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Instant L

공백 포함 32,888자

수은@_M3RCURY

수은.png

!! 좀비 아포칼립스 AU

  Instant

 박문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벌린 블라인드의 틈 너머 대낮의 거리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 적응해 있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화이트 밸런스가 다 날아간 사진처럼 뭉개져서 보이던 것들이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입간판, 모래알처럼 흩어진 유리 조각, 알 수 없는 자국이 번진 옷을 입고 기울어져 있는 마네킹…. 그리고 불쑥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

 눈이 마주치자 씩 웃은 남자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박문대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왼쪽, 오른쪽.”
 

 남자, 이세진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고개 끄덕여봐.”
 

 이번에는 꾸벅, 인사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이세진이 말했다.
 

 “문대문대, 세진이 팔 떨어지겠다~ 춤이라도 출까?”
 “…들어와.”

 

 박문대가 대강 바지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블라인드 한쪽에는 손가락 모양대로 자국이 남았다. 상자 반, 먼지 반의 작은 창고는 문짝만한 덩치로도 모자라 양 손에 짐을 가득 든 이세진이 들어오자 꽉 찬 느낌마저 들었다.
 

 박문대는 열린 문과 이세진 너머로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고깃덩어리와 뿌옇게 흐려진 눈을 한 채 그저 서 있을 뿐인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따지자면 이미 사람이 아니기는 했다.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되는, 그저 본능으로 움직이는 어떤… 존재. 서브컬쳐에서 좀비라고 불리는 것들. 박문대는 그것을 생명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어제도 본 이 현실감 없는 광경은 그야 당연히, 아무도 손대지 않았기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어제보다는 조금 벌레가 줄어들었나? 새까맣게 부패하고 있는 고깃덩어리의 뒤로는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관절이 뒤틀어진 사람을 닮은 것들이 서 있었다….
 

 “그만~”
 

 짐을 내려둔 이세진이 박문대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에 근처에 서 있던 좀비가 휙 몸을 틀어 달려들었다. 이세진이 익숙하게 문을 닫고, 잠갔다.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던 여름의 햇빛이 차단되고 순식간에 먼지 쌓인 어두운 창고로 돌아온 박문대가 어깨에 힘을 뺐다.
 

 쾅!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철문에 몸을 부딪치는 진동, 끼이익 손톱을 세워 긁어대는 소리.
박문대는 숨 쉬는 것도 조심하며 가만히 있었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고 보이는 것도 없으니 곧 돌아갈 테지만, 짐승처럼 손톱을 세우고 입을 벌린 그것은 아직 망막의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
 “…세진이가 오늘 가져온 거 볼래? 오늘 운 좋았다니까?”

 

 속으로 60을 셌을 무렵,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이세진이 작게 소곤거렸다. 이세진은 대답도 듣지 않고 박문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테이블 앞으로 데려갔다. 상자와 판자 등으로 만든 간이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불이 켜진 캠핑용 램프와 참치 캔, 비스킷, 사과즙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어, 괜찮네.”
 “그렇지? 마트까지 갔다 왔는데, 물은 이미 없더라고.”

 

 이세진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세진의 뒤에는 선물세트라도 털었는지 ○팸과 참치 캔이 주르륵 쌓여 있었다. 2주 정도는 저걸로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창고에 남은 생라면만 아껴 먹다 보니 고급 음식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생존을 위해 마트에 진열된 물건을 훔칠 수밖에 없고, 어떤 제재도 가해지지 않다니. 그런데 저걸 들고 어떻게 큰 소리 안 내고 여기까지 왔지.
 

 밖을 돌아다니는 그것들, ‘좀비’들은 정말로 장르 물에 나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한 악력과 예민한 청력보다 위협적인 것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강한 공격성과 빠른 전염이었고,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사람을 공격하는 좀비의 일그러진 얼굴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인사하고 대화하던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물리거나 할퀸 부위부터 살이 썩어가는 동안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일주일 정도 후에 완전히 이지를 잃고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을 한 몸에서는 악취가 났고, 흐리멍덩한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으며, 뻣뻣하게 굳은 혀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어느 한 군데가 절단되어도 달려드는 좀비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다행이라면 밝은 대낮에는 좀비의 시력이 나빠 공격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이세진에게 간단한 동작을 시킨 것도 그래서였다. 일단 감염이 진행되면 말이나 행동 어느 부분에서는 티가 났으니까.
 

 박문대는 아마도 한 달 전쯤, 이 사태가 일어난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퇴근길에 걸음을 서두르던 박문대의 앞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좀비에게 목을 물어 뜯겼다. 공포영화의 현실감 없는 연출처럼, 동맥에서 튄 피가 벽면을 수놓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이어진 비명이 귀를 찔렀다. 112, 아니 119?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쿵!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박은 것이다. 찌그러진 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감염자들로 도로가 점령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박문대는 불편한 정장 구두를 탓할 새도 없이 가까운 건물로 피신했다. 로비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 아이돌의 무대가 재생되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이 박문대를 보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리고 곧 옆에서 튀어나온 좀비에게 손을 물렸다. 누군가 게임 시작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건물 안에서도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었다. 박문대는 옥상과 연결되는 계단을 찾아 뛰었다….
 

 “문대문대?”
 “…어.”

 

 박문대는 어지러운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긴장 속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최근 이렇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지나가곤 했다. 건너편에 앉은 이세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어지러워?”
 “아니. …괜찮아.”
 “아니면, 문대 완전 감동했어?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나 풍족한 식량을 찾아온 이세진이…. 크, 이런 친구 또 없다?”

 

 이세진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박문대는 그냥 참치 캔을 따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로 사회성 좋게 구는 것도 처음에나 경계했지,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은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이세진. 처음 들어간 건물에서 박문대의 뒤통수를 덮치려던 좀비의 대가리를 후려쳐준 놈이었다. 박문대는 이세진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같이 움직이자는 동행 요구에는 별말 없이 응했다. 큰 키나 넓은 어깨, 적당한 근육이 붙은 몸만 봐도 동행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고, 이런 상황에서 남을 도와줄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니 행동력도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행한 지는 벌써 한 달쯤 된 것 같은데, 맛이 간 시간 감각으로는 정확한 날짜를 알기가 힘들었다. 핸드폰? 둘째 날에 좀비에게 정장 자켓을 던지고 도망치는 통에 잃어버렸다. 이세진의 것은 방전된 상태지만, 충전기를 찾으면 언제든 켤 수 있으니 동행하는 이유에 하나를 더 추가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같이 지낸 시간이 한 달인지 두 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박문대는 이세진이 감염자가 되면 가차 없이 버릴 예정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살갑게 굴지만 아마 이세진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뭐, 그래도 큰 문제가 없다면 외부와 연락이 닿을 때까지는 같이 다닐 테니….
 

 둘만 다니게 된 사연도 있지만 크게 중요하진 않다. 그냥 뻔한 재난물 클리셰랄까, 정치질에서 밀렸다. 타고난 사회성을 지닌 데다 피지컬까지 좋은 이세진과 사회에서 구를 대로 구른 직장인인 나도 쪽수에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
 

 …그나마 클리셰를 따른 게 정치질 정도라서 다행인가? 설마 이 사태의 원인이 어떤 비밀 조직의 인체 실험 때문이라거나, 트롤러가 멋대로 따라붙을 예정이라거나, 긴장으로 분비된 아드레날린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한다거나, 구출을 앞두고 희생을 강요당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게 없어도 충분히 버거운 현실이었다.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가, 태평하게 떠드는 이세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문대문대~ 안 먹을 거야?”
 “…….”
 “먹어야 힘내서 움직이지. 응? 우리 이틀 뒤에 이동하기로 했잖아~”

 

 박문대는 계속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는 이세진을 보다가, 입에 사과즙을 까서 물려주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얌전히 사과즙을 받은 이세진이 슬쩍 눈웃음을 쳤다. 이세진은 놀라울 정도로 박문대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살랑거렸다. 가증스러운 놈. 박문대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피식 웃어버렸다. 현실감이 없는 상황이라서 그런가, 그냥 웃음이 나왔다.

 “마트 쪽은 괜찮았어~ 그것들이 몰려 있는 건 오늘 반대쪽으로 조금 유인해 놨으니까 괜찮을 거야.”
 “어. 주민 센터는 전기 안 끊겼더라. 탈출하려다 차로 박았는지 게시판이 쓰러져 있어서 들어가진 못했지만 둘이 가면 치울 수 있을 거야.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주민 센터면 그래도 관공서인데 초반에 대피소로 쓰였던 곳 아니야?”

 

 이세진이 창고 구석에서 주워온 백팩에 식량을 차곡차곡 담으며 물었다. 박문대는 굴러 떨어진 초코바를 주워들어 백팩 앞쪽에 넣으며 말했다.
 

 “글쎄…. 바로 옆이 고등학교니까 그 쪽으로 몰렸을 수도 있고.”
 “…아~”

 

 그렇다면 전부 감염이 됐을 것이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동시에 떠오른 끔찍한 생각을 의식적으로 그만두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사흘 째 머무르고 있는 곳은 어떤 회사의 창고였다. 작은 가전제품과 케이블 등이 박스채로 널린 창고는 전기는 끊기고 먹고 마실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직원들이 두고 간 램프와 간식,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소파, 물이 나오는 화장실과 단단한 철문이 있었다.

 

 처음 만난 건물 옥상에서 구조를 요청했던 두 사람은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샌 후에야 구조대는 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새벽이 되자 거리를 울렸던 비명 소리는 잦아들었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구조대의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뭐, 마트에 갔다가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 쫓겨났다. 사실 박문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세진은 어디를 가나 사람을 다뤘을 것처럼 사회성이 좋았고, 체격 좋은 20대 남자는 극한 상황에서 필수적인 노동력이었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이세진한테 위협을 느낀 모양이지.’
 

 박문대는 묘하게 적대적으로 굴며 이동할 계획도 없고, 두 사람을 받아줄 수도 없다고 하던 무리의 리더 격 남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며칠씩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동했다. 대형 마트 밖은 주차장과 넓은 공터라 숨을 곳이 없었고,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지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근처 상가들은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처참했다. 하루를 쫄딱 굶고 먹을 것을 찾아 겨우 도착한 편의점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작은 체구의 좀비가 유니폼 조끼를 입은 채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매일 밤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하는 존재들을 피해 번갈아 가며 눈을 붙이고, 해가 뜨면 쉴 틈 없이 이동하며 겨우 찾은 은신처가 이 창고였다.
 

 ‘하지만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어.’
 

 운 좋게 비어있는 가정집이나, 자원이 풍부한 마트에 숨어 자원을 축내서는 계속 살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알아서 살 길을 찾느라 무단 침입이며 무전취식을 하고 있긴 하지만, 곧 정부에서도 구조를 시작할 테고 피해 복구도 시도할 것이다. 문제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동안은 전기나 가스가 아직 안 끊긴 곳에서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에는? 식량이 바닥나면 굶어 죽을 게 아닌 이상 밖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세진이 물건을 채운 백팩을 입구 옆에 내려놓으며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 주민 센터면 휴게실도 있을 거고~ 주민 대여용 공구 같은 것도 있을 거야! 전기가 안 끊겼으면 정수기나 라디오 같은 것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어. 전기는 확실히 안 끊겼다. 안에 불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통신은… 근방 인터넷이나 전화는 다 끊긴 것 같지만 라디오라면 뭐.”

 

 전기가 안 끊겼다면 캠핑 램프도 충전 가능하고, 이세진의 핸드폰을 충전해 날짜나 시간 정도는 확인 가능하리라.
 

 “…그러면 어디로 탈출해야 할지 알 수 있겠지.”
 “그래! 라디오 방송까지 조작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 그거.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 도착하기 이틀 전이었던가? 박문대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드론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주인을 잃고 멈춘 차량과 좀비들이 점령한 도로 위를 드론 하나만이 날아다녔다. 드론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차분하게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현재 구조작업을 직행중입니다. 생존자분들은 통신 복구를 기다리며 지정된 대피소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대피소에는 비상식량과 식수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가급적 밤에는 움직이지 마시고, 감염자가 있다면 격리한 채….”
 

 한 무리의 좀비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드론을 따라 움직였다. 그 뒤로 어딘가 숨어있던 일부 생존자들이 드론이 향한 방향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이 방송의 주체가 누군지 궁금했다.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구조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식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지 말자. 이세진이 먼저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동한 사람들의 옷차림을 기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창고 앞에서 사지에서 피를 흘린 채 배회하는 익숙한 옷차림의 좀비들을 발견했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냥, 그때 일 터지기 전에 모여 있던 팬들은 어떻게 됐을까 걱정이 됐다.
 

 ‘그만.’
 

 박문대는 생각을 다잡았다. 걱정해도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문대문대. 그럼 오늘은 눈 좀 붙여. 안색이 너무 안 좋다~”
 “됐다. 오늘 내 차례잖아.”

 

 창고의 창문은 블라인드를 쳤고 출입구도 철문이었지만, 반대쪽 출입구가 통유리로 된 문이었다. 둘은 좀비들이 시각으로도 활동하는 밤에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번갈아 가며 잠을 청했다.
 

 “나야말로 됐다~ 이러다가 내일 이동하다가 문대문대가 쓰러지면 세진이는 어쩌지요? 이대로 못 이기는 척 잠이나 자두는 게 세진이를 위한 일 아닐까?”
 “…….”

 

 이세진이 박문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박문대는 손을 펴서 감은 눈을 꾹 눌렀다.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까칠하게 일어난 입술의 질감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피곤에 절은 얼굴일 것이 뻔했다. 공시생 시절 끼니를 대충 때우고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던 때보다 더 꾀죄죄한 몰골이겠지. 이세진 저 놈은 어려서 그런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정도인데…. 박문대는 짧은 고민 끝에 배려를 받아들였다. 내일은 짐을 들고 엉망이 된 길을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했다.
 

 “고맙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세진이 씩 웃으며 무릎담요를 베개처럼 접어 내밀었다. 창고 근무자가 겨울에 쓰고 처박아둔 무릎담요 두어 장은 베개 겸 이불로 쓰이고 있었다.
 

 “…….”
 

 박문대는 그것을 받아들고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세진이 자신의 담요로 베개를 만들어준 덕에 박문대의 담요는 이불로 쓸 수 있었다. …이불은 없어도 베개는 있어야 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익숙하지 않은 배려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박문대의 턱을 타고 땀이 뚝 떨어졌다. 장우산을 무기대용으로 하나씩 들고 빵빵하게 채워진 백팩을 맨 채 땡볕 아래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좀비들의 활동이 더딘 시간도 긴 건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습하고 더운 게, 날이 아주 찜통이었다.
 

 “윽,”
 

 이세진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새의 사체를 보며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동물들은 좀비화 되지는 않았지만, 그저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이유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죽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벌레가 잔뜩 꼬여 있었다. 박문대는 고개를 돌렸다. 이 지경이 되어도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더운 날씨, 험한 길, 징그러운 벌레들보다 죽음과 한때 사람이었던 괴물들을 보는 것이 괴롭고 무서웠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예정대로 아침 일찍부터 주민 센터를 향해 걸었다. 일이 터지고 체감상 한 달쯤 되니 길을 걷는 ‘사람’은 이세진과 박문대 뿐이었다.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오래 걸어야 고작 40분 거리일 주민 센터는 시체와 오물, 엉망으로 충돌한 차량과 좀비들로 인해 두 시간 넘게 우회해 걸어야만 갈 수 있었다. 조금 위험해도 미리 길을 봐둔 건 옳은 선택이었다.
 

 “역시 미리 봐 두길 잘했다. 그치?”
 

 이세진이 옆에서 박문대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했다.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 생겨난 건지 모를 크레이터를 뛰어 넘었다. 이세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긴 다리로 성큼 건넜다.
 

 “…….”
 “그래도 문대, 맞는 운동화 구해서 다행이지~”
 “어, 고맙다.”
 “하하! 고마우면 다음에 밥이라도 살래?”
 “…그래.”

 

 다음이 있다면.
 박문대가 봐둔 골목길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좀비도, 사체도 없는 주택가의 골목길에 드리워진 것은 여름날 푸르게 물든 나뭇잎뿐이었다. 이세진은 힘들지도 않은지, 힘든 것을 잊으려는 건지 작게 소곤거리며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 뭐, 운동화를 구해다 준 건 고마운 일이 맞았다. 딱딱 울리는 정장 구두로는 좀비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발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적당히 남은 사이즈를 가져왔거나, 눈썰미가 좋은 놈인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섬세한 성격이긴 했다.
 

 “이 골목만 돌면 왼쪽에 고등학교, 오른쪽에 주민 센터다. …고등학교 앞에 뭐가 좀 있긴 했는데, 정문이 막혀있어서 심하진 않…!”
 

 갑자기 악취 덩어리가 골목 끝에서 튀어나왔다. X발. 박문대가 이를 악물고 우산을 가로로 들어올렸다. 짐승처럼 손톱을 세운 손을 간신히 막은 우산 위로 좀비가 대가리를 내민 채 이를, 아니 이빨을 딱딱거렸다.
 

 “박문대!”
 

 이세진이 놀라 소리쳤다. 다행히 좀비는 한 마리였지만, 가방을 맨 상태에서 빠르게 도망치기는 어려워 보였다. 박문대는 여기서 좀비의 하체를 발로 찼을 때 좀비가 일어나는 속도와 자신이 도망치는 속도를 가늠해보았다. 승산이 없었다. 잘못해서 긁히기라도 하면…. 
 

 “…!”
 

 그리고 눈앞에서 좀비의 관자놀이가 꿰뚫렸다. 박문대는 퍽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뒤늦게 인식했다. 오염된 피와 살점이 튀었다. 이세진이 좀비의 대가리에 쑤셔 넣은 우산이 썩어버린 두개골을 뚫고 나왔다. 프랑켄슈타인의 목에 박힌 볼트처럼, 좀비의 머리에는 장우산이 길게 꽂혔다. 좀비가 크게 휘청거렸다.
 

 박문대는 이세진을 돌아보았다. 이세진은 좀비를 잘 막아놓고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박문대는 이세진의 손을 잡아채 그대로 뛰었다. 땀에 젖은 손은 뜨겁고 미끄러웠지만 놓을 수 없었다. 우산이 뇌를 빗겨갔는지 좀비가 팔을 휘적거리며 둘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박문대는 숨이 턱 끝까지 찰 만큼 뛰었다. 이세진도 도중에 손을 꽉 맞잡은 채 아무 말 없이 뛰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주민 센터 앞을 막은 차량과 게시판이 쓰러져 있었다. 목적지였다. 급하게 건물 뒤로 돌아가자 확장 공사 중이라며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게 보였다. 박문대는 거칠게 문을 열고 이세진을 던지듯 밀어 넣었다. 뒤이어 몸을 숨긴 박문대가 문을 닫으며 본 것은, 반팔 교복을 입은 좀비가 대가리에 우산을 꽂은 채로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X발. 미끄러운 손이 손잡이 위를 헛돌았다. 간신히 문을 잠그자마자 철문에 좀비가 온몸으로 부딪히는 진동이 느껴졌다. 문을 부술 듯 흔드는 소리와 표면을 긁는 소리, 목 안으로 우는 기괴한 비명이 문 너머로 들려왔다. 쿵쾅거리며 문을 때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됐다. 못 들어오는 거야.
 

 “…하아, 하….”
 

 그제야 손을 놓고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자 이세진이 물어왔다.
 

 “…박문대. 괜, 찮아? 다친 건 아니지?”
 

 주저앉은 박문대의 시야에 이세진의 손이 들어왔다. 이세진은 손을 떨고 있었다. …그거 내가 할 말 아니냐?
 

 “…덕분에. 너는?”
 

 사실이었다.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공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방금 전 그 좀비가 입은 교복의 잔상이 끔찍했다. 고등학교 여름 교복. 어디를 봐도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목구비. 박문대도 처음에는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도망쳤었다. 그런데 이세진은 처음부터 그걸 했다. 나이도 어린놈이 처음 만났을 때도….
 

 “…….”
 

 왜 대답이 없지. 고개를 들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이세진이 서 있었다. 박문대는 순간 말을 잃었다. 왜 이런 표정을 지어.
 

 “…고맙다. 덕분에 하나도 안 다쳤어. 이세진 너는 어떤데.”
 

 박문대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이세진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물리진 않았고, 긁힌 곳도 없는 것 같았다.
 

 “응. 다행이다….”
 

 이세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박문대를 와락 끌어안았다.
 

 “…!”
 

 순식간에 이세진의 어깨에 코를 박게 된 박문대의 몸이 굳었다. 한 여름의 햇볕보다 더 뜨거운 체온과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이세진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알렸다.
 

 ‘…덥다.’
 

 박문대는 이세진을 밀어내려고 올렸던 손을 가만히 내려두었다. 그건 이세진이 강하게 포옹해서는 아니었고, 갑작스런 좀비와의 조우에 손을 떠는 것 같아서도 아니었다. 이건 그러니까, 그 울 것 같은 얼굴 때문이었다. 꼭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이어서….
 

 이세진은 박문대를 안은 채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좀비는 문이 닫힌 뒤로도 끈질기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눈으로 본 건 아니고…. 대가리에 꽂힌 장우산을 뽑지 못한 듯, 벽을 툭툭 때리는 소리가 나서 알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까지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사는 아직 진행되지 않은 듯, 특별할 것 없는 계단실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대신 실내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 게시판으로 막혀있던 1층 입구가 나왔다. 이세진이 긍정적인 말을 꺼냈다.
 

 “…게시판 안 치워도 되는 건 좋네~”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게시판 치우다가 좀비 만날 일은 없겠다.”
 

 이세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스러운 발걸음이긴 했지만, 들뜬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주민 센터 1층에는 박문대가 본 것처럼 아무도 없었다. 사람도, 좀비도 없고 텅 비어 있었다는 얘기다. 실내에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박문대도 안쪽을 살폈다. 불이 켜진 무인 민원발급기, 급한 대피가 있었는지 넘어진 화분, 아무렇게나 던져진 가방이며 책자, 끝이 찢겨나간 공모전 포스터…. 사람이 다치거나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박문대는 조금 안심한 채 시설을 확인했다. 에어컨, 정수기 이상 없음. 컴퓨터... 역시 통신은 안 됨.
 

 “문대문대, 여기 냉장고랑 전자렌지도 있다?”
 

 그 사이 화장실과 휴게실을 둘러본 이세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묘한 감동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박문대는 피식 웃었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
 

 방금 전, 이세진은 한참이나 박문대를 안고 서 있다가 어색하게 몸을 떨어트렸다. 여전히 힘이 들어간 손으로 박문대의 어깨를 밀어내고, 이세진이 아무것도 아닌 척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가, 결국 깊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미안. 좀… 실감이 안 나서. 또, 혼자 남을까 봐 무섭기도 했고…. 이제 진짜 괜찮아!”
 

 흠. 별로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20대니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무슨 실감… 아니, 아니다. 박문대는 얼굴에 튄 피를 슥 문질러 닦아내는 걸로 넘어갔다.
 

 “식탁도 있고, 접이식 침대도 있어. 라디오도 찾으면 있을 것 같지~ 아, 핸드폰은 충전 중.”
 “그래….”

 

 이세진이 박문대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목소리 좋네. 새삼 좀비를 의식한 것 같았지만, 박문대는 귀가 간지러워 조금 떨어진 채 누군가의 책상을 뒤적거렸다. 열심히 일한 흔적들로 가득한 책상 위에는 연예인 사진도 있었고, 간식 상자도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계속해서 본, 주인을 잃은 낯선 자리였다. 이 이상한 기분에는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천장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박문대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주민 센터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둘러본 것은 고작 1층.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멀쩡히 남아있는 지금은 이세진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장에서 삐그덕 소리를 들은 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입을 닫았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소름이 끼치는 것은 당연했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말없이 점점이 핏자국이 남은 계단을 올랐다. 혹시 모르니 대걸레 봉과 우산 등을 하나씩 들고.
 

 2층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문을 닫아 계단을 막았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잠글 수가 없어서 1층에서 구한 노끈으로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게 묶었다. 3층 또한 계단에 핏자국이 좀 있을 뿐 문을 막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으나, 4층은 얼핏 보이는 복도가 피바다였다. 살짝 열린 [회의실] 안쪽에서 비죽이 튀어나온 사람의 발목이 보였다.
 

 “…….”
 

 말을 잃은 이세진을 대신해 박문대가 문을 닫았다. 어쩐지 1층이 깨끗하다 했지. 다급한 나머지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4층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 어쩌면 피를 흘리며 계단을 오른 감염자와 같이 숨어있던 사람들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4층에는 좀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창문으로 나간 게 아니라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손잡이가 고장나있어 무인 민원발급기를 끌고 와 막았다. 엘리베이터는… 이동식 화이트보드와 서류로 가득한 박스를 가져와 막았다. 소리가 나는 것도 문제였지만, 안쪽이 어떨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1층 현관도 안쪽에서 잠그고, 휴게실과 화장실을 제외한 1층의 모든 불을 끄고 나니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1층 휴게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뻗어 있었다. 아니, 뻗은 건 박문대 뿐이었다. 이세진은 웃는 얼굴로 박문대의 옆에 앉아 늘어진 박문대의 팔을 콕, 찔러보기나 했다.
 

 “아~ 우리 문대, 체력 아껴야 하는데. 그치?”
 “조용히 해라….”

 

 잔뜩 움직이고 나니 땀이 줄줄 났다. 에어컨은 입구의 게시판을 쓰러트린 차량이 실외기도 박아서 돌아가질 않았다. 창문을 열 수도 없고…. 테이블에 눌린 뺨이 땀으로 끈적거렸다.
 

 뭐, 죽을 만큼 피곤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고 수확도 있었다. 박문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노끈을 찾으며 캐비닛 안에서 라디오를 발견한 것이다. 전파 수신이 잘 안 되는지, 주파수를 돌리자 치지직 소리가 났다. 몇 번을 더 넘기자 역시 좋지 않은 음질로 노래가 나왔다. …Love is all that I can give to you…. 몇 번을 더해도 잡히는 것은 올드 팝송 채널뿐이었다.
 

 “이상하지. 외국어만 나온다지만 진짜 외국 채널도 아닌데.”
 

 전파 방해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라디오 고장이나 신호 수신 불량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은 일부러 통신을 제어하는 걸지도 몰랐다. 통신만 해도 그랬다. 상처를 통한 감염 방식과 통신이 끊기는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감염자가 나오고, 시설 관리가 안 되어도 돌아는 간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인터넷이고 뭐고 안 되는 걸 보면 역시 정부 차원에서…. 박문대가 인상을 쓰든 말든, 이세진은 따뜻한 연기가 올라오는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뭐, 일단~ 고생했으니까 밥 먹고 기운 내세용~”
 

 전기포트로 데운 물, 전자렌지로 데운 즉석밥, 냉장고에 있던 반찬으로 차린 라면 한 상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김치와 계란까지 모두 이용한 모처럼의 만찬이었다. 라면 냄새가 끝내줬다. 후, 불어서 입에 넣으니 자극적이고 한때 질리게 먹었던 그 라면 맛이 맞는데 묘한 감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따뜻한 음식이지.
 

 “와아, 진짜 맛있다~ 누가 이렇게 라면을 맛있게 끓였을까~?”
 “…….”
 “접이식 침대랑 소파 있는 것도 감동이잖아. 크~ 고생 많았어, 문대문대!”

 

 이 타이밍에는 건배 짠, 해야 하는데. 박문대가 라면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이세진이 종알거렸다. 차 한 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지직거리는 올드 팝송을 배경으로 주민 센터 당직실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으면서 짠이라니. 무슨 고급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며 건배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개고생하면서 정이라도 든 건지….
 

 “해.”
 

 박문대는 두 개 놓인 500ml 생수병 중 하나를 들어 내밀었다. 이세진이 큭큭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수병을 부딪쳤다. 통, 작은 소리가 났다.
 

 “우리 나중에 진짜로 하자.”
 “…그러던가.”
 “아, 세진이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겠네?”

 

 이세진은 멋대로 떠들어댔다. 잘 아는 고깃집이 어쩌고, 새로 나온 맥주가 어쩌고. 말만 들으면 정말로 금방 구조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은 희망이 가득한 상황 같았다. 박문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내가 산다는 말은 안 했다.”
 “하하! 문대문대, 내가, 내가 살게!”

 

 진지한 대꾸에 이세진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생각은 박문대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무사히 살아남더라도 그 고깃집이며 맥주 공장이 정상 운영 중일 것 같지는 않다는, 서로 아는 뻔한 얘기를 하기엔 남이 끓여준 라면을 그냥 얻어먹고 있다는 사실이 걸려서 가볍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오늘도 안 되겠다.”
 

 박문대는 무서울 정도로 창문을 때리는 비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날이 덥더니 벌써 며칠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찜통에 습기가 더해지니 축축 늘어졌다. 이름 모를 공무원의 책상에서 가져온 미니 선풍기만이 희망이었다. 땀 흘리며 앞에서 맨손 스트레칭을 하던 이세진이 말했다.
 

 “장마인가 봐. 그때 이동하길 잘한 것 같네~”
 

 안전과 식량이 확보되자 이세진은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에너지를 아끼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비라도 안 오면 원래 계획대로 이동 루트라도 확보했을 텐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나갈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빗소리에 좀비들을 피해 다닐 수 있어서 두어 번 정찰을 나갔으나, 엉망이 된 길을 걷느라 체력 소모가 커서 그만두었다. 여름옷으로 버틸 날씨가 아니기도 했다.
 

 이세진과 박문대의 목적지는 봉쇄 구역의 끝이었다. 여기에 남아 좀비들을 피하며 남아있는 음식을 소모하고, 기껏해야 상추 정도나 심어진 텃밭을 가꾸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었다. 화성에서도 감자는 키우던데, 도시의 베란다나 주택가 텃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주식으로 삼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좀비 사태가 터진 그날, 시작은 분명 박문대가 인지한 거리에서의 감염이었다. 뒤이어 버스, 건물에서 차례대로 이어지긴 했지만 시작은 분명 그 근처였다. 정상적으로 정부가 기능한다면 원인과 해결 방안을 찾으며 일대를 봉쇄했을 것이고, 일개 회사원에 불과한 박문대도 깨달은 감염 메커니즘을 모를 리 없으니 근처에 격리시설을 두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을 터였다.
 

 …이게 지나치게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박문대도 알았다. 군데군데 끊긴 전기와 통신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고, 지나가면서 ‘사람’을 볼 수도 없었다. 사지가 뚫린 좀비들은 또 어떤가. 그건 여기 남은 사람이 공격했다기엔 지나치게 깔끔했다. 국가에서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했거나, 잠재적 감염자를 죽이는 것도 생각을….
 

 ‘…해서 뭐하겠냐.’
 

 박문대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마침 스트레칭을 끝낸 이세진이 눈이 마주치자 애교어린 낯으로 웃었다.
 

 “응? 세진이가 너무 멋있어서 새삼 반했어?”
 “…….”

 

 눈을 반짝이는 것이 꼭 기대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박문대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반응이 없자 이세진은 조금 웃더니 라디에이터에 널어둔 수건을 가지고 씻으러 들어갔다. 어딘지 익숙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아주 태평했다.
 

 박문대는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었다. 앞날 걱정은 의미 없고, 당장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세진과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세진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세진은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이려는 놈을 보고 억지로 기운 내려는 건가 했는데, 같이 있을수록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진심으로 이 상황에 긍정적인 듯한 느낌. 그런데… 제정신이 분명하다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미쳐야 좀비에게 도망쳐 하루 한 끼로 연명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거냐? 무엇보다 이세진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박문대와 얘기하지 않을 때만 보이는 공허한 눈. 지친 사람의 눈이었다.

 

 그냥, 서로 불편하지 않게 노력하는 것뿐인가? 이제 와서 이세진을 의심하고 거리를 두기엔, 두 사람은 지나치게 가까워진 감이 있었다. 이세진은 이상할 정도로 박문대를 잘 알았다. 박문대가 그어둔 보이지 않는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었다.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신경 쓰일 정도였다.
 

 베개는 필수, 라면에는 반숙…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필요할 때 말하지 않아도 딱 들어오는 행동 같은 것들. 꼭 박문대와 닮은 사고방식. 몇 년은 손발을 맞춰온 것처럼 구는 이세진.
 

 ‘이 새끼 설마 뒷조사라도 해놓고 우연인 척 날 이용하려는 건….’
 

 그럴 리가.
 자의식 과잉도 정도껏 해야지, 세상이 이 꼴이 났는데 겨우 직장인일 뿐인 박문대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러겠냐. 박문대는 민망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거기에는 윗옷을 벗은 이세진이 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이세진이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작위적인 꺅, 소리를 냈다.
 

 “문대문대, 변태~!”
 “…뭐하냐?”

 

 별로 어울릴 기분이 아니던 박문대의 답에 이세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아, 아니~ 샤워기를 놓쳐서 옷이 다 젖었거든.”
 “…….”

 

 박문대는 눈만 위아래로 굴렸다. 말대로, 이세진의 손에 들린 반팔 티셔츠가 젖어서 색이 짙어진 것이 보였다.
 

 “흠~ 잘생기고 몸도 좋은 세진이 보니까 새삼 떨려?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박문대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세진이 귀여운 척 몸을 배배 꼬았다. 확실히 극한으로 관리된 몸은 보기 좋았다. 넓은 어깨, 도드라진 쇄골, 너무 둔하지 않게 다져진 근육은 이세진의 직업이 아이돌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끔 했다.
 

 “…….”
 

 박문대는 순간적인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대가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깨질 듯한 느낌. 최근 들어 익숙하게 겪는 두통은 가만히 있으면 금세 사라지곤 했다.
 

 “아니, 진짜로~ 문대문대, 다 이해한다니까?”
 

 가까이 다가온 이세진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이세진의 덜 말린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앉아있는 박문대의 바지가 동그랗게 젖어들었다. 이세진이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응?”
 “…….”

 

 이번에도 두통은 금방 사라졌다.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온 세상이 빗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세진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더 시끄럽게 들리는 것 같았다.
 박문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나, 의자에 걸려있던 여분의 옷을 던져주었다.

 

 “옷이나 입어.”
 

 옷을 받아든 이세진이 “장난인데 너무 차갑다, 문대문대~”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살얼음 같은 긴장은 아무렇지 않게 깨졌고, 이세진도 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겨우 장난일 뿐이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며칠이 지났다. 장마는 장마인지,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주민 센터 입구의 계단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이대로는 비가 그치더라도 물이 빠지기 전까지 이동은 글렀다. 그리고 습했다. 해가 가려지면서 건물이 조금 시원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덥지 않은 건 아니어서 습하고 더운 상태가 지속됐다. 그래도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감염 부위부터 썩어드는 것을 생각하면, 물에 젖은 좀비들은 좀 더 빠르게 부패하리라. 이세진과 박문대는 꼼짝없이 주민 센터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2층에서 가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는 것만 빼면,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는 사흘이었다.
 

 이세진은 가끔 충전을 마친 핸드폰 카메라로 동영상을 촬영했다. 기록이라나. 가끔 아주 진지한 말투로 “우리는… 우리를 구할 것이다.” 같은 말도 했다. 뭐냐? 쳐다보고 있으면 그냥 웃었다.
 

 이세진의 핸드폰은 당연하지만 어떤 통신도 잡히지 않았다. 최소한 긴급대피문자 같은 거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한 통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지만, 어쨌든 통신이 되지 않는 핸드폰은 카메라, 녹음기, 시계 및 달력 정도로나 쓰이고 있었다.
사흘. 오늘은 주민 센터에 온 지 나흘째, 좀비 사태가 터진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물론, 이세진의 핸드폰이 오랫동안 꺼져 있어 날짜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박문대는 그동안 이세진에 대해 생각했다. 이세진이 수상할 정도로 박문대와 잘 맞는 것 말고도 이상한 점들은 더 있었다.
하루아침에 좀비가 튀어나오고 감염되거나 굶어야 하는 상황에서, 20대 중반이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나? 박문대는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야 부모님이 안 계신지 오래라 연락할 사람도 없었다지만, 이세진 저 놈은? 오히려 박문대가 초조함에 날카롭게 굴거나, 멍하게 있을 때마다 편하게 해주고 있었다. 스물아홉인 박문대도 견디기 힘든 불안감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처럼.

 

 그것 말고도….
 박문대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간이침대와 소파는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서, 두 사람은 작은 커피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잠을 잤다. 이틀 정도는 창고에서처럼 경계했으나 이후로는 편하게 자기로 합의했다. 매트가 눅눅한데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식량과 체력을 위해 잠들어야 하는 시간. 이세진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문대문대, 자?”
 “…아니.”
 “그럼 얘기 좀 하다 잘래?”

 

 쓸데없는 짓이다. 박문대는 이런 친목이 내키지 않았다. 난 무슨 일이 생기면 널 두고 갈 거다. 그러나 빗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소음도 없는 곳에서 이세진이 하는 말들은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져서….
 

 “…그러던가.”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세진은 박문대를 두고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이세진은 두 번이나 박문대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대체 왜.’
 

 이세진이 박문대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긴 다리가 소파 밑으로 삐죽 튀어나간 것이 보였다. 첫날부터 불편해 보여서 간이침대를 권했더니 이세진은 못 들은 척 “세진이는 소파가 좋더라~” 하고 말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합성 가죽으로 된 저렴한 소파는 쿠션감이라곤 없는 데다 피부가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달라붙어 쩌억 소리를 냈다. 소파가 좋다고? 그럴 거면 허리 두드리는 것은 안 보이는 곳에서나 하던가. 그런데 박문대가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 뒷정리를 할 때나 툭툭 두드리는 것이 일부러는 아닌 모양이었다. 
 

 “…문대문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뭔데.”
 

 데스크에서 공수한 독서등의 희미한 불빛에 이세진의 눈이 반짝였다. 이렇게 보면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세진이 박문대와 눈을 맞췄다. 보는 사람이 다 간지러운 열기를 띈 눈이었다. 이세진은 어딘가 민망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 문대문대는….”
 “…….”
 “그러니까 어딘가에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어.”
 “…….”


 갑자기 이세진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 상체 탈의를 하고도 웃던 놈이 이러니 의아하기만 했다.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뭐.
 

 노력의 결과물?
 그걸 알 방법이 있다면, 써보고 싶을 것 같냐.

 

 대화가 좀 이상하지만 어쩐지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과 함께 짧게 침묵이 흘렀다. 얼굴을 쓸어내린 이세진이 씩 웃었다.

 

 “아니, 아니야. 음~ 문대문대는 세진이한테 궁금한 거 없어?”
 

 김이 팍 샜다. 박문대는 자세를 고쳐 똑바로 누웠다.
 

 “없다.”
 “왜 없지? 이상하다. 세진이랑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셔야 하는데? 완전 데이트 아니야?”

 

 이세진이 아까와는 달리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문대문대랑 노래방에 가고 싶다, 집에 가면 갈비찜을 먹고 싶다…. 아무래도 영양가 있는 대화를 할 기회는 놓친 것 같았다.
 

 “아니면~ 혹시 문대문대, 요즘 이상한 거 본 건 없나? 허공에 글씨가 떠 있다거나?”
 

 대체 무슨 소린지.
 박문대는 이세진이 떠드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욱신거리는 머리를 베개에 푹 누른 채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상하지 않냐. 우리는 만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바깥에는 좀비가 들끓어서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르는데, 왜.
 왜 너는 나를 볼 때마다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은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냐?

 

 올드 팝송만 잡히던 라디오에서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주민 센터에 반쯤 갇힌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 오전에는 스트레칭을 한 후 주민 센터에 있는 책자나 물건을 뒤지며 무사히 생존할 방법을 찾고,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세진과 박문대의 일과였다. 그러는 동안 혹시 모르니 매일같이 라디오를 작은 소리로 켜놓고 있었는데….

 …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

  현재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진 곳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퍼진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우리 정부는 봉쇄 구역 서쪽에서부터 인명 구조와 시설 복구 중입니다.
 

 OO동 OOO 방송국 건물에 격리 구역을 마련했으니 구조를 희망하는 시민 여러분께서는 감염자를 피해 와주시기 바랍니다. 안전하고 확실한 구조를 위해 구조대원들은 격리 구역 밖에서 대기 중이며, 휴식 공간과 식사가 제공되는 2주의 격리 후 외부로의 구조가 진행됩니다.
 

 장마로 인해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위험하오니 밤에는 되도록 이동하지 마시고, 이 방송 외에 허가된 구조 안내 방송은 없으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감염자 및 감염 진행 중인 사람을 발견했을 경우 즉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다시 한 번 안내드립니다….

 “…….”
 “…문대문대는 어떻게 생각해?”

 

 방송은 세 번을 반복하고 끊겼다. 이세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박문대와 눈을 맞춰왔다. 박문대는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다.”
 “역시 그렇지? 국영 방송국 건물이라니까 시설 복구가 진짜일 가능성도 높아. 거기면 여기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이세진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시설 복구가 아니라 통제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복구된 척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것을.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행히 주민 센터에 있으면서 만든 이동 루트에 방송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리는 지하철로 한 정거장 정도.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 거기까지 알아서 오라는 무책임함도 진짜 같다.”
 “아~ 그것도 그렇네. …그래도 먹을 거 다 떨어지기 전에는 구조 안내를 듣는구나~”

 

 이세진이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났다. 아닌 게 아니라, 입이 두 개다 보니 식량을 안 걱정할 수가 없었다. 가방에 챙겨온 것과 주민 센터에 있던 것들은 아직 남아있었으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에 최대한 아껴 하루 한 끼로 합의한 후였다.
 

 “…아니어도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비도 슬슬 그칠 것 같고.”

 

 커튼을 들춰 밖을 확인한 이세진이 웃었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상쾌한 웃음이었다. 그 작은 틈으로 햇빛이 비치는 것이 눈부셨다. 박문대는 괜히 가방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도로 물 좀 빠지면 이동하자.”

 “으, 장난 아니네….”
 

 이세진이 질색하든 말든 박문대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바짓단이 축축해진 느낌이 아주 X같았지만, 오랜만에 햇볕을 쬐며 바깥 공기를 쐬는 것 만큼은 좋았다. 밖에 나오니 바람이 불어 시원한 것도 있고, 오랜만에 느끼는 건조함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도로는 일주일간 몰아친 비 때문에 엉망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자 무성하게 자라 길을 침범한 식물이며, 물길을 내지 않아 아직 웅덩이가 그대로 남은 도로며…. 다행인 것은 좀비들도 어딘가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두 사람은 빈 차량 사이를 주시하며 난장판이 된 인도를 피해 물이 빠진 4차선 도로를 걸었다. 큰 도로를 따라 직진하기만 하면 방송국이 나올 것이다. 도시 모형처럼 살아있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는 운전석을 비운 차들이 아무렇게나 서 있었다. 열린 트렁크, 깨진 창문, 시트에 말라붙은 핏자국…. 차에 내려앉은 먼지와 흙탕물 자국이 지나간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버스 등 차량에 붙은 배너에 적힌 날짜가 신기했다. 박문대는 군데군데 찢어진 광고를 읽었다.…STAR 콘서트,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사전 …이벤트 8월 25일까지. 박문대는 대형 버스의 좌석에 웅크리고 있는 머리가 없는 시체에서 힘겹게 눈을 돌리며 가방을 고쳐 맸다. 챙겨온 가방에는 얼마 안 남은 먹을 것과 램프, 충전용 케이블, 라디오 등이 있었다. 오늘 격리 구역에 들어가면 필요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긴 것들이었다.
 

 고개를 들자 멀리서 커다란 방송국 건물이 보였다. 박문대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내 위기감 없어 보이는 이 놈도 이 상황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게 있겠지.
 

 “너는 구조되면 뭐부터 할 거냐?”
 

 그러자 이세진이 뺨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뭐야?
 

 “문대문대, 너는 무슨… 그런 말을 가방 정리하면서 하고 그래~….”
 

 뺨을 감싼 손이 솥뚜껑 같았다. 박문대는 자신도 모르게 이세진의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섹시하다 따위의 헛소리를 한 건지 잠시 고민했다. 아닌데?
 

 “무슨 헛소리야….”
 “아니이, 그렇잖아? 일정을 묻는다는 건 역시, 데이트 신청이 아닌가 하고….”
 “……됐다.”
 “아니, 아니. 잠깐만! 드디어 문대문대가 세진이에 대해 궁금해 한 거라 너무 기뻐서!”

 

 서먹한 표정을 지은 박문대에게 이세진이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처음이잖아? 하고. 그랬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박문대는 이세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음, 여기서 나가게 된 후에는 역시, 문대문대와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네~”
 “…생일이 언젠데.”
 “8월 1일?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해야겠다. 문대문대가 또 잊어버리지 않게. 8월의 첫 날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어쩌고 나냐. 그리고 언제는 말했던 것처럼 얘기하네. 그러나 박문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되면 못해줄 것도 없지. 그런데 8월 1일이면 지나지 않았냐.”
 

 8월 1일은 좀비 바이러스가 터진 그 날이었다. 운도 없지. 박문대는 이세진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지금이야 마트에서 얻은 여분의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지만, 처음 만난 날의 이세진은 어디 약속이라도 있는 듯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것이 생각났다. 생일파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때 만나려던 사람들은 아마…. 박문대는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생일 축하한다, 이세진.”
 “…아.”

 

 옆에서 걷던 이세진이 멈춰 섰다. 두어 걸음 앞선 자리에서 박문대는 뒤돌아보았다. 왜. 눈이 마주치자 이세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아니…. 오늘도 아닌데 갑자기?”
 “너 오늘 며칠인지 아냐?”
 “핸드폰 보면….”
 “9월 며칠이겠지. 너 원래 9월에 하려던 일 기억하냐? 8월 2일에 하려던 일은?”
 “…….”
 “8월 1일 아직 안 끝났다고 해.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

 

 어울리지도 않게 위로를 해버렸다. 박문대는 멋쩍은 기분에 괜히 뒷목을 주물렀다. 됐다. 말로만 하는 축하, 못해줄 것도 없고. 이세진은 그 말을 듣더니 과장되게 흑흑 우는 소리를 내며 눈을 비볐다.
 

 “…너무 감동적이야!”
 

 박문대의 세계가 순간 비틀거렸다. 잔뜩 퍼부은 비 때문에 싱크홀이라도 발생한 건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자 금간 곳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박문대!”
 

 박문대는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또다시 찾아온 극심한 두통에 다리가 꺾였다. 한걸음에 달려온 이세진이 주저앉은 박문대를 살폈다. 뜨거운 손이 박문대의 팔을 잡았다.
 

 “…안 되겠다. 가방, 가방 주고 업혀.”
 

 좀비가 쫓아와도, 주민 센터에 갇혀 한 끼만 먹을 때도 여유롭기만 하던 이세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이 더 무거운 가방을 지고도 박문대의 가방을 빼앗듯 가져갔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박문대는 부축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을 등진 이세진의 등 뒤로 검은 SUV가 보였다. 짙게 선팅된 앞 유리, 펼쳐진 사이드미러, 반쯤 열린 조수석 문 안에서 온몸의 피부가 괴사한 좀비가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세상을 -2배속으로 재생한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좀비가 튀어나왔고, 이세진의 목덜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이세진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도 못하고 박문대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어쨌든, 같이 지낸 시간이 한 달인지 두 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박문대는 이세진이 감염자가 되면 가차 없이 버릴 예정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살갑게 굴지만 아마 이세진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구출을 앞두고 희생을 강요당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난 무슨 일이 생기면 널 두고 갈 거다.
 -문대문대!

 

 주민 센터 앞에서 우산으로 자신을 구하던 이세진, 잠든 박문대에게 하나뿐인 이불을 덮어주는 이세진. 이상할 정도로 박문대의 안전에 예민한 이세진. 나가면 박문대와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던 이세진. 그리고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한 이세진.
 

 X발.
 나는 왜 너를 두고 갈 수가 없는 건데.

 

 박문대는 이를 악물고 이세진을 밀쳐냈다. 나중에 꼭 시작도 안 했는데 멋대로 실연당한 얼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크게 뜨인 눈과 시선이 마주쳤으나 자세히 볼 시간은 없었다. 이세진이 중심을 잃고 손으로 바닥을 짚는 게 보였다. 박문대는 이세진의 목이 있던 부근의 허공에 팔을 뻗었다.
 

 콰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박문대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리한 각도로 힘을 준 손목이 시큰거렸다. 좀비는 박문대가 던진 가방에 이를 박고 까득거리며 천을 헤집고 있었다. 이세진이 얼빠진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움직여.’
 

 박문대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들어 이세진에게로 다가갔다. 이세진이 튕겨나듯 벌떡 일어났다. 박문대는 머리의 통증도 잊은 채 좀비가 있는 쪽을 뒤돌아보며 이세진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 들어온 것이 이세진의 목덜미가 아니라 가방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좀비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가방을 내팽개친 좀비가 무서운 속도로 두 사람을 쫓아왔다. 좀비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박문대의 등을 스쳤다.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구석에 숨어 있던 좀비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좀비 대여섯을 달고 한참을 달리자 눈앞에 실험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조형물이 들어왔다. 방송국 입구였다. 1층 전체가 유리로 된 건물. 보자마자 여기를 격리 구역으로 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잘 조성된 공원을 짓밟고 내달린 이세진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쪽문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텅, 소리가 나며 열리지 않았다. 지켜보던 박문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X발! 그제야 메인 게이트 외에는 막아뒀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세진이 박문대의 손을 잡아끌었다. 박문대는 벅찬 숨을 참으며 이끄는 대로 달려갔다. 쉬지 못하고 달려서인지 발이 꼬였지만 이세진은 박문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까 좀비에게 공격당한 등이 신경 쓰였다. 피부가 긁혔던가? 간발의 차로 피한 것 같기는 한데….

 

 “…세진, 이세진! 찢어지자.”
 “…….”
 “나 아까 긁힌 것, 같으니까, 하아, 나 두고 가라고.”

 

 감염도 감염이지만, 박문대는 더 못 뛸 것 같았다. 벌써 몇 분째 전력 질주인지, 박문대는 폐가 찢어질 것 같아 더 말도 못 했다. 좀비 하나를 따돌리면 다른 곳에서 다른 좀비가 튀어나와 두 사람을 쫓았다. …비효율적이야. 한 사람이 주의를 끌고 다른 곳에 숨는 게 훨씬 나았다. 이세진은 못 들은 척 땀에 젖어 미끄러운 손에 아예 힘주어 깍지를 낀 채, 말없이 산책로 사이 구석진 곳으로 달렸다. 한 달 사이 무성해진 풀들이 다리를 간질였다.
 

 방송국 건물은 두 채로 나뉘어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자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세진은 망설임 없이 직원용 출입문을 찾았다. 본관의 두어 군데 닫혀있는 문을 지나, 별관의 뒷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쉽게 열렸다. 코너에서 좀비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흐리멍덩한 눈과 마주한 순간,
 

 “…!”
 

 이세진이 박문대를 먼저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방송 포스터가 몇 장 붙어 있는 불투명한 유리문이 닫히며 크게 흔들렸다. 이세진이 위쪽 잠금을 돌리고 옆에 있던 뭔지 모를 박스 더미를 밀어 문을 막았다. 바로 앞에서 문이 닫힌 좀비가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문을 타고 울렸다.
 

 박문대는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쉬지도 못하고 달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났다. 이번만큼은 이세진도 마찬가지인 듯, 박문대에게 다가온 가슴팍이 거세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너,”
 

 위험하니까 비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박문대는 이세진에게 안겨졌다. 이세진의 가슴팍에 맞닿은 뺨으로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손이 어깨와 등을 간절하게 더듬었다.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다행히 긁히진 않은 모양이었다. 박문대의 머리 위에서 축축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고 가라는 말은, 하지 마….”
 “…….”
 “이번에는….”
 “…….”

 

 이세진이 답지 않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갈비뼈가 아플 정도로 꽉 안긴 박문대가 한숨을 삼켰다. 등, 확인해야 하는데. 안 긁힌 걸까? 다행히 화끈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이세진의 팔 사이로 건물 내부가 보였다. 접근금지 라인, 흰 천막이 복도 끝에 설치된 게 얼핏 보였다.
 

 박문대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다리 사이에 무릎으로 선 이세진을 마주 안았다. 손을 등에 두르기만 했을 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좀비가 문을 두들겨대는 소리보다 온 몸을 울리는 심장 박동이 더 크게 들렸다.
 

 “…미안하다.”
 “…….”

 

 박문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세진에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해야 해. …뭘? 박문대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리하게 달려서 얼굴에 열이 오른 게 느껴졌다.
 

 이세진이 양손으로 박문대의 뺨을 쥐고 눈을 맞춰왔다. 달아오른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꼭 눈물처럼 보일 만큼,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세진이 울음을 삼키느라 붉어진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이세진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진 박문대가 입을 뗐다.
 

 “…어디 안 간다. 생일 축하해 주기로 했잖아.”
 “…….”

 

 박문대가 속으로 당황하는 사이, 이세진이 표정 없는 얼굴로 박문대와 눈을 맞추다가 눈을 접어 웃었다.
 

 “…응. 근데~ 선물은 없어?”
 

 떨리는 목소리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어조를 띄고 있었다. 박문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움직였다. 입술이 숨을 한 번 나누는 정도의 짧은 접촉을 하고 떨어졌다. 이세진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이 보였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가닥가닥 뭉친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지금은 이것 밖에 없는데…. 내년에도 축하해 줄게.”
 

 내년에는 그때처럼 갈비찜도 해 줄 수 있을 거야, 같은 막연한 희망은 속으로 삼켰다. 한참을 뛰어서인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문대는 내색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입술에 또 다시 온기가 내려앉았다. 짠 맛이 나고, 축축했다.
 

 박문대는 지금 당장 이세진이 바라는 만큼의 마음을 줄 자신은 없었다. 애초에 만난 지 한 달밖에 안 됐고, 이세진에게는 박문대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긴장으로 분비된 아드레날린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한 건지도 몰랐다. 이 감정이 진짜가 맞나? 순간의 착각이 아닌가? 이렇게 단기간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럼에도….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박문대는 큰세진을 힘껏 끌어안았다.

 

 


in·stant
1. 즉각[즉시]의
2. 긴급한, 절박한(urgent)
3. 인스턴트의, 즉석 (요리용)의; 즉제[속성]의

  Love

 

 이세진은 8월 1일을 기억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도중 부딪힌 방송국 직원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스태프인지, 멤버인지 모를 누군가가 그를 부축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그가 입을 열었다.

 

 꺽, 끄억, 으으으….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소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119를 부르는 소란 속에 이세진은 습관처럼 박문대를 확인했다. 박문대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을 뿐, 옆에 서 있었다. 이세진은 어쩐지 안심한 채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숨 쉬기가 힘든지 자신을 받쳐준 스태프의 팔뚝에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일단 옆으로 눕혀서 기도를 확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세진이 최근 찾아봤던 응급처치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그것’은 스태프의 목을 물어뜯었다.
 

 “…….”
 

 이세진은 눈을 깜빡였다. 분장용 물감과는 확연히 다른 점도를 띈 붉은 액체, 핏방울이 얼굴을 뒤덮었다. 뒤늦게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불쌍한 스태프의 목을 너덜너덜하게 씹고는,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해자였던 스태프가 기이한 각도로 목을 꺾은 채 일어나 다른 사람을 물어뜯었다. 전염이었다.
 

 이세진은 거기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외쳤다.
 

 “대기실, 일단 올라가…!”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문대가 없었다. 이세진은 자리에 우뚝 섰다.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느라 바쁜 와중에, 이세진만이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었다, 박문대가.
 

 이번에도.
 

 가만히 서 있는 이세진을 멤버들 중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대기실에 들어앉혔다. 매니저가 무슨 바이러스니 뭐니 말하더니 일단 나가지 말고 있으라며 문을 닫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박문대는 핸드폰 연락도 받지 않았다. 이세진은 초조함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
 

 대기실 바로 앞 계단에 익숙한 자켓이 걸쳐져 있었다. 무대 의상. 이세진은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 속에서 표정 없는 얼굴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건물 붕괴의 그 날처럼 자신을 노린 거라는 생각에 멤버들을 피한 게 분명한 박문대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계단 아래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죽은 듯이, 숨도 쉬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이세진은 눈을 떴다.
 이상하게 눈물로 축축한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테스타의 숙소, 침대 위. 이세진은 충전중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8월 1일 0시 15분
 8월 1일 0시 16분….

 

 이세진이 보는 앞에서 분 단위 숫자가 바뀌었다. 이세진은 벌떡 일어나 문을 부술 듯 열고 박문대를 찾았다.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던 김래빈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았지만, 해명도 사과도 할 여유가 없었다.
 

 “박문대!”
 “…살살 좀 다녀라!”
 

 박문대는 거기 있었다. 막 잠에 들려했던 박문대에게 등짝을 얻어맞았지만, 이세진은 웃었다. 아, 실감나는 꿈이었다. 이세진은 할 말이 있다는 핑계로 자신의 독방으로 박문대를 데려왔다.
 

 “문대문대, 그래도 세진이 생일인데….”
 “뭐.”

 

 생일 축하 파티는 오늘 공연 끝난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생일에 꾸기엔 좀 악질적인 꿈이었다.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박문대가 눈앞에서 죽은 듯 누워있는 꿈이라니.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세진은 모르는 척 박문대의 팔을 껴안고 어깨에 뺨을 꾹 눌렀다. 다행히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 일들이 있다. 연습 도중 박문대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가 유치하게 전력질주를 했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나….
 

 -그러다 30대에 돌연사하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박문대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했던 일 같은, 깊게 박힌 가시 같은 순간의 기억들. 그런 기억들은 흐려지지 않고 잠시 가라앉았다가 방심한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박문대.

 

 “…저녁에, 파티 끝나면 잠깐 나가자.”
 “…어?”
 “생일 축하한다, 이세진.”

 

 둘이 축하하자고. 박문대가 이세진의 머리 위에 고개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 맞닿은 몸에서 익숙한 바디 워시 향기가 났다. 안온함이 온 몸을 감쌌다. 어떤 이상한 징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8월 1일, 이세진의 생일이었고, 여기는 테스타의 숙소였다. 옆에는 살아 움직이는 박문대가 있었고, 오늘 저녁 공연이 끝나면 모두와 생일 파티를 하고, 둘만 빠져나와 박문대에게 축하받을 예정이었다.
 

 왜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그걸 진짜라고 믿은 거지? 이게 바로 너무 행복해서 무섭다는 그런 건가? 
 

 “…응. 근데~ 선물은 없어?”
 

 박문대가 이세진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이게 끝? 하고 일어나자 피식 웃더니 눈가, 코끝, 뺨, 그리고 입술에 차례대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쪽 소리가 나는 가벼운 키스 후, 이세진은 박문대의 손을 깍지 낀 채 그 손등에도 입술을 눌렀다. 그 날은 그대로 박문대의 손을 잡은 채 잠을 청했다. 잠이 안 와서 이세진은 몇 번이고 박문대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가슴팍에 귀를 대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야하는데, 어쩐지 잠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세진은 억지로 눈을 붙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또 다시 멸망했다.

 

 

 

 

 

 

 

 


 


 이세진은 눈을 떴다.
 이상하게 눈물로 축축한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테스타의 숙소, 침대 위. 이세진은 충전중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8월 1일 0시 15분
 8월 1일 0시 16분….

 

 이세진이 보는 앞에서 분 단위 숫자가 바뀌었다. 데자뷰라기엔 너무나 선명한 기억. 이세진은 벌떡 일어나 문을 부술 듯 열고 박문대를 찾았다.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던 김래빈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았지만, 역시 해명도 사과도 할 여유가 없었다.
 

 “박문대!”
 “…살살 좀 다녀라!”

 

 박문대는 이번에도 거기 있었다. 막 잠에 들려했던 박문대에게 등짝을 얻어맞았지만, 이번에는 이세진은 웃을 수 없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세진은 주저하며 박문대를 자신의 독방으로 데려온 뒤 그간의 얘기를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일들.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박문대는 믿어줄 것이고, 그러면 이번에는 살 수 있겠지 생각하니 다행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세진은 새삼 박문대가 자신의 사정을 얘기할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때가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박문대는 믿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멤버들에게 공유하고, 대기실로 향하는 도중 마주친 그 이상한 좀비를 피하고, 밖으로 대피하는 것까지도 성공했다.

 

 그날 저녁, 뉴스는 좀비 바이러스에 대해 서울에 나타난 정체 모를 무장 테러 단체에 대해 보도했다. 해당 지역은 정부 차원에서 안전을 위해 봉쇄중이라는 말과 함께. 동시에 SNS에 퍼진 영상은 족족 삭제됐다. 입막음이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완벽한 정보 차단은 어려웠고, 스태프들 중 몇 명이 감염되기 시작했다. 좀비들은 완전히 변이되기 전까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사람을 공격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일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살았다. 둘을 포함한 일행의 피지컬은 나쁘지 않았고, 미리 대비한 덕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세진은 초조해졌다. 박문대가 초조해 보였기 때문에.
 

 박문대는 이세진의 말을 믿었다.
 믿었지만, 박문대는 기어코 뛰쳐나갔다. 아마도. 마지막은 기억에 없었다. 남은 것은 박문대가 없는 방 안을 확인하는 기억뿐이었다.


 


 이세진은 눈을 떴다.
 8월 1일 오전 8시였다.

 박문대는 숙소에 없었다. 멤버들도 모두 각자의 스케줄로 나간 상황에서 이세진은 박문대를 찾았다. 이세진이 박문대를 찾은 곳은 소속사 건물 근처였다. 아직 늦지 않았어. 이세진은 섣불리 안심했다.
 

 “박문대!”
 

 박문대는 돌아보지 않았다. 앞서 나가서 저지하자 그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누구세요?”
 “…문대문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아니, 잠깐만, 문대문대~ 우리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제 이름은 류건우인데요.”
 

 박문대의 얼굴을 한 류건우가 거기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류건우는 박문대로 돌아왔다. 마주친 눈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의아함, 반가움, 그리고 애정. 이번에야말로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박문대는 자신을 희생해 이세진을 살렸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다음으로는 믿어주지 않아서, 의지해주지 않아서 화가 났다. 이세진은 서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거쳤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박문대의 죽음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걸로 끝인가?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너를 희생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게 낫겠다고, 이세진은 떨리는 손을 움켜쥔 채 생각했다.

 

 

 

 

 

 

 

 



 

 이세진은 눈을 떴다.
 

 8월 1일, 이번에는 세상이 멸망한 직후였다. 익숙한 소속사 건물에서 어디서 주운 건지 피 묻은 쇠파이프를 들고 뛰쳐나오는 박문대가 보였다. 박문대는 구둣발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를 걷어찼다. 이세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문대문대도 이런 건 처음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잘 대응하는 건지. 안심하기도 전에, 박문대의 뒤로 걸어 다니는 시체가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섰다. 화단에 세워져 있던 삽을 들어 인간의 형태를 잃지 않은 그것의 머리를 내리쳤다. 불쾌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며 시체가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순간, 뒤를 돌아본 박문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짧은 놀람만이 있을 뿐, 어떤 반가움도 사랑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세진은 순간적으로 혀 안쪽을 깨물어 "문대문대!" 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설마. 그러나 이번에도 누구세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

 

 그게 끝이었다. 박문대는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아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이세진이 뭐라고…. 뭐라도 됐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란 생각에 화가 났다. 직전의 박문대도 자신을 류건우라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돌아올 거야. 곧. 그런데….

 -그러다 30대에 돌연사하는 거야!
 -너를 희생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게 낫겠다고….

 

 이번에도 네가 류건우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번에도 네가 박문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번에도… 네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끌어안고 살아있는 박문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세진은 박문대의 의심스러운 눈길에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낸 채 인사했다.
 

 "…저기, 우리 같이 다니는 게 어때요? 저는 이세진이라고 합니다!"
 

 박문대가 순간적으로 얼굴을 폈다. 순간이라도 좋았다. 이세진은 박문대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순간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찰나의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는 것처럼, 살아있는 박문대를, 이세진이 아는 박문대를… 이번에는.
 

 8월 1일, 이세진은 생일 케이크 대신 살점과 피가 눌어붙은 삽을 든 채 초조하게 박문대의 허락을 기다렸다.
 생일 선물을 바란다면 오직 하나, 자신의 옆에서 살아있는 박문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끝.

 Playlist

 ​♥     눈기린  /  도리  /  마리
​ ♥     팽  /   bdb-

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