고 불리는 이테르의 신곡이었다. 이세진은 적당히 노랫말을 흥얼대다가 또 수다를 시작했다. 

 “아, 얼마 전에 예능 엠씨보다가 오랜만에 이 친구들 얼굴 봤어. 얘네 이제 선배님 소리 듣더라~” 
 “그렇겠지. 데뷔한 지가 언젠데.”
 “그치? 아, 부럽다! 우리보다 훨씬 어릴 때 데뷔해서 아직도 한창때고~”
 “너도 아저씨 다 됐네. 남부럽다는 소릴 다 하고.”
 “아하하! 그러게, 우리도 막 하이틴 컨셉하면서 브이틱 선배님들 앞에서 나이 자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시절 얘기로 한담이나 나누다 보니 해변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세진은 처음엔 선글라스와 모자, 양산으로 무장하고선 포토스팟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더니 문제의 등대 앞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건 죄다 벗어던지곤 사진을 한 오천 장쯤 찍었다. 물론 포토그래퍼는 박문대였다. 박문대식 표현으로 인하트 중독자인 이세진은 늘 ‘이것도 엔터테이너로서 퍼스널 브랜딩 활동의 일환’이라며 단호하게 굴었다. 덕분에 도합 (체감) 칠천 장가량의 사진을 다 찍고 난 뒤에야 제대로 바닷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이세진의 은근한 방해와 해수욕하러 온 관광객들의 들뜬 분위기 덕에 온전히 평화롭지가 못했다. 

 분명 처음엔 날이 더우니 발만 담그자는 말이 나왔다. 그러더니 나중엔 어차피 반바지 차림인데 좀만 더 들어가자고 꼬시더니, 얼마 못 가 아예 박문대를 툭툭 건들기까지 했다. 

 “아, 그만하라고.”
 “왜에~ 물 종아리까지밖에 안 오잖아.”
 “아, 또. 진짜 큰세진 너… 악!”

 점점 과감해지던 이세진의 장난이 기어이 박문대를 넘어뜨렸을 때, 박문대는 딱 한 번 참았다. 그도 마냥 이십 대 때처럼 쉽게 도발이 먹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쪼리와 반팔티 쪼가리, 짧은 반바지가 소금물에 푹 젖었어도 말이다. 

 “…야, 우리가 무슨 고딩도 아니고. 계속 이러다간 너 피부 다 타고 주근깨 올라온다.”

 박문대는 미간을 문지르면서 다 젖은 몸을 일으켰다. 나름 잘 먹히는 멘트였다고 자평하면서. 그러나 돌아오는 건 물벼락과 웃음소리뿐 이었다. 

 “그만하자니… 푸학!”
 “으하학! 미안, 물 먹었어?”

 퉷,하고 모래를 뱉어낸 박문대의 입가엔 호승심 섞인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세진은 어느새 선글라스며 모자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채로 풍덩풍덩 바닷물을 헤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아까 차 안에서 선크림을 그렇게 처바르더니… 다 계획이 있었다, 이거냐? 결국 박문대는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이세진을 뒤쫓아 뛰었다. 

 “차 시트에 바닷물 배면 니가 갈아 줄 거냐, 이 미친놈아!”
 “으헉, 빡친 이유도 진짜 아저씨 같아, 문대… 으앗!”

 아직도 철 못 든 어른은 티셔츠 뒷목이 훅 잡아당겨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대로 사이좋게 푹 바닷물 샤워를 하자마자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가 먼저 시작한 거다…….”

 어, 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니 짠 물벼락이 쏟아졌다. 진흙탕, 아니 모래탕 싸움이었다. 


*

 마음만은 십 년 전 청춘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체력은 그리 어리지 못했다. 서른 들어서고 나서부터 급격히 태가 나는 것이 또 체력이었다. 그래도 삼십 분 동안 물에서 싸운 거면 아직 안 죽은 거지, 뭘. 박문대가 거친 숨을 색색 고르면서도 허세를 부렸다. 서른 중반이 넘고도 복싱과 필라테스로 단련된 이세진만이 그나마 좀 멀쩡한 모양새였다. 

 “헉, 그러게, 훅, 내가 무리하지 말랬잖아.”
 
 먼저 사람 꼴 받게 한 게 누군데 이 자식이 지금…….

 애석하게도 박문대는 씨근덕거릴 기운조차 남아나질 않았다. 모래탕, 바닷물탕 싸움으로 아주 꼴이 허름해진 두 남자는 비척비척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양심이 남은 이세진이 발 씻는 곳이라도 찾으려 하자 박문대는 손사래를 치며 그냥 차 문을 열었다. 

 “됐다, 그냥 빨리 타라. 니가 차 바꿔주면 되지. 돈도 나보다 잘 벌잖아.”
 “뭐? 문대문대, 아니 박 이사님~ 농담이 지나치시다~”
 “뭐래. 주식 정리하고 자리 내려놓은 지가 언젠데.”
 “거짓말!”

 이세진은 괜한 호들갑을 떨어 가면서 이미 알고 있던 화제를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소금기와 모래알과 자동차 에어컨 바람 틈바구니에서도 수다거리는 끊임없이 샘솟았다. 찝찝하게 젖은 옷과 머리칼은 금세 잊을 정도로. 

*

 차로 40분쯤 달려 도착한 박문대의 집은 바다가 잘 보이는 단독주택이었다. 다른 단독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데 반해, 박문대의 집만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특별히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외관도 내관도 모두 모나게 허름하지도, 티나게 번듯하지도 않았다. 이제 중학생 정도 된 자식을 둔 부부가 거주할 만한, 그런 소박하고도 평범한 이층집이었다. 

 이세진은 일 층 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오는 길에 다시 집안을 한 번 둘러봤다. 물건도 거의 없이 휑한 선반, 자질구레한 물건 하나 굴러다니지 않는 소파며 티테이블… TV 밑 수납장은 뭐가 들어있긴 한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마치 누가 빌려준 펜션에라도 놀러 온 기분이었다. 

 “다 씻었어? 뭐 간식으로 빙수라도 해 줘?”

 박문대가 이층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내려왔다. 그 애는 그나마 생활감이 있는 부엌으로 직행하고는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십오 년 정도 봐 온, 박문대의 요리하는 뒷모습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제빙기에 얼음을 넣어 갈고, 미숫가루며 연유를 듬뿍 뿌리고, 단팥을 캔에서 꺼내는 손길이 아주 능숙했다. 박문대는 마지막으로 오메기떡을 해동해 숭덩숭덩 잘라 올리기까지 했다. 빙수가 완성되는 동안 이세진은 주스며 접시를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도 세팅해뒀다. 

 “먹자.”
 “잘 먹겠습니다~ 와, 진짜 어디서 파는 거 같다! 제빙기는 또 언제 사 놨대.”
 “여기 배달비 서울 같지 않고 비싸. 사 먹는 것보다 해 먹는 게 낫지.”

 이세진은 박문대를 따라서 나무 숟갈로 빙수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눈꽃 빙수랑은 다르게 입에서 얼음이 서걱서걱 씹혔다. 투박한 옛날식 빙수는 정겨운 맛이 있었다. 거기다 오메기떡을 먹으며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를 보니, 꼭 여행 프로라도 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감성을 즐기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세진은 몇 숟갈 먹다 말고 빙수 대신 박문대의 얼굴이나 쳐다봤다. 샐샐 웃는 그놈 낯이 박문대의 성질을 더 건드렸다. 

 “뭐해, 더 안 먹고. 이제 내가 만든 음식 별로야?”
 “아냐, 맛있어. 문대 실력 여전하지~ 옛날에 야식 토스트 만들어달라고 떼썼던 거 생각나고 그렇네.”
 “그럼 얼른 다시 숟가락 들어라. 방금 힘 빼서 배고플 거 아냐.”
 “음~ 아냐아냐! 진짜 이제 배불러.”
 “장난하나… 점심에 갈비찜도 깨작거리더니.”
 “그게 실은~ 문대문대가 내 생일 선물 뭘로 준비했을까, 너무 기대돼서 지금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 거 있지?”

 

 이세진이 손으로 꽃받침 모양까지 흉내 내가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과연 관리에 미친 놈답게 아직도 얼굴이 반들반들한 것이, 영 보기 싫진 않았다. 그러나 박문대는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그의 손엔 작은 갈색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박문대는 말없이 상자를 이세진 앞 방바닥에 내려놨다. 

 “헉, 진짜 준비해준 거야? 나 일 년 동안 엄청 기대했는데~” 

 이세진은 최대한 장난스럽게 웃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박문대는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했다. 이세진이 긴장한 손으로 열어젖힌 상자엔,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미국 브랜드 스모어 쿠키(미국 투어 갈 때마다 큰 봉지 하나씩 사선 막상 이세진 본인은 한 개만 먹곤 다 차유진 나눠주었던 그것), 요즘 2030에게 핫하다는 게임기(이세진이 몇 번인가 덥앱에서 언급하던 힐링동물 게임 에디션), 빨간색 오픈 핑거 복싱 글러브……. 

 “……이게 다 뭐야?”

 이세진이 굳은 얼굴로 박문대를 올려다봤다. 이번엔 숨기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분명하게도, 이세진은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이세진, 너 이제 현역 가수 아니야.”

 박문대는 이세진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아 말했다. 

 “우리 팀 해체한 지 꽤 됐고, 너는 그 후로도 간간이 솔로앨범 냈지만 이제는 더 내기 힘든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 은퇴 번복 안 해. 회사 주식 정리하고 자리 내려놨다는 것도 다 담백한 사실이야. 이것도 이미 알고 있잖아, 너.”
 “……그래도 여전히 경영이며 후배 그룹 프로듀싱에 관여는,”
 “안 해. 그것도 놓은 지 일 년쯤 됐다.”
 “그럼… 그럼 래빈이가 꾸준히 보내주는 곡들은? 가이드녹음 정도는 가끔 해준다며. 그건 다 뭐야?”
 “그것도 이제 안 해. 래빈이 주변에 나보다 실력 좋은 사람들 많아. 곡들도 다 돌려보냈지.”

 상자 끄트머리가 이세진 손에 살짝 우그러졌다. 박문대는 그 위에 제 손을 포갰다. 

 “믿기 힘들 수도 있지만 난 지금이 좋아. 시간은 계속 흐르게 돼 있고, 어느 그룹이든지, 누구든지 다 언젠가 끝을 맺게 돼 있잖아. 난 박수받을 때 떠났으니 충분히 만족해. 사실 내 고집으로 계획보다 좀 더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거지.”
 “…그래, 제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해서 미안해. 나 혼자 초조하고 마음만 졸였나 보네. 이 나이 먹고 너한테서 독립도 제대로 못 하고 말야, 응?”
 “이세진.”

 박문대는 숨을 고르다가, 한 단어 한 단어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다 내려놨으니 너더러 같이 내려놓으라는 소리 아니야, 이거.”
 “그럼 무슨 뜻인데?”
 “같이 행복해지자는 거지.”

 박문대의 손이 이세진의 손등을 한번 보듬었다. 이세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제 예전처럼 혹독하게 너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아도 되니까, 같이 좀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자고. 너 좋아하는 과자도 좀 먹고, 관심 가는 게임이나 좀 하면서 여유롭게 시간 보내고, 하고 싶을 때 언제든 마음껏 복싱도 하고.”
 “…….”
 “기왕 꺼냈으니 하는 말인데, 너 그놈의 필라테스랑 외국어 공부 말고 다른 취미생활도 만들어 봐. 아니, 그냥 조금만 편하게 지내. 어떻게 사람이 인형도 아니고 매번 똑같은 체형, 똑같은 컨디션 유지하고 살겠어?”

 내내 침묵하던 이세진이 상자 속 글러브를 만지작거리면서 큼, 하고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이제 우리, 완전히…… 헤어지는 거네.”

 이렇게 너는 나한테 해줄 거 다 해주고, 나는 혼자서도 편하게 잘 지내면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만날까. 무슨 변명을 대고 비행기를 탈까……. 

 이세진은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쓰다듬었다. 그러다 자기 자신의 감정은 오롯이 혼자서 책임질 결심이 섰을 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박문대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 그 뭐냐… 사귀고…… 있었냐?”

 이세진은 순간 벙쪄서, 상자를 옆으로 홱 치우고 박문대의 따끈한 볼을 붙잡았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무슨.”
 “너, 너… 박문대 너 이…… 그럼 그동안 나한테 했던, 아니 같이 했던 짓거리는 다 뭔데? 너 무슨 세상사 다 통달한 어른처럼 굴면서 어떻게,”
 “…사귀자는 말 한 적은 한 번도……”
 “그럼 그걸 일일이 말해야 알아?”

 한창 성을 내던 이세진은 똑같이 불타는 얼굴로 씩씩댔다. 박문대는 그 상황에서 또 눈치코치 없이 궁금한 걸 다 물어봤다. 

 “근데 그… 헤어, 졌다는 건 무슨 말이냐. 난 너랑 딱히 떨어진 적 없는데.”

 “아, 그러셔? 나 혼자 놔둔 적이 없으셔? 그럼 지난 일 년 동안 잠수 탄 건 뭔데?!”
 “그거야, 나도 이것저것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했고,”
 “나한테 문자 한 통 넣으면 정리하던 게 다 무너져? 하늘도 무너지고?”
 “너는 또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냐…….”
 “박문대 이 미친, 야박한 새끼…….”

 급기야 이세진은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참, 어렸을 때부터 눈물도 많은 녀석인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박문대는 어쩔 줄 몰라 안달복달 내더니 사과를 내놓았다. 

 “야, 야… 뭘 또 울고 그래, 내가 잘못했어. 너랑 연락하면 은퇴 결심 다 도루묵될 거 같아서 그랬지…….”
 “그럼 지금이라도 여기 다 정리하고 도로 서울 올라오든가!”
 “지금까지 내 말 어디로 들었어?”
 “몰라, 난 아직도 납득 안 됐어!”

 기어이 이세진은 펑펑 우느라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팔자에도 없는 연하 애인 달래주느라 말을 못 이은 건 박문대도 마찬가지였다. 박문대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민망해하다가, 결국 이세진에게 짧게 입 맞췄다. 순식간에 달아난 입술을 잡아챈 건 이세진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박문대는 거실 바닥 위로 밀려 넘어갔다. 이세진의 눈물 덕에 된통 짠맛만 느껴지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키스였다. 그런데도 박문대는 이세진의 머리를 끌어안아 마구 헤집었다. 겨우 숨 쉴 틈이 생긴 뒤에 박문대가 이세진의 눈물 자국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너는 대체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하냐.”
 
 이세진이 콧방귀를 뀌듯 웃었다. 

 “참나. 이거 다 박문대 씨 업보니까 잘 챙겨서 다니세요. 네?”

 하, 박문대도 따라 웃었다. 거실 유리창은 바닷가 노을을 한가득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 빛깔만은 낭만적이었으나, 세상사 뭐든 뜻대로 굴러가지만은 않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박문대 너. 그럼 그동안 나랑 이런 짓 할 때마다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응?”
 “같이 밥 해 먹고, 살 맞대고, 머리 맞대고 살면서도 사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야, 그거는……”
 “너 솔직히 말해봐. 류건우 시절에 연애 경험 없다는 것도 다 구라지?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데리고 살았어? 어?!”
 “우선 진정 좀……”

 “당장 몇 명이었는지부터 말하라고!”
 “야아, 큰세진…….”

 아무래도 박문대는 제 남자친구의 애교며 넉살을 배워야 할 성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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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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