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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_mi___mi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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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 고등학교에는 세 가지 명물이 있다. 첫 번째는 끝내주게 맛있는 급식. 두 번째는 끝내주게 맛있는 급식을 먹게 해준 학생회장 이세진. 세 번째는 중학교 콤비. 명물이라고는 했지만, 세 가지는 모두 이세진이 입학하고 나서야 생긴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가지 명물의 주인공 이세진은 어떤 사람일까, 이세진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낡아빠진 단어가 된 엄마 친구 아들의 표본. 키 크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공부도 잘하는데 교우관계까지 좋은 사람이 바로 이세진이었다. 이세진은 입학부터 평범하진 않았다. 우글우글 모여있는 500명 사이 툭 튀어나온 머리, 걔가 이세진이었으니까. 이세진도 남들 다 사는 교복사에서 교복을 샀을 텐데 다른 사람들에겐 죄다 미묘하게 후줄근한 교복이 이세진한테는 딱 맞았다. 머리 하나 더 큰 놈이 교복도 잘 어울리고 심지어 학생대표로 단상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신입생 대표로 올라가 선언문을 읽는 목소리마저 좋은, 입학부터 평범하지 않은 이세진이 학생회장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중학교 콤비는 이세진과 어떤 관련이 있나, 말할 것도 없다. 이세진이 중학교 콤비 중 한 사람이니까. 이세진은 중학교 때도 유명했다. 예의 그 성격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 콤비의 또 다른 한 명이 바로 박문대였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처음부터 친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둘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본 사이니 친하고 말고 따질 정도의 친분도 없었다.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세진은 키가 컸고 박문대는 키가 작았다. 이세진은 쾌활했으나 박문대는 조용했다. 이세진의 웃음은 크고 가벼웠고 박문대는 조용히 웃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도 같은 게 하나 없으니 박문대는 입학 첫날 이세진을 둘러싸고 시끌시끌한 무리에 대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씨와 박 씨였으니 출석번호도 붙어있지 않았고, 학기 초에 드는 동아리마저 달랐다. 박문대는 평생 이세진 같은 사람과 가까이 지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세진 생각은 달랐던 것 같지만.

친해지고 난 뒤 이세진은 ‘난 처음부터 문대한테 말 걸고 싶었는데~ 문대는 나 신경도 안 썼잖아. 그치? 내가 몇 번 먼저 말 걸었을 때도 단답으로 대답했고~ 세진이 서운했어~’ 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실제로 친해지게 된 건 이세진의 몫이 컸다. 출석번호 순서대로 앉던 3월이 지나고 슬슬 벚꽃이 봉우리를 맺었을 때쯤, 자리 뽑기에서 둘은 짝꿍이 되었다. 하지만 박문대는 그럼에도 여전히 이세진에게 관심이 없었고, 이세진은 옆자리 짝꿍이랑도 잘 지내보려는 사교성을 가지고 있어, 첫마디는 이세진이 먼저였다. ‘안녕. 문대라고 불러도 돼? 우리 별로 얘기해본 적 없지, 짝꿍 돼서 좋다.’ 그리고 박문대의 대답은 이랬다. ‘응.’

박문대는 결코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조금 무뚝뚝할 뿐,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성격이 아닐 뿐, 주절주절 말하는 사람 앞에 대고 응.이라며 짧은 단답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래 다만, 가까이에 앉아 있는 이세진이 생각보다 컸고, 생각보다 목소리가 좋았으며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하는 얼굴이 생각보다 더, 잘생겨서. 박문대는 이세진이 과하게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편견을 벗어던질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무덤에 묻히는 날까지 첫 만남 때 왜 그렇게 딱딱하게 대답했는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박문대는 아직도 ‘난 처음부터~’라 운을 띄우는 이세진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넘기곤 했다. 가끔은 쫑알거리는 입에 사탕을 쑤셔 넣으며 그 뒤로는 잘 해줬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사실이니까. 박문대는 나름대로 이세진에게 잘해줬다.

스스로도 당황할 정도의 단답 뒤에, 이세진은 잠깐 말이 없었으나 다시 웃었고 박문대는 침묵을 끊을 방법을 찾지 못해 입을 꾹 다문 채 빌려온 책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이세진은 금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는데 박문대는 여전히 앉아 책의 모서리를 만졌다. 조금 전까지 읽던 책의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박문대는 그날 하루를 온통 엉망으로 보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이세진이 자리에 앉을 때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불쑥불쑥 수면 위로 올라와 친구들과 선생님이 하는 모든 말이 귓가에 닿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졌고 집으로 돌아가 문제집을 풀면서도 금세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곤 했다. 하다못해 나도 이름으로 불러도 되냐는 말이라도 할걸…. 박문대는 침대에 누워서도 낮의 일을 곱씹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말을 걸어. 탓해봐야 결국 이상한 대답을 한 건 자신이므로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말이다. 멀리서 본 이세진은 좀 더 시끄럽고 부산스러웠는데, 원래는 그런 성격인가….

그날 밤 박문대는 처음으로 타인의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찾은 답을 손에 쥐고 등교했을 때 이세진은 지루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낫지…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박문대는 발을 움직여 자리에 앉았고,

 

“안녕 …이거 먹을래?”

 

어젯밤 내내 찾은 답을 내밀었다. 포도 맛 새콤달콤 이었다.

 

포도 맛 새콤달콤 맛을 본 이세진은 잠시 말이 없다가, 흐느낌을 내뱉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박문대는 이세진이 그렇게 큰소리로 오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 와중에도 박문대가 내민 새콤달콤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겨우 웃음이 멈춘 뒤에 이세진이 뱉은 말은 고맙다는 인사도 아니었고 웃어서 미안하단 사과도 아니었다. 나 새콤달콤 좋아해. 그렇게 말하더니 새콤달콤 하나를 휘휘 까 입에 홀랑 넣고 두세 개 정도를 제 손에 올린 채 다시 박문대한테 내밀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안녕 문대야. 너 새콤달콤 좋아해? 내가 방금 선물 받았는데 너도 먹을래?”

 

선물 받았던 걸 다시 당사자에게 돌려주다 못해 선물 받았다는 말까지 하는 뻔뻔함이 어떻게 중학교 1학년의 것인지. 박문대는 이세진만큼 태연하지도 뻔뻔하지도 못했지만 이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라는 건 알아, 포도맛 새콤달콤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 근데 사실 난 복숭아 맛을 더 좋아해.”

 

다음날 이세진은 복숭아 맛 새콤달콤을 사 왔다.

 

 

그 뒤로도 이세진은 곧잘 말을 걸었다. 박문대도 곧잘 받아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거 하나 없다고 단정 지은 것 치곤 잘 붙어 다녔다. 2학기가 시작할 때쯤에 이세진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상태로도 박문대를 기가 막히게 찾았고 박문대도 이세진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 수 있었다. 물론 박문대는 이세진이 필요하지 않으면 멀리서 제 할 일을 했다. 어차피 금방 이세진이 올 테니까. 2학년 때는 반이 갈라졌다. 이세진은 울상지으며 ‘문대문대는 나 안보러 올거지? 어차피 나만 문대 보러 가겠지?’ 라며 박문대의 속을 뒤집었고 그 덕에 아침에는 박문대가 오후에는 이세진이 뺀질나게 서로의 반에 들렸다. 중학교 2학년의 이세진과 박문대는 반도 다르고 층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달라 내리는 버스 정류장마저 달랐지만, 학원은 같았다. 학교가 끝나면 이세진이 박문대를 데리러 와 같이 저녁을 먹고 학원을 갔다. 학원에서도 이세진의 옆자리는 박문대, 박문대의 옆자리는 이세진이었다. 근 365일 24시간을 붙어 다녔으니, 서로가 질릴 법도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박문대는 이세진의 시시각각 바뀌는 얼굴, 눈 속에 들어있는 빛, 유독 부드러운 말씨가 늘 신기했고 이세진은 박문대의 새초롬한 얼굴, 주춤거리며 마주치는 눈이 좋았다.

그러면 한 번도 안 싸웠냐, 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둘은 달랐다. 사람이 100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둘은 같은 부분이 80, 다른 부분이 20이었다. 막 사춘기에 도입한 15살은 그 다른 20만으로도 세상이 떠나가라 유치하게 싸울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봤을 때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다툼이 많았고, 그럼에도 옆자리는 서로였다. 바로 전까지 서로에게 소리치며 길을 걸었으면서 학원 수업 시간에는 입 다물고 붙어 앉았고 집에 가는 길에 또 싸웠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짜증을 내고 화를 냈지만 싸움은 길어봤자 3일이었다. 화해 방법도 웃겼다. 이세진이 잘못하면 복숭아 맛 새콤달콤을, 박문대가 잘못하면 포도 맛 새콤달콤을 내미는 게 화해였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되었고, 이세진은 이사를 했다. 박문대네 옆집으로. 어디로 이사를 할지 끝까지 말하지 않더니 2월 마지막 주 주말 아침, 초인종 소리에 듣고 나갔을 때 새콤달콤과 떡을 든 이세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 문대야? 엄마가 떡 가져가라 했는데 너는 새콤달콤 더 좋아해서 새콤달콤 사 왔어. 아주머니 집에 계셔? 떡 드리고 밥 먹으러 가자.”

 

기다렸다는 듯 뱉는 말에는 박문대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중학교 3년 내내 붙어 다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중학교 콤비라는 별명은 고등학교에서 생겼다. 중학교 내내 붙어 다녔으니 둘은 자연스럽게 같은 고등학교를 지망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사는 지역은 소위 말하는 뺑뺑이로 학교를 붙였고, 대부분 지망학교에 갔지만 까딱해서 떨어질 수도 있는 오로지 운 100%를 따르는 방식에는 박문대도 태연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9지망까지 이세진과 맞췄고 학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떨어지면 어떡하냐며 징징거리는 이세진의 등을 때리기도 했지만 정작 박문대도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대뜸 이세진에게 전화해 시답잖은 말로 이세진의 잠을 깨우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집이 붙어있어 학교가 떨어져도 지겹도록 얼굴을 보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때는 둘 다 떨어지면 얼굴도 보지 못할 사람처럼 유난을 떨었다. 그 유난을 떨어서인지, 아니면 신기할 정도로 운이 좋은 이세진 덕분인지, 둘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첫날부터 같이 등교했고, 반이 달랐으나 삼일 정도 뒤에 박문대는 이세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어 한결같음에 혼자 웃었다. 이세진은 점심시간마다 박문대를 데리러 왔고 박문대는 하교시간마다 이세진을 찾아갔다. 붙어 다니는 건 같았으나 동아리는 여전히 달랐다. 이세진은 학생회, 박문대는 방송부. 이때부터 그 별명이 따라붙었다. 지금도 친한 학생회 이세진과 방송부 박문대가 중학교 때부터 친했다는 소리를 들은 몇몇 놈들이 장난으로 부른 ‘어이 중학교~’가 아름아름 입소문을 타 전교에 퍼져서 생긴 별명이 중학교 콤비였다. 하지만 둘이 이렇게 불리게 된 건 다른 몇 가지 이유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건 이세진의 사과 신청과 박문대의 철벽 방송이었고, 두 번째로는 총 동아리의 명물로 유명했다.

 

먼저 첫 번째 사과 신청과 철벽 방송은 박문대가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솔 고등학교 방송부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사연과 신청 곡을 받아 점심에 방송했는데, 1학년에겐 점심시간 방송을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예외가… 바로 박문대였다.

입학하고 3개월 동안 박문대는 단 한 번의 사고도 치지 않았다. 동기가 만든 사고도 자기 선에서 수습했고 착오로 생긴 방송사고마저 박문대의 유연한 대처로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여러 활약으로 입학 3개월 만에 방송부의 에이스 타이틀을 얻은 박문대는 1학년은 방송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깨고 당당히 일주일 중 하루를 맡았다. 물론 박문대의 의견은 없었다. 박문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뿌듯한 얼굴로 ‘그래서 네가 화요일날 방송을 맡아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선배들에게…, 박문대는 싫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박문대는 화요일마다 점심시간에 방송했다. 이세진은 박문대가 방송을 맡는다는 걸 알게 된 후 종종 방송부 문 앞에 걸려있는 메시지 함에 쪽지를 넣곤 했다. 쪽지를 고르는 건 박문대이니 이세진의 필체를 못 알아볼 리 없어 가끔은 이세진의 쪽지를 읽었고 가끔은 이세진의 쪽지를 무시했다. 쪽지를 읽은 날 하굣길의 이세진은 오늘 사연이 좋지 않았냐며 의기양양했고, 쪽지가 읽히지 않는 날이면 ‘왜애, 뭐가 맘에 안 들었어, 문대야?’ 하고 박문대에게 엉겨 붙었다. 그래서 박문대는 이세진의 쪽지를 읽지 않는 날이 점점 늘었다. 엉겨 붙는 이세진의 무게가 버겁지 않아서, 어깨에 올라오는 무게가 없는 게 허전해서.

하지만 박문대가 꼭 읽는 이세진의 사연도 있었다. 둘은 새콤달콤을 주고받는 걸로 화해했지만 박문대가 방송을 맡으면서 조금 달라진 방식의 화해가 추가됐다. 새콤달콤의 시작이 박문대였다면 사과 방송의 시작은 이세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같잖은 이유로 다퉜고, 얼굴 보고 말하기 멋쩍었던 이세진이 사연 대신 써넣은 사과를 박문대가 전교에 방송한 게 시작이었다.

 

“익명 님의 사연이네요. 아~ 친구랑 다퉜나 봐요. 그날 내가 심하게 말했던 것 같아 미안…. 음……사과가 너무 짧네요?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도 안 적혀 있고…. 제가 사과받는 친구였다면 도저히 용서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익명 친구, 이렇게 전할 사과라면 얼굴 보고 하는 게 좀 더 좋을 것 같네요. 신청곡은… 백아연의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

 

방송을 듣자마자 이세진은 그 사연이 자신이 보낸 쪽지였다는걸 알았다. 이걸 전교생 앞에서 읽는다고… 꺼끌거리는 밥알을 억지로 삼키며 겨우겨우 한 그릇을 비워낸 이세진은 그 즉시 매점으로 달려가 새콤달콤 복숭아 맛 세 개를 샀다. 한 문장 한 문장 말하는 박문대의 말투가 날이 서 있는 것부터, 적지도 않은 신청곡의 제목까지 새콤달콤 하나로는 어림도 없을 듯했다. 방송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방송부 앞에 도착하기 위해 이세진은 최대한 빠르게 뛰었다. 심지어 자신을 부르는 학생회 임원들도 무시하며 방송부 앞으로 뛰어갔다. 마지막 신청곡이 나올 때까지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고 박문대가 뛰쳐나오자마자 문 앞에 주저앉아 눈을 마주치고 새콤달콤을 내밀었다.

 

“문대야 미안해….”

 

이게 그 첫 번째 사과 쪽지와 철벽 방송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도 박문대는 종종 이세진의 사과를 전교생에게 읽었고 이세진은 그 방송만 들으면 점심을 먹다가도 방송부로 달려가 새콤달콤을 박문대에게 바쳤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청솔 고등학교 학생들은 방송을 듣는 것만으로도 둘의 우정 전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문대가 또 빡쳤구나… 이번엔 이세진이 많이 잘못하지 않았구나… 박문대가 삐졌구나… 하고. 두 번째 이유는 이세진이 학생회장을 맡게 되면서 생겼다. 기본적으로 청솔 고등학교 학생회는 대부분의 동아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학생회는 예산을 지켜야 했고 동아리는 예산을 좀 더 받아내야 했으니까. 가장 큰 예산 분배 문제부터 시작해 매달에 한 번씩 내는 동아리 계획서, 축제, 운동회 등등 각종 자잘한 행사부터 큰 행사까지 동아리를 총괄하는 학생회와 각 동아리 부장들은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지만, 그중 가장 다툼이 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방송부였다. 박문대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방송부 부장을 맡았고 이세진은 전교학생회장을 맡았다. 3월에는 괜찮았다. 둘 다 아직 인수인계를 완벽하게 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4월부터 학생회와 방송부는 피 터지게 싸워댔다. 물론 입으로만. 어디 가서 말로 진 적 없는 이세진과 마찬가지로 말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박문대의 의견겨루기는 달에 두 번 있는 총 동아리 회의 시간의 명물이었지만, 둘은 회의가 끝나고 학생회실을 나간 그 순간부터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붙어 다녔다. 총 동아리 회의가 끝나고 꼭 붙어 하교하는 둘의 옆에 걸으면 5분에 한 번씩 이세진의 ‘그러니까 학생회 들어오라 했잖아 문대야~’ 하는 푸념도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학교에 영향력이 큰 자리를 맡고 있으면서 이렇게 붙어 다니는 티를 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청솔 고등학교에 다닌다면, 심지어 신입생이어도 한 달만 지나도 둘을 알았다. 오죽하면 이세진이 없어지면 박문대한테 가면 되고 박문대가 없어지면 이세진한테 가면 된다는 농담도 친구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 정도로 둘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 친구 맞지? 라는 말은 친구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만 나온다는 인터넷 낭설이 있다. 그리고 박문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이세진과 나는 친구가 맞나? 그리고 현재 고등학교 2학년, 18살의 박문대는 대답할 수 있었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친구가 아니라고. 이세진에게 박문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맞았다. 박문대는 아니었지만. 세상 어느 친구가 친구와 손잡고 싶고, 닿고 싶고, 닿지 않으면 서운하고, 입 맞추고 싶고,… 꿈에 나오냔 말이다. 다른 친구들은 이러지 않았다. 오직, 이세진만 그랬다. 14살부터 18살 때까지 남들 다 인정할 정도로 지겹게 붙어 다녔고 이세진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면서 16살을 보낸 박문대는 18살 때는 반쯤 체념한 채 계절을 보냈다. 왜 이세진을 좋아하게 됐을까. 박문대의 첫사랑은 여자였다. 박문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고 첫 번째로 사귄 사람도 여자였다. 기껏해야 손잡고 돌아다니는 게 전부인, 그마저도 친구들이 놀리는 게 싫어 한 달 조용히 사귀고 헤어진 게 전부였지만 어쨌든 처음 좋아한 사람도 사귀었던 사람도 이세진과 성격도 얼굴도 성별도 정반대인 여자였는데 왜 이세진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열여섯, 이세진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며 보내는 동안 박문대는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왜 이세진이었을까. 활발해서? 다정해서? 정반대의 성격이라서? 박문대의 취향을 잘 알고 있어서? 흘러 뱉은 말도 기억해서? 박문대의 서툰 애정 표현을 바로바로 알아채서? 이야기 할 때 눈을 마주쳐서? 박문대한테만 유독 다정하게 대해서? 생각했던 것보다 이세진이 훨씬 더 다정하고, 잘생기고, 자주 웃고, 자주 머리를 만지고, 껴안고,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박문대를 올곧게 바라봐서? 줄줄이 이어지는 물음표들은 결국 마침표였다. 왜, 라고 생각한 것들은 결국 박문대가 이세진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나열한 것이었다. 이세진은 첫인상과 다르게 더 다정하고 잘생겼고 성격이 좋았으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면서 박문대에겐 조금 짓궂은 사람이었고 이야기 할때는 꼭 눈을 마주쳤으면서 그 눈에서 보이는 박문대를 향한 애정과 신뢰를 숨기지 않는 그런 사람이어서 박문대는 이세진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게 꼭 티가 난다던데, 이세진도 마찬가지였다. 이세진은 넘치도록 받은 사랑을 넘치도록 돌려줘서 사랑의 총량을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 넘치도록 돌려준 사랑은 점점 박문대에게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발등에서 찰랑이더니 곧 발목까지 차오르고 무릎을 삼키고 허리를 지나 이윽고 눈 깜빡할 사이에 풍덩, 사랑에 익사하게 만들었다.

박문대가 처음으로 사랑에 익사한 날은 특별한 게 하나 없었다. 여름방학 직전의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아이스크림 내기에서 우승 결승 골을 넣은 이세진이 영웅 취급을 받으며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있던 체육 시간에 박문대는 처음으로 사랑에 익사했다. 박문대는 체육시간 아이스크림 내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손이 부족해 잠깐 선생님에게 불려가 교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심부름을 했다. 분명 내기에 참여할 인원을 고르는 걸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이세진이 영웅 취급을 받으며 같이 뛴 놈들 사이에 껴있었다. 이미 에어컨 바람에 시원해진 몸으로 굳이 땀 냄새 풍기는 놈들 사이에 껴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벤치에 앉아있을 생각을 하며 천천히 벤치로 걸어가고 있었을 때, 귀신같이 고개를 돌린 이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세진은 아직도 골대 근처에서 땀내 나는 놈들한테 휩쓸리고 있었고 박문대는 겨우 중앙 문을 빠져나와 벤치로 가고 있어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이세진은 바로 박문대를 찾았다. 눈이 마주쳤고, 기다렸다는 듯 이세진이 웃었고, 의지없이 잡혀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뛰어와 박문대에게 말을 걸었다.

 

“문대야아 나 더워. 교무실 시원했어? 아이스크림 뭐 먹고 싶어? 내가 몰래 너가 좋아하는걸로 사다 줄게.”

 

박문대는 올곧게 달려오는 한여름을 피하지 못했다.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세진이 웃은 순간, 박문대는 그 무더위 속에서 익사했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부정이 바닥에 처박혀 박문대를 비웃었고 이세진의 말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이세진이 웃었고 말한 대로 박문대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와 내민 기억이 있어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피하지 못한 한여름의 열기에 박문대에겐 이른 열대야가 왔다. 새벽마다 잠이 들긴커녕 하루종일 이세진이 떨어트린 애정에 붉게 물든 뺨을 식혀야 했고 주말마다 자고가겠다는 이세진을 억지로 돌려놓아야 했다. 그래서 그해 여름을 박문대는 남들보다 훨씬 덥게 보내야 했다. 달려오는 한여름을 피하지 못한 죄로.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은 법이다. 첫 번째 익사 후 박문대는 자꾸자꾸 사랑에 몸을 던졌다. 이세진이랑 눈이 마주쳤을 때, 손이 스쳤을 때, 아무렇지 않게 어깨동무했을 때, 당연하게 뒤로 다가와 박문대를 껴안았을 때,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해 같은 침대에 누워 이야기했을 때, 결국 새벽에 몰래 나와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봤을 때, 밤바다를 같이 봤을 때, 첫눈이 온다고 전화했을 때, 얼굴 피부가 빨개질 때까지 눈사람을 만들고 놀았을 때, 박문대의 생일을 함께 보냈을 때 크리스마스를 보냈을 때 한 해의 마지막까지 붙어있고 한 해의 시작을 같이했을 때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십번 사랑에 빠지자 박문대는 이제 수면에 올라갈 생각을 그만뒀다. 끝까지 차오른 사랑 속에 숨죽여 있는 게 편했다. 이세진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 관계가 변할 리 없을 테니 굳이 수면을 박차고 올라갈 이유가 없었다. 사랑에 잠겨있으니 사랑이 익숙했고 익숙한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말처럼 반년 만에 박문대는 짝사랑이 익숙해졌다. 이제 이세진과 눈이 마주쳐도 어깨동무해도 장난스레 껴안아도 괜찮았다.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곤란했지만 그래도 같은 침대에 누워 얘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박문대는 사랑의 수면이 낮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영원한 건 없으니 언젠간 이 사랑도 말라갈 거라 믿고 싶었다. 이미 짝사랑이 익숙해진 열일곱은 별다를 게 없었다. 사랑을 부정하고 사랑에 익사 당했던 열여섯보다 열일곱이 박문대한테는 훨씬 쉬웠다. 남들은 아홉수가 있는데 나는 짝수에 약한가. 열넷에 이세진을 만나고 열여섯에 짝사랑을 시작했는데 열일곱은 쉬웠다. 평생 이렇게 쉬웠으면 좋겠다. 이 사랑이 계속 이렇게 잔잔해서 수면에서만 머무는, 더는 높아지지 않는 수위에서 머물면서 점점 말라가면 좋겠다고 박문대는 열일곱 생일에 빌었고, 열여덟, 이세진과 박문대는 또다시 같은 반이 됐다. 그 뒤로는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열일곱 때부터 이어진 사과 쪽지와 철벽 방송이 이어졌고 총 동아리 회의 시간의 명물은 새로 생겼고, 이세진과 박문대도 변함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친구였다. 여전히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했고 같은 학원에 다녔고 잠들기 직전까지 얼굴을 보고 살았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에 박문대는 사랑의 수위가 늘 같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스미는 만큼 천천히 올라간 수위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고등학교 시절 가장 재밌는 건 세 번째는 운동회, 두 번째는 축제, 첫 번째는 바로 수학여행이다. 청솔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장소는 제주도였다. 장소는 달라진 게 없지만, 여행지와 숙소는 작년과 많이 달라졌다. 급식 메뉴 개편 이후로 두 번째로 이루어낸 이세진의 쾌거였다. 그동안 이세진은 자주 밤을 새웠고 더 자주 교무실에 들락거리고 노트북에 꼭 붙어 계획안을 쓰고 보고서를 쓰고 피피티를 만들어 발표하며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보냈지만, 청솔고 2학년이 그걸 알게 될 일은 곧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것이었다. 이세진이 어떻게 이런 계획을 짜는지 알 게 뭔가. 그들은 즐기면 됐다. 설령 쾌거를 이룬 이세진이 수학여행 전날까지 밤을 새웠어도, 다크서클이 죽죽 내려오는 얼굴을 겨우 숨기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도, 그들은 신나게 수학여행을 즐기면 끝이었다. 이세진은 사적으로 학생회장의 권력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박문대에 관해서라면 종종 소소하게 권력을 사용했다. 지금처럼, 박문대의 비행기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일들에 말이다. 이세진은 박문대의 옆자리가 자신인 게 당연한 것처럼 굴었다. 수학여행 첫날 아침에도 곧 잠들 것처럼 멍한 눈을 하고 박문대의 버스 옆자리에 당당히 앉더니 아이패드에 잔뜩 담아온 공문들을 실핏줄 터진 눈으로 반쯤 읽다 박문대에게 빼앗기고 나서야 조곤조곤 수학여행에 대해 떠들었고, 비행기에 타기 직전까지 사람 좋게 웃으며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하더니 비행기에 타서는 피곤하다는 말도 없이 죽은 듯이 잠들었다. 이세진은 박문대를 꼭 창가 자리에 앉혔다. 너 풍경 보는 거 좋아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이세진의 말처럼 박문대는 창밖을 보는걸 좋아했지만 비행기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어깨에 기댄 이세진의 머리가 신경 쓰여서, 가까워진 귀가 눈치 없이 쿵쿵거리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까 봐, 혹시라도 가까이서 눈을 뜬 이세진이 달아오른 목덜미를 보게 될까 봐. 온 신경이 이세진이 기댄 어깨로 쏠렸다. 온 주변이 수학여행의 들뜸으로 시끄러운데 박문대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이세진의 미약한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제 심장소리만 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긴 한 시간 같기도 했고 가장 짧은 한 시간 같기도 했다. 박문대는 짝사랑에 이미 푹 잠겨 있었지만, 이세진의 예고 없는 스킨십들에 익숙했지만, 괜찮았지만, 여전히 무방비한 이세진 앞에서는 하나도 괜찮아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있는 이세진 앞에선 자꾸만 튀어나오는 사랑을 숨길 수가 없어서 곤란했다.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세진은 종종 선생님한테 불려갔는데 그럴 때마다 꼭 박문대의 손을 잡고 함께 갔다. 들어도 모를 내용들과 들어도 별 재미가 없는 얘기들을 선생님과 주고받는 이세진은 종종 손을 뻗어 박문대의 왼손 엄지손가락을 잡아 손톱을 만졌다. 꼭 엄지손가락만, 꼭 엄지손가락의 손톱만. 거기까지 선이라도 그어 놓은 것 처럼 매만졌다. 그럼 박문대는 태연한 척 핸드폰을 했다. 멀리 서 있는 친구들을 찍었고 예쁜 풍경을 찍었고 몰래, 이세진이 잡고 있는 손이나 이세진의 뒷모습을 찍었다. 몰래 찍은 사진은 금세 지웠다. 사진은 찍는 사람의 시선을 담는다는 말이 무서워서 박문대는 이세진이 뒤돌기 전에 찍은 사진을 삭제했다.

학생회가 매달려 신경 쓴 만큼 수학여행은 재미있었으나 이세진과 같은 방이라는 건 곤란했다. 이세진은 박문대를 늘 창가에 앉혔다. 잠자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6명이 모여자는 방에서 박문대의 이부자리만 베개까지 갖춰져 온전했다. 정작 이세진의 자리는 베개는커녕 덮고 자는 이불의 위치도 애매해 박문대의 이불 반쪽, 김민우의 이불 반쪽을 덮어야 이세진이 덮고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충혈된 눈인 이세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원숭이 같은 4명이 첫날이라는 들뜸에 신나있을 때 학생회 일 때문에 피곤하단 핑계를 대며 박문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와 늘어지게 하품했다.

 

“얼른 안자면 문대문대 잠 못 잔다. 너 모르지, 김민우 잠버릇 엄청 안 좋아. 나 김민우 옆자리라서 빨리 자야 해 이리와.”

 

너만 자면 되지 나는 왜. 그렇게 묻는 박문대의 눈을 읽었으면서도 이세진은 꿋꿋하게 박문대의 등을 밀어 기어코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불 끌게~. 나긋하게 말하는 말투가 반쯤 잠이 묻어있었다. 닫힌 문 아래로 불빛이 흘러 들어오고 문밖의 떠들썩함도 여전했는데 박문대는 옆에 누운 이세진의 뒤척임이 더 신경 쓰였다. 똑바로 누운 이세진은 오늘 재미있었냐는 시답잖은 질문과 몇 번의 한숨 그리고 하품을 하더니 천천히 잠에 들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지. 규칙적인 이세진의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박문대는 벽을 보고 누워있던 자세를 돌려 이세진을 쳐다봤다. 같이 누워 잠든 건 이년 만이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운데, 이세진의 잠든 얼굴은 조용했다. 너는 모르지 너 자는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킨 박문대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밤새도록 자는 얼굴을 훔쳐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박문대는 이세진과 마주 보고 있었다. 김민우의 잠버릇이 심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이세진은 거의 박문대와 붙어있었고, 애매한 이불은 없어진 지 오래였으며, 이세진 뒤로 보이는 풍경은 개판 오 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멀쩡한 곳은 박문대가 누워있던 자리뿐이었다. 어쩜 이렇게 잠버릇 안 좋은 놈들끼리 모였지. 속으로 혀를 찬 박문대가 일으켰던 몸을 다시 눕히고 이세진 위로 이불을 덮었다. 곧 알람이 울리겠지만 그 잠깐이라도 편하게 있으라는 의미였는데 이세진은 박문대가 이불을 덮어주자마자 멍하니 눈을 떠 입을 열었다.

 

“왜 깼어… 더 자…….”

“너나 더 자. 나는 잘 잤으니까”

너 잘 잤으면 난 됐어…

다시 눈을 감기 전 이세진이 중얼거렸다. 내가 잘 잔 거랑 너가 무슨 상관인데? 올라오는 물음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박문대의 갤러리 속 휴지통은 수학여행 내내 가장 바빴다. 박문대가 몰래 찍은 이세진 사진들로 가득 찬 휴지통을 박문대는 지우지도, 그렇다고 다시 사진을 복구하지도 못한 채 내버려뒀다. 차라리 대놓고 찍은 사진이 나았다. 같은 조끼리 한데 뭉쳐 찍은 사진은 가지고 있을 명분이라도 있으니까. 박문대는 사진찍기를 자처했다. 모여봐 내가 찍어줄게. 이세진 이름 다음으로 박문대가 수학여행 내내 가장 많이 외친 말이었다. 이세진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대강 애들을 끌어모으면 구석에라도 꼭 껴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박문대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그곳이 제 자리인 것처럼. 둘째 날은 바다에 갔다. 야~! 선생님이 너희 바다에 빠지면 사비로 택시 타게 할거래!! 선생님들의 으름장을 전한 이세진의 웃음소리가 청량했다. 박문대는 이세진이 대신 전달한 으름장을 무시하고 양말을 벗어 신발 속에 구겨 넣곤 바짓단을 둘둘 말아 바다로 걸어갔다. 발을 삼키는 물이 아직은 차가웠다. 발등 위로 물그림자가 너울거리고 뺨을 닿는 바람이 미적지근했다.

 

“우리 문대가 왜 갑자기 말을 안 듣지? 나랑 택시 타고 돌아 가고 싶은 거야?”

“어디 갔다왔어.”

“편의점. 너 발 닦아야지”

 

뒤늦게 나타나 자연스레 손에 든 신발을 가져간 이세진이 당연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발에 뭐 묻는 거 싫어하면서 왜 아무것도 없이 그냥 바다에 들어왔어?”

“너 있잖아.”

“문대문대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냐?”

 

박문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가 이렇게 챙겨주잖아… 파도 소리에 묻힐 만큼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너가 나빠 이세진. 누가 그런 걸 신경 써 저기 서 있는 놈들 봐봐 서로 빠트리려고 하는데 너는 왜 내 신발이나 들어주고 물이나 사 오는데. 파도도 숨겨주지 못할 뒷말은 삼켰다.

 

“우리 문대 바다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뿔이 나 있지?”

“이따 김민우랑 잘 생각하니까 심란해서. 네 친구들 잠버릇 왜 다 거지 같아?”

“너 친구기도 해 문대야.”

“김민우는 너랑 더 친하잖아. 걔가 제일 거지 같아”

“양진수도 잠버릇 나빠. 걘 너랑 더 친하잖아. 오늘 아침에 봤어? 왜 그러고 자고 있는 거야?”

“걔 이제 내 친구 아냐. 난 잠버릇 거지 같은 놈이랑 친구 안 한다고 전해. 그리고 가서 서봐 너도 사진 찍어줄게.”

“으응…싫어. 둘이 찍자 문대야~. 여기 보세요~”

 

이세진은 기어코 얼굴을 찌푸리지 않은 박문대의 사진을 찍고 버스에 탔다. 사진 더럽게 못 찍는다는 혹평을 들으며 수십장 찍어 딱 한 사진을 건져놓고는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바탕화면을 바꿨다. 좋아하는 바다에 와서 왜 자꾸 얼굴 찌푸려 문대야~ 그렇게 말하는 이세진은 실실 웃으며 박문대의 발을 씻겼다. 사실 박문대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이세진과 바다가 잘 어울려서 바다를 좋아하는 척했던 거지. 신발에 모래가 들어오는 것도 싫었고 젖은 발에 모래가 묻는 건 더 싫었다. 그걸 아는 이세진은 용케도 한적한 벤치에 박문대를 앉혀놓고 일 리터짜리 생수 탈탈 털어 박문대 발에 들이부었다. 박문대의 발은 휴지로 물기 하나 없이 닦아줬으면서 모래가 덕지덕지 붙은 자기 발은 허공에 한 번 털고 신발을 구겨 신은 채 버스로 돌아갔다. 자기도 어지간히 깔끔 떨면서. 날씨 좋으니까 이런 건 가는 길에 말라~. 그렇니까 박문대는 이세진의 이런 점이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이세진은 박문대의 옆자리에 아무도 눕히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이세진은 잠들기 전보다 가까웠고 박문대의 이부자리만 멀쩡했다. 이세진의 다크서클은 조금 더 내려와 있었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박문대는 이세진의 목소리 대신 이세진의 에어팟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어야 했다. 어깨에 닿아있는 머리가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박문대도 그 숨에 맞춰 숨을 쉬었다. 숨소리 하나라도 거슬리지 않길 바랐다. 수학여행 내내 이세진은 바빴다. 그래서 덩달아 박문대도 바빴다. 이세진은 자리를 비울 때 꼭 친구들 사이에 박문대를 끼워 넣고 가거나 아니면 꼭 손을 잡고 데려갔다. 아무런 직책도 가지지 않은 박문대가 학생회와 각 반 반장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세진이 데려왔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낮 동안 신출귀몰하게 움직인 이세진은 저녁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얌전히 잠에 들었다. 지금처럼. 박문대는 눈앞에 바짝 다가온 이세진의 얼굴을 보며 숨을 꾹 참았다. 박문대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누워도 쉽게 잠들 수 있는 강철 심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첫날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으나 둘째 날은 달랐다. 둘째 날 새벽에 눈을 뜬 박문대는 지금보다는 먼, 그러나 잠들었을 때보단 가까운 이세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밤잠을 조금 설쳤다. 눈을 감으면 이세진의 숨소리가 좀 더 선명했고 눈을 뜨면 이세진의 얌전히 감은 눈의 속눈썹이 길어 심란했다. 결국 둘째 날 박문대는 이세진을 등지고 누워 몸을 옹송그린 채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셋째 날도 어김없이 박문대는 눈을 떴다. 이세진은 잠들어있었고, 박문대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잠들어있는 이세진의 얼굴을 구경했다. 긴 속눈썹과 앙다문 입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이나, 키가 커 남들 보다 더 많이 삐져나온 다리 같은 것들. 분명 예전에는 똑바로 잔 것 같은데 왜 어제도 오늘도 박문대 쪽을 돌아보고 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버릇이 바뀐 건가… 속으로만 중얼거린 박문대가 감긴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슬쩍 손으로 만졌다. 어째서인지 잔뜩 찌푸려져 있는 미간도 한번 꾸욱 눌러보고, 삐져나온 손 옆에 손을 놓고 크기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 바보 같단 생각이 들어 또다시 이불을 덮고 몸을 옹송그렸다. 이불 밖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새어 나오질 않길 바랬다. 그리고 마지막 날, 4박 5일의 긴긴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 밤까지도, 박문대는 이세진의 잠 든 얼굴을 구경했다. 이세진은 잠들어 있으면 조금 더 고집스러운 얼굴이었다. 늘 싱글싱글 웃으며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무표정하게 내려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 다정한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 얼굴도 좋았다. 이세진의 잠든 얼굴은 오로지 박문대의 것이었으니까. 설령 이세진조차도 자신의 자는 얼굴은 본 적이 없을 테니 조금 고집스러워 보이는 잠든 얼굴은 오로지 타인인 박문대만이 볼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좋았다. 어쩌면 그 사실에 조금 취했을지도 모른다. 박문대는 언제나 잠든 이세진 앞에서는 튀어나오는 사랑을,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곤란했으니까. 잠깐의 고민, 약간의 망설임, 그리고 숨기지 못한 사랑과 설명할 수 없는 충돌이 모두 섞인 채, 박문대는 아주 조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숨을 참은 채 조심히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는 순간에 박문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숨은 한껏 참은 채로 차게 식은 손가락을 구부려 손바닥에 손톱을 찔러넣으면서도 제가 입을 맞추는 상대를 꼭 눈에 담고 싶었다. 아주 찰나의, 그러나 전혀 가볍지 못한 입맞춤을 하는 동안 박문대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이 끔찍한 기분 보단 이렇게라도 닿아서 좋다는 감정이 먼저 드는 게 서글펐다.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첫 키스가 이렇게 도둑 같은 키스라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상대방도 모르는 키스라니, 눈물샘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꾹 참은 박문대가 입술을 떼는 순간, 박문대는 새벽의 희뿌연 파랑과 마주쳤다. 입술을 마주치는 건 찰나였는데 이세진이 눈을 뜨는 순간은 영원 같았다. 박문대가 얇게 뱉던 숨이 목뒤로 넘어갔다. 생리적인 눈물이 결국 눈물샘을 비집고 나오고 그 순간 이세진은 박문대에게 물었다. 여전히 올곧은 눈으로.

 

“방금 뭐한 거야 문대야?”

 

잠에서 막 깨어난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주위 사람이 깰까 봐 한층 작아진 목소리가 거칠었다. 이세진의 눈에는 새벽의 파랑과 그리고 박문대가 담겨있었다. 현실감이 없는 와중에 잘못 삼킨 숨 때문에 아픈 목이 지금이 현실임을 알렸다. 이세진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다만 박문대가 대답하기 전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물고 있어서인지 그 얼굴이 자는 얼굴처럼 보였다. 왜 그런 얼굴이야. 차라리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얼굴이면 좋았을 텐데, 뭐 하는 짓이냐고 짜증을 내고 욕을 하면 마음이 편해졌을 텐데. 이세진의 눈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래서 박문대는 이세진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꿈이라고 생각해주라.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박문대는 이세진의 다정함에 기대 사랑을 부정했고

 

“……그래.”

 

이세진은 버려진 사랑을 캐묻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아, 때때로 다정이 가장 잔인했다. 박문대는 이세진의 감은 눈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고백도 하지 못하고 부정당한 사랑은 눈물도 나지 않았는데, 잠든 척하더니 슬쩍 이불을 덮어주는 손은 미워서 눈물이 났다.

 

 

 

꿈이라고 생각해달라는 말을 이세진은 착실하게 지켰다. 딱 일주일만 서먹하게 굴더니 그 뒤론 그날 있었던 일은 모두 날아간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박문대도 뻔뻔하게 생활했다. 여전히 같이 등교했고 여전히 같이 밥을 먹고 하교하고 학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이세진과 어깨동무를 했고 가끔 이세진이 손가락을 잡는 것도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겉이 멀쩡하다고 속까지 괜찮은 건 아니어서, 낮에 멀쩡한 만큼 새벽 내내 박문대는 고장이 났다. 이세진이 박문대를 피하는 일주일 동안 박문대는 저녁거리를 새벽에 일어나 죄다 토했다. 환자도 아닌데 미음을 먹었고 이세진과 겉으로 잘 지내는 동안에는 새벽마다 일어나 눈 밑이 쓸리도록 울었다. 일주일 정도 새벽마다 울었더니 눈물을 닦는 것도 귀찮아져서 그 뒤론 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울었다. 익사할 만큼 가득 차 있던 사랑이 드디어 몸을 빠져나가는 거란 생각하며 버텼다. 조금만 더 울면 나아지겠지, 멀쩡하겠지, 잠들 수 있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주일을 지냈고 그렇게 한 달을 허비한 다음에 인정해야 했다. 그 눈물은 사랑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고, 고백도 못한 채 부정당한 사랑이, 내가, 가엾어서 우는 거라고. 사실을 인정하고 박문대는 또 울었다. 인정한다고 해서 그칠 눈물이 있으면 이 세상에 우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다독이면서. 그렇게 또 삼일을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에 일어나 겨우 눈을 가라앉히고 등교한 박문대는 총 한 달 하고도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이세진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사는 걸 선택했다. 새벽에 일어나 울기는커녕 머리만 대면 쓰러지도록 밤을 새워 공부했고 방송부의 일도 필요 이상으로 떠맡았다. 짝사랑의 실패에 울긴커녕 잠이 부족해 쉬는 시간마다 쓰러져서 잠드는 게 일상인 채로 기말고사를 쳤고, 그 기말고사가 박문대 인생의 최고점수였다. 공부는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사랑은 아닌데. 꼬리표 끝에 프린트되어있는 전교 등수를 확인한 박문대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이제 정말 짝사랑을 끝내야 하는 걸 알았다. 적당한 시기에 수면 위로 빠져나와 사랑의 수위를 낮춰 바닥을 확인하고 햇볕에 잘 말려 한 톨 미련도 남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박문대가 고백을 했다면 조금 쉬웠을지도 모른다. 고백을 했다면, 여태껏 모아온 사랑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는 만큼 사랑이 빠져나가니까. 하지만 박문대의 사랑은 한 번도 밖을 보지 못했고 빠져나간 사랑도 없었다. 박문대만이 바닥에 내려가 일렁이는 사랑을 보며 속을 썩여야 했다.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여름 보충 수업이 시작됐다. 방학인데 왜 학교를 또 나오라 그러는 거야~ 같이 신청한 이세진의 볼멘소리 뒤로 아침부터 가열차게 우는 매미소리가 들렸다. 여름이다, 벌써 이세진의 생일이 곧이었다.

 

 

둘은 친구가 된 이래로 계속해서 서로의 생일을 챙겼다. 이세진은 가끔 짧은 손편지를 쓰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생일이 있는 달에는 싸우지 않아 지금까지 생일 선물을 챙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박문대가 이세진에게 키스했고 이세진은 그 사실을 묵인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사실 박문대는 여전히 짝사랑을 끝내지 못했으며 이세진이 그걸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니까. 애초에 이세진은 왜 그런 바보 같은 대답을 넘어가 준 거지? 선물을 찾느라 습관처럼 인터넷을 뒤지던 박문대가 울컥 올라온 짜증에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냥 그런 일로 친구를 잃긴 싫었나보지. 곧이어 나온 답에 한숨을 쉬며 화면을 켰지만 말이다. 이세진의 생일까지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보충수업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문대는 무언가를 끝내기엔 그날만큼 좋은 날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보충수업이 끝나면 학원도 여름휴가를 맞아 일주일 정도 진짜 방학이 있었고, 원래는 이세진과 놀러 가곤 했지만,… 이번에는 이세진을 피해야 했다. 미뤄둔 짝사랑을 정말 끝내야 했으니까. 삼 년 동안 쌓아온 사랑을 비워내야 했으니까.

이세진의 올해 생일선물은 시계였다. 아직 짝사랑을 끝내지 않았으니, 이번 생일은 친구가 아닌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는 선물로 준비하고 싶어 나름 모아온 돈을 써서 준비한 거였다. 보충수업의 마지막 날 교실 문 담당은 이세진이었다. 생일인데 운도 없지. 넌 평소에 운이 좋으면서 왜 오늘은 운이 안 좋아? 반쯤 진심을 섞어 가방을 챙기는 이세진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래도 내일부터 방학인 게 어디야. 아니었으면 생일에도 못 놀잖아. 대꾸하는 말투가 쾌활했다. 그래 그래도 오늘부터 방학이라 일찍 끝났지… 말꼬리를 흐리며 쳐다본 창밖은 해가 쨍했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애써 부는 바람도 뜨거워 더위를 식혀주지 못했다. 이세진은 이런 날에 태어났다. 한여름의 정의를 그대로 닮은 날에. 그것마저 어울렸고, 짝사랑을 끝내기엔 정말 맞지 않는 날이라서 그것도 웃겼다. 사실 지독하게 운이 없는 건 박문대였다. 이세진의 생일에 짝사랑을 끝낼 생각을 하다니. 앞으로의 생일에도 그 불쌍한 사랑이 계속 떠오를 텐데, 박문대의 발목을 잡을 텐데, 매년 울고 싶을 텐데. 아, 이 쨍한 햇볕 아래에서 박문대는 정말 울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이 너무너무 서글프고 가련하고 처참했다. 그래서 환하게 웃었다. 울고 싶은 만큼 활짝 웃었다. 오늘 하루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야 이세진. 생일 축하해.”

 

“선물? 고마워~. 편지도 있어?”

 

“내가 언제 편지 써준 적 있냐?”

 

“없지~. 근데 내가 매년 받고 싶어 해서 올해는~? 싶어서 물어본 거지. ……근데 나 사실 올해 받고 싶었던 거 따로 있었는데.”

 

“미리 말하던가, 환불해 와?”

 

“아니~, 그냥 문대가 내 소원 들어줬으면 해서 소원권 받고 싶었어.”

 

“뭐 빌고 싶었는데? 들어보고 해줄 수 있는 소원이면 해줄게.”

 

“…나 그날 일… 꿈으로 하기 싫었어.”

 

“…….”

 

“넌 모르지 내가 왜 급식 맛있게 한다고 했는지. 너 입 짧잖아. 맛없으면 몇 번 깨작거리고 말잖아. 너 그러는 거 싫어서 그랬어. 중학교 때도 맨날 조금만 먹었으니까. 수학여행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 너가 재밌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평생에 단 한 번 있는 수학여행이 너한테 좋은 기억으로 재밌게 남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매달려서 선생님들 설득했어.”

 

“…”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박문대는 성큼 다가오는 이세진을 보며 새벽의 희뿌연 파랑을 떠올렸다. 다가온 이세진의 눈에 아직 그날의 파랑이 담겨있어서, 한낮 햇볕이 내리쬐는 교실이 아니라 숨소리마저 숨겨야 했던 그날 새벽이 있어서. 이세진은 그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입술은 굳게 닫혀있고 눈은 다정하고 그 눈 속엔 새벽의 박문대가 있는 채로, 고개를 숙인 이세진이 박문대에게 키스했다. 그날과 똑같이, 박문대와 똑같이,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을 꾹 참고, 찰나의, 입술을 누르지도 못하는 키스를.

 

“난 이거 꿈으로 하기 싫어 문대야. 이게 내가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이야.”

 

이세진이 태어난 날은 정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더운 여름날이어서, 박문대는 그 여름을 닮은 이세진이 숨이 막혔다.

후기 다들 무더운 여름 잘 지내고 계신가요.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의 날씨는 아주 무덥습니다. 세진이 생일에도 이렇게 해가 쨍했으면 좋겠네요. 세진이의 생일을 알기 전에도 저는 여름을 참 좋아했어요. 사계절 전부 좋지만, 특히 여름의 짙은 초록과 푸른 바다, 해 질 녘에 부는 바람, 어슴푸레한 여름 새벽 같은 걸 좋아했습니다. 근데 세진이의 생일이 여름이라는 걸 알게 된 이유로 여름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여름은 모든 계절을 통틀어서 가장 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버티기는 힘들지만 가장 기다리게 되잖아요. 특히 여름에는 겨울 생각이 안 나는데, 겨울에는 여름이 너무너무 그리워지는 것 같아요. 이 낭만적인 계절에 태어난 세진이가 너무 좋습니다. 데못죽을 보고 계정을 판 것도 작년 여름이었는데 작년 합작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참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여름에 태어난 이세진을 너무 좋아해서 거의 모든 글에 여름생과 겨울생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는데 생일합작까지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다들 여름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이 바다를 떠올리실 것 같은데, 저도 사실 바다를 떠올렸답니다. 세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저는 요새 여름 하면 태양을 떠올립니다. 세진이는 분명 바다에도 어울리지만, 여름 한낮의 태양 아래도 너무 잘 어울리는 남자라서요. 세진이는 분명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남에 쾌남 성격인데 왜 숨 막히는 태양이 어울릴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아마 세진이가 가진 활기찬 에너지나 웃는 얼굴 같은 게 꼭 태양을 닮아서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한낮의 파랑도 그래서 정해진 제목입니다. 이세진 앞의 박문대가 참 한낮에 존재하는 새벽 같아서요. 글 속에서 박문대는 새벽의 힘을 빌려 세진이한테 입을 맞추고 숨겨온 사랑을 표현하잖아요. 그때의 새벽은 푸르고, 이세진은 한낮의 태양 같은 존재니까…. 그리고 이세진이 다시 사랑을 이야기할 때 박문대의 새벽이랑 똑같이 고백하는 부분도…, 한낮이 새벽을 불러오는 거니까…. 이 두 장면에서 제목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뜻이 잘 전해질까 걱정이 되네요…. 잘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합작 글 즐겁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비루한 말솜씨지만 세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ㅎㅎ. 다들 즐거운 세진이 생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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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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