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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끝났다더니 난데없이 비가 쏟아부었다. 비는 싫어하지 않는다. 맞지만 않는다면, 실내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기만 할 수 있다면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이세진 너 우산 있어?”

“아니 그냥 좀 그치면 가게.”

“그래? 나 교수님이 부르셔서 가야 하는데… 아씨 늦었다 나 간다!!!”



 

종강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은총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 불쌍한 동기는 그렇게 외치며 나가더니 창문 밖에서 이내 가방을 쓰고 캠퍼스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과사에서 우산이라도 빌려볼까 아니면 그냥 맞고 갈까… 세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는데.

 

 

 

나의 여름에게

生 씀

 

 

 

“세진아, 꼭 안 가도 돼.”

“아니에요, 그냥 가서 생각 안 하고 쉬면 괜찮아질 거 같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전학 가면 되죠.”


 

  

아들은 가방 지퍼를 잠그며 대답했다. 이미 마음을 정해버린 소년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걱정과 사랑이 담긴 손길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서 잘 먹고 잘 쉬고 잘 잊고 올게요. 엄마는 보고 싶겠다.

 


 

“데려다주신다면서 벌써부터 울려고 하면 어떡해요.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세진의 짐은 캐리어 하나와 큰 배낭 하나에 전부 담겼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와 문제집 몇 권, 좋아하는 만화책 몇 권과 게임기가 다였다. 짐을 뒷좌석에 싣고도 발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제 어머니께 세진은 웃어 보이며 먼저 조수석에 올랐다.

 

 

 

 

세진은 도망을 가기로 했다.

  

 


 

별일은 아니었다. 세진은 친구가 많았고, 정이 많았고,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만큼 보이지 않는 적도 많았을 뿐이었다. 서열놀이 하기 좋아하는 유치한 사내놈들 사이에서 의도치 않게 눈에 띄었고 그 덕에 쉽게 얕보이는 일이 없었다. 대신 그렇다고 모두에게 호감인 것도 아니었으며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제 위치에 틈을 노리고 있던 놈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세진은 그저 호의를 가지고, ‘타겟’이 된 친구를 도와주고자 했던 게 다였다. 단지 상대는 저를 괴롭히던 인간들의 ‘쟤한테 뒤집어씌우면 앞으로는 절대 괴롭히지 않겠다’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믿었을 뿐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최후의 양심인지, 그 정도의 거짓말은 할 수 없었던 건지 학교폭력 위원회가 열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모든 일이 정리됐다. 세진은 여전히 뭐가 일어나고 정리된 건지 몰랐다. 아무리 제가 아니라고 얘기해도 ‘피해학생이 네가 했다고 주장했고 5명의 목격자도 네가 했다고 주장을 하는데 어쩌겠니.’란 대답뿐이었다. 당연히 그 5명의 목격자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그 놈을 괴롭히던 놈들이었다. 그 다섯 명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는 놈이 없을 텐데…!!



 

“학폭위 안 열거니까 한 번만 니가 넘어가 주면 안 돼?”

“그렇다고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생기부에도 안 남는데, 그냥 인정하고 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만 하면 해결이 된다잖아.”

“…야.”

“미안해, 나한테도 방법이 없었어. 너도 알았잖아 나 힘든 거.”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잖,”

“그만하고 싶어. 미안하다.”

 


 

대화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다. 세진은 오히려 신고해버리겠다는 제 부모님을 말리는 데 남은 힘을 써야 했다. 억울함의 크기로는 이미 경찰서에 가고도 남을 정도였으나 제 마음이 닳고 닳아 꽉 닫혀버려 어떠한 얘기를 더 얹고 싶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 만들어 준 갈등 조정 자리에서 세진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미안하다 사과해야 했고, 화를 누르다 못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 부모님의 손을 감싸 잡아야 했다. 더럽게도 비가 많이 내려서 집에 가는 길 차를 타러 가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신발이고 바지고 마음이고 모든 게 쫄딱 젖었다. 지금 우산을 내던지고 뛰쳐나가 울어버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우는 건지 빗물에 얼굴이 엉망이 된 건지 모를 텐데. 하지만 이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얹어드릴 순 없었으므로 세진은 묵묵히 차에 올라타 에어컨 바람에 눅눅해진 옷을 말렸다.

 


 

곧 방학이라 모든 수행평가가 끝난 뒤였고, 세진은 방학까지 체험학습 계를 내고 쉴 수 있었다. 집에서도 심란한 건 매한가지라 방학 동안 충청도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 있기로 하고 당장 전학을 가버리자는 부모님도 말렸다. 따지고 보면 피해자는 저니까 제가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힘드니까, 일단 지금은 힘드니까 잠시만 도망가 있자고. 세진이 먼저 그렇게 말해오는데 아들의 말에 반대할 순 없었다. 그저 그 시간 동안 정말로 잘 추스려지길 바라고 응원하는 수밖에. 곧장 세진이 내려가 있을 거란 소식을 전하니 세진의 외할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세진이 내려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사실상 방학이 되기도 전에 내려가게 되었다.



 

“걱정 말고 조심히 올라가요.”

“…세진아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알지?”

“알죠~ 여기서 일단 잘 쉴게요.”



 

저를 외갓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내내 망설이던 엄마를 다시 서울로 보내주고 세진은 짐을 정리했다. 할머니가 걱정하실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마냥 밝지만은 모자의 분위기를 읽은 건지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잘 왔다며 꼭 안아주실 뿐이었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놀랄 만치 평화롭고 지루했다. 할머니도 낮에는 집을 비웠고, 세진은 먹은 아침밥 그릇을 설거지하고 집을 청소하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가지고 온 만화책은 이미 다 읽었고 손이 영 가지 않던 소설책도 절반 이상 읽은 상태였다. 이러다가 결국 문제집까지 꺼낼 지경이었다. 물론 지금껏 공부했던 걸 잊지 않으려고 가져온 것이긴 했지만 웬만하면 펼쳐보고 싶지 않았다. 종종 연락하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학원의 방학 특강이 시작됨과 동시에 연락이 뜸해졌다. SNS에 들어가도 전부 관심도 흥미도 없는 얘기들뿐이라 하루에도 몇 번을 새로고침하던 것을 그만뒀다. 그저 맑은 하늘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집 근처 저수지를 산책하는 게 하루일과의 전부가 될 참이었다.




 

처음엔 그것도 괜찮았다. 할 게 없으니 오히려 머리까지 같이 비워져서 가만히 있을 때면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불안함에 잠자리를 설치는 일도 줄었다. 해가 기울고 나면 할머니와 옥상에 올라가 평상 위에 펴둔 모기장 안에서 노을을 보다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정을 나누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어딜 가는 건 아니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생활이 닷새째 지속되자 온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 새끼들이 싫어서 도망치긴 했지만 이대로 내 아까운 여름방학을 그냥 보낼 순 없지.




 

세진은 휴대폰을 들어 지도 앱을 켰다. 푸르고 단순한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늘리고 줄여봐도 전부 들, 들, 산, 작은 길들이 전부였다. 집을 저장해두고 일어섰다. 동네부터 구경하자. 늘 가던 저수지에 가는 길이 아니라 한 번도 안 가본 오른쪽 길로 향했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그 덕에 길에 핀 들꽃이 잘 보였고, 나뭇잎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들이 아름다웠다. 가끔 가다가 마주치는 어른들께 서글서글하게 인사했고 마을에 드문 어린 존재를 다들 반가이 맞아주었다.



 

‘집에서 오른쪽 길로 쪼~옥 가다 보면 수퍼 하나 있어.’

 


 

아, 할머니가 이 길로 가면 슈퍼가 하나 나온댔는데. 지도 앱에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세진은 할머니의 말을 믿고 더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더우니까 물이든 아이스크림이든 있으면 좋겠지. 가게가 있을까 반반의 확률을 믿고 제법 걸었더니 아직도 안 나와? 싶을 즘에 가게가 하나 나왔다. 슈퍼가 아니라 그냥 구멍가겐데요 할머니. 하지만 있을 건 다 있어 보여서 바로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는 햇빛으로 다 변색 되어버린 뽑기 기계와 제대로 작동은 되는지 의문이 드는 낡은 게임 기계가 있었고 지붕 아래 그늘이 진 공간에 넓은 평상이 있었다. 뭐든 낡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세진은 꽤나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계세요?”



 

가게 문을 열며 외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산하는 곳에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김에 눈으로 가게의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규모는 작았으나 있을 만한 건 다 있었다.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밖에 있나 싶어 다시 문을 열려는데 세진이 문을 잡는 것과 동시에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드르륵 열었다.

 

 

 

“엇.”

“아, 손님… 어서 오세요.”

 

 

 

마주친 건 또래, 혹은 저보다 어려보이는 남자애였다.

 

 

 

“아. 여기 주인분… 이세요?”

“네, 저희 집이에요.”

 

 

 

세진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다 냉동고에서 메로나 하나를 꺼냈다.

 

 

 

“얼마에요?”

“500원이요.”

 

 

 

시골 인심인가… 편의점보다 싼데? 세진은 조금 망설이다 소년에게 말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메로나를 하나 더 꺼냈다.

 

 

 

“1000원이요.”

“같이 먹을래요?”

“…제가 사 먹어도 돼요.”

 

 

 

소년은 기어코 세진에게 500원을 거슬러 주고는 슈퍼 앞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세진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몇 살이에요?”

“17살이요.”

“어, 나돈데.”

“…그래 보였어.”

 

 

 

동갑이라는 걸 알자마자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세진은 조금 들뜬 마음에 표정도, 목소리도 더 밝아졌다.

  

 

 

“너 이름은 뭐야? 난 이세진.”

“박문대야.”

“여기 살아?”

“어.”

“나는 저기 대추나무 있는 집이 할머니 댁이라.”

“아, 대추나무 댁 할머니 알아. 방학이라 온 거야?”

“…어. 친구 없어서 심심했는데 잘 됐다. 여기 진짜 아무것도 없더라. 너 바빠?”

“보통 가게 보는데… 보다시피 사람이 많이 오진 않아서 별로 안 바빠.” 

 

 

 

벌써 메로나는 다 먹었고 여전히 날은 더워서 세진이 손으로 파닥파닥 부채질 하자 문대가 가게 안에 있던 선풍기를 가까이 가져와 틀어주었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의 바람은 그다지 세진 않았지만, 그걸로 괜찮았다. 모터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얘기하다 보니 세진은 문대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것, 읍내의 고등학교에 다니느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 가게 보는 일 때문에 보충 수업은 선택하지 않고 빨리 하교하는 것. 여름에는 더워서 셔틀을 타고 다닐 때도 있는 것…

 

 

 

“자전거 여기서 타면 재밌겠다.”

“빌려줘?”

“다음에 타자! 좋네.”

 

 

 

무엇이 좋은진 모르겠으나 문대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대에게도 일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 세진 같은 떠들썩한 친구가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방학 동안만 볼 가벼운 인연일 게 뻔했고 이번 방학은 적당히 덜 심심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적당히 윈윈이라고 생각했다.

 

 

 

 

세진을 자주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문대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과도하게 들어맞았다. 오랜만에 신경 쓸 것 없이 편한 또래를 만난 세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로 출석했다. 할머니가 챙겨준 간식을 챙겨오거나 제 게임기를 들고 올 때도 있었고 여기 챙겨와 이미 다섯 번도 더 읽은 만화책을 들고 온 날도 있었다. 대부분 그런 것들은 오래가지 않아 이내 곧 심심해지곤 해서 결국 문대를 따라 동네를 구경하거나 서로 별의별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끝말잇기 하자. 나트륨.”

“왜 하자고 하는 건데.”

“헤헤 그럼 기억력.”

“역도.”

“도력.”

“역주행.”

“행동력.”

“…디질래.”

 

 

 

문대는 반응이 작은 편이었으나 타격감은 좋아서 자꾸만 놀리게 됐다. 대부분 조용히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 뭐라도 하나 잡아서 문대를 놀리면 요란스럽게 반응해오는 식이었다. 잔잔하다가도 가끔은 파도가 치는 문대의 반응이 싫지 않아서 세진은 더 즐거웠다.

 


 

여름은 지나갈 생각을 않고 날로 더워지기만 했다. 여전히 시원찮게 털털거리는 선풍기 앞에서 세진은 아이스크림을 이미 두 개 해치웠다. 하나 더 먹을까… 그랬다간 배탈로 며칠을 고생할 지 감도 오지 않아 관뒀다.



 

“너무 더워 너무너무너무 너무!! 더워… 여기 시골인데 계곡 없어? 저수지에 발 담그면 안 되지?”

“…계곡 갈래?”

“갈 수 있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계곡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세진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며 또 한참을 징징댔다. 문대는 익숙한 듯 한 귀로 흘려듣곤 대충 위치를 설명했다.



 

“내일 가자!”

“할머니가 된다고 하셔야 갈 수 있어. 가게 볼 사람 없잖아.”

“아… 그럼 물어보고 연락주면 되지!”

 

 

 

이내 둘은 서로 번호 교환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같이 세진이 가게로 오니 따로 연락할 필요를 못 느낀 탓이었다. 세진은 그러게 번호가 없네~ 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문대가 전화번호 11자리를 찍어주자 이내 문대의 폰에 낯선 번호가 가득 떴다.

 

 

 

“내 번호야.”

“어.”

“난 문대문대라고 저장해야지~”

“…….”

“너 이세진이라고 저장할 거지!!”

“…그럼 뭐라고 하는데.”

“좀 정 있게 저장해줘야지~ 멋진 친구 세진이라든가.”

“…자 됐냐.”

 

 

 

의외였다. ‘멋진 친구 세진이’ 같은 저장명이 뭐냐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순순히 저장까지 하고는 제게 보여주는 모습이, 문대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상해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매번 어떤 얘기를 해도 시큰둥한 반응이 기본이었고 워낙 쓸데없는 얘기는 반응을 안 해오길래 이것도 무시할 줄 알았는데… 확인했냐며 눈앞에 화면을 흔들며 보여주는데 세진은 그 일곱 글자가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묘해졌다. 뭐지 이 기분. 어, 어…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그 상태였다. 할머니가 밥 먹으라고 말하는 소리도 한 번에 듣지 못했고 머릿속에 문대가 화면을 내밀던 그 장면만 반복 재생되었다.



 

[내일 가자]

[삼촌이 가게 봐주신대]

 

 

 

그 순간 문자가 도착해 얼른 휴대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된대…! 세진은 얼른 할머니를 불렀다. 내일 문대랑 계곡 간다고 자랑했더니 그럼 도시락을 싸가라며 신나서 같이 덩실거렸다. 할머니 근데 왜 계곡 있다고 말 안 해줬어요~? 문대 소개해주는 것도 까먹고! 응, 그것도 까먹었네~ 하지만 내일, 그것도 문대와 갈 거니까 별로 상관없었다.

 

 

 

[좋아 몇 시에 가?]

[할머니가 도시락 싸주신대!!]

[근데 너 왜 문자 보내? 카톡 안써?]

 

 

 

번호를 저장하니 새 친구로 아무 사진도 없는 밋밋한 프로필이 하나 더 뜨긴 하던데. 그리고 이내 도착한 문자에 세진은 폭소했다.

 


 

[데이터 없어]

 


 

웃긴 말도 아닌데 왜 얘가 말하니까 웃기지? 세진은 메시지 창을 올려 별 내용 없는 대화를 또 한 번 읽었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은 채였다.

 

 

 

 

아침부터 할머니와 함께 준비한 도시락과 할머니의 능숙한 솜씨로 썬 수박이 담긴 통을 들고 가게에 도착하니 아직 문대는 가게를 보는 중이었다. 문대는 세진이 들고 있는 짐을 슥 보더니 가게 안에 있는 방에서 수건과 돗자리를 가지고 나왔다.

 

 

 

“삼촌이 한 20분 뒤에 와주신다고 했어.”

“그럼 기다렸다 가지 뭐!”


 

 

세진은 평상에 짐을 내려놓았다. 20분 기다렸는데 삼촌 안 오시면 그냥 가게 닫고 된다고 말을 덧붙이자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차피 너 오늘 나랑 하루종일 놀 건데~ 그 정돈 당연히 기다릴 수 있지.”


 

 

문대와 눈이 마주치자 세진이 개구지게 씩 웃는데 박문대는 그게 참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마을에 있는 유일한 친구가 저라지만, 매일매일 만난다지만, 알게 된 지 이제 고작 일주일쯤 되어가는데.

 

 

 

“과자 하나 사갈까?”

“몇 개 골라와. 그냥 가져가게.”

 

 

 

세진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과자 진열대를 구경하더니 초록색 포장의 감자 칩 한 봉지를 골랐다.


 

 

“이거면 됐어.”

“근본은 파란색인데, 뭘 모르네.”

“…그래?”

 

 

 

문대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세진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던 파란색 감자 칩으로 바꿔 들었다.


 

 

“…바꾸란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그렇지~”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삼촌이 도착했다. 처음 만나는 어른인데도 세진은 넉살 좋게 웃으며 놀러 갈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을 전했다.

 

계곡으로 가는 길은 평소 산책하던 것과 비슷했다. 보폭을 맞추어 걷고, 시답잖은 이야기하고, 구름이 예쁘면 그걸 사진으로 남기고.

 

 

 

“와 괜찮은데???”

“얕아서 물놀이하기엔 애매한데 발 담그기엔 괜찮아.”

 


 

도착한 곳은 크지 않고 깊지 않은 계곡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 번씩 와서 발만 담그고 가는 곳이었다. 평평한 돌 위에 돗자리를 깔고 가져온 짐들을 내려놓았다. 세진은 벌써 차가운 물에 발을 담가보고 있었다.

 

 

 

“야 완전 시원해!! 여기 너무 좋다~”

“…다행이네.”

 

 

 

저도 모르게 너무 별것 아닌 곳이라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나 보다. 순수하게 좋다며 들뜬 세진의 반응을 보며 문대도 안심하고 있었다. 돗자리 위치를 잘 잡아서 앉아서도 발을 담글 수 있어 세진은 물에서 좀 걸어 다니며 구경하다 문대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서울에선 발 담그려면 차 타고 멀리 가야 하는데 좋다~”

“수박 먹을래?”

“밥부터!”

 

 

 

세진이 챙겨온 도시락을 까먹고 수박도 먹고 시원하니 딱 기분이 좋았다. 문대는 좀처럼 겉으로 감정의 변화가 잘 드러나는 편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됐다. 좋다… 세진이 자각하지 못한 채로 한 마디 내뱉었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문대의 노랫소리에 나온 말이었다. 순간 흠칫 눈치를 봤는데 여전히 풍경을 보며 흥얼거리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고 안심하며 드러누웠다. 마음이 편안했다. 낮게 쳐놓은 경계에 소리 없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

 

 

 

8월 1일 아침은 생일 축하한다는 부모님의 전화와 할머니의 포옹으로 시작했다. 벌써 8월이구나. 제 생일이 왔다는 건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개학이 다가온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잠시 불쾌해지긴 했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진 않기로 했다. 오늘은 할머니가 특별히 옆집 아저씨께 부탁해 버스를 타고 30분은 가야 나오는 읍내 빵집에서 주문한 케이크를 함께 먹기로 했고, 세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갈비찜도 해주시기로 했다. 특히 할머니 갈비찜은 세진이 가장 좋아하는 여사님 표 갈비찜의 근본이라 세진이 외갓집에 올 때마다 특별히 준비해주시는 음식이기도 했다. 문대도 평소와 다르지 않다면 제게 시간을 내줄 수 있을 테니 같이 갈비찜이랑 케이크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세진은 폰을 들었다.

 

 

 

[문대문대 머행]

[오늘 바빠?]

[할머니가 갈비찜 해주셧는데 와서 같이 먹을래?]

[참고로 진짜 맛잇음]

 


 

다행히 별로 바쁘지 않은지 답장이 늦지 않게 도착했다.

 


 

[ㅇㅇ]

[별로 안바쁘긴 한데…]

[한 10분 뒤에 출발해도 되냐?]


 

 

안 될 거 없지. 세진이 히죽 웃으며 할머니께 전했다. 할머니! 문대 10분 뒤에 온대요 같이 밥 먹어요!!

 

 

 

“안녕하세…요.”


 

 

세진만 있을 거로 생각했는지 할머니와 마주치자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다. 세진은 속으로 혼자 웃으며 문대를 거실로 이끌었다.

 

 

 

“뭐가 엄청 많네요…”

“많이 먹으렴. 문대야~”

“그래 문대야~ 할머니 갈비찜 진짜 맛있다고.”

“아, 네 잘 먹겠습니다…”

 

 

 

손을 씻고 오기가 무섭게 수북한 밥그릇이 앞에 놓였고 눈앞에는 꼭 닮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는 할머니와 손자가 보였다. 문대는 어색하게 수저를 들고 갈비찜을 한 입 먹었다. …이세진의 과장이 하나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릇 싱크대에 담가놓고 케이크 꺼내 먹으렴~”

“네에 할머니, 다녀오세요~”

“잘 먹었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문대 재밌게 놀다 가고. 우리 세진이랑 놀아줘서 고마워~”

 

 

  

밥만 함께 먹고 일을 보러 나가시는 할머니를 배웅해드리고 함께 식탁을 정리했다. 설거지하겠다는 문대를 뜯어말리고는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이미 초를 꽂고 축하는 했던 터라 멀끔한 케이크 위로 구멍 몇 개가 뽕뽕 뚫려 있었다. 누구… 생일인가? 문대는 차마 묻지는 못하고 반듯하게 자른 케이크 조각을 받아들었다.

 

 

 

“이거 읍내 빵집 케이크잖아.”

“응. 맛있다던데? 난 처음 먹어봐.”


 

 

포크로 한입 가득 크림과 시트를 퍼서 먹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팔아도 밀리지 않을 맛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세진은 데코로 올려진 메론 조각을 입에 쏙 넣으며 빙긋 웃었다. 이런 생일도 나쁘지 않았다. 조용하고, 편안하고.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고 거실에서 TV를 좀 보다가 세진의 방에서 쉬면서 놀다 보니 시간이 금세 저녁께였다.

 

 

 

“나 가봐야겠는데. 6시에 대형 아저씨가 가게 들른다고 하셨거든.”

“아 진짜? 그럼 지금 슬슬 가야겠네.”

 

 

 

시계의 긴 바늘이 9를 지나고 있었다. 더 있다 가라고 잡고 싶었으나 일정도 있고 내일도 볼 수 있으니 딱히 붙잡을 명목이 없었다. 배웅해주려 현관문을 열었는데 톡톡 내리던 빗줄기가 굵어져 쏴아 소리를 내며 내리붓고 있었다.

 

 

 

“너 우산 안 가져왔지?”

“어….”

 

 

 

당연했다. 올 때만 해도 검은 구름 없이 쨍쨍한 하늘이었다. 세진은 신발장 옆 붙박이장을 뒤져보더니 곤란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우산 가지고 나가셨나 봐, 없네.”

“좀 기다렸다 가지 뭐. 지금 맞긴 좀 그러니까…”

 

 

 

문대는 폰을 들어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 때문에 발이 묶여 당장 가게로 갈 수 없으니 가게를 봐줄 사람이 없으면 내일 오라고 대형 아저씨에게 전해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삼촌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을 들었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마루에 자리 잡은 세진의 옆에 털썩 앉았다. 비를 맞는 건 불쾌하지만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가만히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시원한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빗방울이 고인 웅덩이에 떨어져 튀는 것을 보다 아차, 하고 떠오른 질문을 뱉었다.

 

 

 

“오늘 혹시 네 생일이야?”

“어?”

“케이크도 있고 그래서…”

“아, 아… 맞아.”

 


 

조금 민망해졌다. 생일이랍시고 붕 떠서 친구 초대한 어린애라도 된 기분이었다. 세진이 어색하게 뒷목을 긁자 문대가 도리어 제가 민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진작 물어볼 걸. 선물도 없고… 생일 축하한다.”

“아냐 그냥 내가 불러서 와준 거잖아, 고마워. 진짜 갈비찜 먹자고 부른 거 맞아.”

 

 

 

다소 어색한 대화가 오가고 정적이 맴돌았다. 무슨 마음인지 입이 저절로 열렸다.

 

 

 

“나 여기 도망왔어.”

“어?”

“학교에서… 일이 좀 있었거든.”

 

 

 

이어지는 얘기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었던 기억들이었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이어졌고 문대는 이야기를 한 번 끊는 것 없이 묵묵히 세진의 말에 귀 기울였다. 문득 쳐다본 세진의 옆모습은 가끔 보여준 어딘가에 어둡게 잠겨있는 얼굴이었다.

 

 

 

“별거 아니지.”

“…고생 많았는데.”

“응… 힘들었어. 근데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 보려고.”

 

 

 

결심한 듯 말하는 얼굴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이세진이 이세진을 보여준 만큼 박문대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건… 익숙하지 않은데. 이 비가 그칠 때까지만 기다린다면 그만인데, 이 관계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집에 돌아가면 그만인데…. 하지만 문대는 입을 떼고 있었다.

 

 

 

“…나도 서울에 살다가,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그러니까 제 얘기 같은 건 꺼낼 생각이 전혀, 요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무뎌진 상처에도 제가 곧 울 것처럼, 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지는 못하는 소년을 보면서, 문대는 제 안에서도 무언가 흐려진 것이 느껴졌다. 방학이 끝나면 이세진은 돌아갈 텐데 헤어지면 좀 아쉬워질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이 가까워졌다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세진은 여전히 매일매일 가게로 출석 도장을 찍었고, 나란히 앉아있을 때 물리적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고, 세진이 문대를 전보다 더 격없이 대했을 뿐이었다. 세진이 꺼려하던 학교 얘기를 터놓으니 자연스레 제 일상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어서 서로 학교에선 이렇게 지냈겠구나 확신에 가까운 짐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드물게 가게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날엔 문대가 먼저 대추나무 집에 찾아왔다가 크게 감격한 세진이 세 시간 동안 문대문대도 날 보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고, 어제 헤어진 9시부터 지금까지 12시간이 넘게 나를 생각한 게 분명하다는 호들갑을 들어야 했다. 다신 먼저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건만 문대는 그다음 휴무일에도 대추나무 집에 찾아왔다. 세진의 집이라고 특별한 걸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어컨을 틀 수 있어서 시원했고, 이세진이 주는 옷으로 갈아입으면 지금 세진이 지내고 있는 손님방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만나서 하는 거라곤 얘기밖에 없으면서 세진과 문대는 이제 서로에게 찾아가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질리지도 않을 만큼.



 

“우리 계곡 또 가자.”

 

 

 

다짜고짜 가게에 도착한 세진이 씩 웃으며 졸랐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그을린 얼굴이었다.

 

 

 

“언제?”

“지금.”

“지금? 낮이나 저녁부터 비 온다던데.”

“가까우니까 지금 비 안 올 때 후딱 갔다 오면 안 돼?”

“다른 날 가지…”

“나 내일 모레 서울 가잖아.”

 

 

 

그랬다. 세진이 이곳에 머물기로 한 시간은 4주였고 그중 3주 가까이 문대와 붙어 지냈다. 짧은 시간도 아니었으나 긴 시간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응?”

“…그래.”

 

 

 

상황이 상황인데다 오늘도 손님이 뜸할 게 분명했고, 따로 언제 온다고 말한 사람도 없었으니 문대는 가게 안에서 종이를 북 찢어다 간단하게 메모를 쓰고 가게를 정리했다. ‘개인 사정으로 자리 비웁니다. 내일 엽니다.’라고 쓰인 종이였다. 문을 여는 손님들이 바로 볼 수 있게 눈높이에 맞게 붙여두고 수건 두 장과 돗자리만 챙겨서 계곡으로 향했다. 서울에 돌아간다는 얘기가 나온 뒤로 둘의 분위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세진도, 문대도 모르지 않았지만 묵묵하게 발걸음만 옮겼다.

 

 

 

 

도시락이며 간식이며 바리바리 싸 온 그때와는 다르게 짐이 단촐해서 바로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정말 곧 비가 올 건지 하늘도 심상치 않았고 공기가 텁텁했다. 엉덩이는 돗자리에 둔 채 발만 계곡물에 담그니 습도로 불쾌한 기분이 조금은 가셨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고 평소처럼 얘기를 이어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는 게 금방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았다.

 

 

 

“빨리 가자!”

“수건 들어줘.”

 

 

 

세진이 짐을 들고 문대가 얼른 돗자리를 정리했다. 나란히 수건을 펴서 왔던 길로 달려갔다. 수건 한 장만 들고 뛰는 거라 사실 비를 피하는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신났다. 주인 속은 모르고 흙탕물에서 잔뜩 뒹구는 하얀 개가 된 것처럼 머리고 얼굴이고 옷이고 뭐고 흠뻑 젖는데도 불쾌하지 않았다. 저와 다르지 않은 꼴로 뛰어가는 문대가 웃겨서 세진이 그만 큰 소리를 내며 푸하하 웃어버렸다. 문대 또한 그랬다. 그냥 웃음이 나와서 웃고 말았다. 축 젖어 무거워진 수건을 내리고 웃으며 걷다 뛰다 되돌아갔다 하며 한참이나 걸려 가게에 도착했다. 잔뜩 젖어 시야를 가리는 물기를 닦아내며 가게를 열었다. 문대가 건넨 새 수건에 머리를 털면서도 즐거웠다. 영 시원찮은 선풍기라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꺼내 털털털 약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머리를 말렸다. 물론 금방 마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는 아니게 되었으니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세진은 제 머리가 얼추 마른 걸 보고 문대에게 선풍기를 완전히 넘겼다. 젖은 머리를 털고 상의의 물기를 말리는 것은 저와 똑같은데…

 

 

 

 

이세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어… 위험하다…

 

 

어쩐지 박문대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뗄 수가 없었다.

먼 거리가 아니었다. 세진은 문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결국 그 눈은 마주치고 말았다.

 

 

 

나 이틀이면 가는데…

쟤 이틀 뒤면 가는데…

 

 

 

아는데도 멈춰지지 않았다. 얼굴은 가까워졌고 입술이 맞닿았다. 쪽 소리도 나지 않게 꾹 닿았다 떨어졌다. 숨결이 더웠다. 온통 눅눅하고 축축했는데 피부가 닿는 게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스르륵 눈이 감기고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았다. 이번엔 쪽, 하고 소리가 났다. 문대의 귀가 시뻘게졌다. 제 것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 진짜 이틀 뒤면 서울로 가는데…

 

 

알고 있음에도 입술은 자꾸 다른 말을 내뱉었다.

 

 

 

“한 번 더… 할래?”

 

 

 

그리고 돌아온 답은 의외이면서도 의외가 아니었다.

 

 

 

“…어.”


 

 

이번에 닿은 입술은 꽤 오랫동안 자리에 머물렀다. 꾹 대었다가 고개를 살짝 틀어 다시 쪽, 슬쩍 떨어져서 눈을 마주치다가 다시 쪽, 손을 맞잡고 쪽, 축축해져 버린 티셔츠의 등판을 꽈악 그러쥐고 쪽, 몇 번을 입 맞췄다.

 

 

 

 

그 길로 후다닥 집에 달려와서는 물기를 닦은 보람이 없게 다시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왔다. 마침 집에 돌아와 있던 할머니가 비에 쫄딱 젖은 손자를 보곤 무슨 일이냐며 큰 수건을 꺼내와 축축한 손자를 닦았다.

 

 

 

“아유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뻘게??”

 

 

 

그러게요, 할머니. 지금 손자 너무 혼란스러워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데도 같이 빗속을 달리던 걔가 떠올랐고 머리를 말리다가도 선풍기 바람에 젖은 머리를 털던 걔가 떠올랐고 자려고 누웠을 때도 어, 하고 대답하며 눈을 감던 걔가 떠올랐다.

 

 

 

“아아악!!!”

 

 

  

나 어떡해 진짜. 내일 문대 얼굴 어떻게 봐!!! 머릿속은 온통 어지러운데도 내일 문대를 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불을 퍽퍽 차다가도 문대의 젖은 티셔츠 자락을 움켜쥔 느낌이 손에 생생해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문대… 없어요?”

“어, 오늘 읍내에 간다고 자전거 타고 나가던데.”

“아 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아침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한 다음 바로 가게로 와서 대충 11시 전에는 도착했을 텐데 오늘은 도저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천 번의 갈등 후에 겨우 가게에 온 것이었다. 오후 2시. 평소보단 늦었지만 결코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세진이? 세진이라 했나.”

“네, 할머니.”

“우리 문대랑 잘 지내줘서 고맙다.”

“…네. 아이, 저도 문대 있어서 안 심심했는걸요~”

“그러냐.”

 

 

 

할머니는 포근하게 웃더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세진의 가는 길을 배웅해주시기까지 했다.

 

 

 

“가볼게요 할머니~”

“그래. 아, 내일 간담서.”

“아, 맞아요. 이제 개학이라.”

“문대가 많이 보고 싶어 할 텐데…”

“…….”

“괜한 소리 했네, 얼른 들어가.”

 

 

 

세진은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만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헤어짐이 코앞이었다.

 

 

 

 

 

문대가 읍내로 나온 것은 세진의 선물을 사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실 만남이 어색할까 봐 지레 겁먹고 도망나온 것도 컸다. 혹시라도 가게에 오는 세진과 마주칠까 봐 일찍 자전거를 끌고 읍내에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모든 가게가 아직 영업 시작도 하기 전이란 걸 간과했다. 마땅히 들어갈 곳도 없어서 적당히 바람이 잘 통하는 나무 그늘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철푸덕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못 만나더라도 내일은 인사를 해야 될 텐데, 걔를 보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 지 감이 안 왔다. 걔는 잠깐의 사고라 생각하고 없던 일 셈 칠 수도 있는데 문대는 그게 안 될 것 같았다. 없는 셈 치자고 하면 맞춰서 웃어주며 보내겠지만 몇 날 며칠이고 걔와의 입맞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문대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생각하다 입술에 닿는 손가락의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아악!!



 

어제도 이래서 못 잤다. 내내 다가오던 그 얼굴만 생각나서, 맞닿던 숨결이 생각나서, 마주친 눈동자 가득 제 얼굴이 비치는 게 생각나서…. 이제 어떡하면 좋냐고. 한숨만 푹푹 쉬다 가게가 하나둘씩 문을 여는 걸 보고 일어섰다. 일단 선물부터 사자. 막말로 내가 후에 괴롭든 안 괴롭든 세진을 볼 시간은 내일뿐이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는 그 법칙을 간절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뭘 사야 하는 거야? 웬만한 건 서울에도 팔거고, 그렇다고 여기에만 파는 걸 사자니 무슨 이별 선물로 특산품을 주는 것도 모양이 웃겼다. 책을 선물할까 하니 책도 취향 탈까 봐 고르기 쉽지 않았고 아무튼 뭘 골라도 여기서 굳이? 싶은 것들뿐이었다.

그나마 고른 게 객관적으로 서울에 가게를 내도 경쟁력이 있을 것 같은 동네의 자랑, 읍내 빵집에서 파는 수제 쿠키와 두껍지 않은 에세이 한 권이었다. 희망은 여기뿐이라고 생각했던 빵집에 들어가니 곰 쿠키가 눈에 들어와서 충동적으로 샀다. 세진이 서글서글 웃는 모습과 제법 닮았다. 그리고 서점의 한 켠에서 이 부근을 여행한 사람의 여행기가 담긴 독립출판물 한 권을 찾아 구매했다. 딱 한 권 남았다길래 표지가 살짝 바랬지만 감수하고 사기로 했다. 계산하려는데 계산대 옆에 있던 눅눅한 색 엽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비 오는 날의 풍경이 제법 묵직한 느낌의 수채화로 그려져 있는 엽서였다.

 

 

 

“…이것도 주세요.”

 

 

 

이세진 때문에 안 하던 짓을 한다. 쿠키와 책을 들고 시간을 때우려 읍내에 딱 하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왔다. 앉은 김에 편지나 지금 쓸까 싶어 카운터에서 볼펜도 빌려 왔다. 막상 엽서를 뒤집어 편지를 쓰려니 목구멍부터 무언가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뭐든 쓰면 후회할 것 같았다. 더 잘 쓸걸, 이건 쓰지 말걸…하고. 그래서 결국 염치불구하고 카운터에서 종이 한 장을 얻어왔다. 내가 남자 놈한테 편지 한 번 쓰려고 별짓을 다 한다... 이미 별짓을 한 사이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으나 문대는 더 이상 현실자각타임을 갖는 걸 멈추고 글자를 써 내려갔다.

 

 

 

이세진에게.

 

너무 딱딱한가....

 

 

세진이에게.

 

이건 너무 낯간지러운데.

 

  

세진세진

  

…하도 붙어있다가 말버릇이라도 옮은 것 같잖냐.

 

 

 

 

이세진에게

  

아무래도 이게 제일 무난하겠군.

문대는 볼펜을 몇 번씩 고쳐 잡아가며 글을 써 내려갔다. 새벽도 아닌데 촉촉하게 울렁이는 마음이 자꾸 흘러나와 당황스러움을 몇 번 넘겼다. 자소서 첨삭이라도 하듯 종이에 몇 번이고 고쳐 쓰다가 결심했다는 듯 엽서에 옮겨적었다. 문대는 엽서에 쓴 편지를 한 번 훑고는 바로 책에 끼워 넣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저녁이라기엔 이른 시간에 가게로 돌아오자 세진은 왔다 간 뒤였다. 맥이 풀리면서도 아쉬웠다. 내일 몇 시에 떠나는 지라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문자로 물어볼까 하다가 대체 어떤 말로 운을 떼야 할지 몇 분을 망설였다.

 

 

 

“아, 세진이 내일 1시에 간다더라.”

 

 

 

인사하고 돌아가다 말고 돌아와서 전해주고 갔다는 것이다. 문대는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너무 빨리 가도 정신없을 테고 너무 맞춰가도 시간이 부족할 수 있으니 딱… 11시쯤 가는 게 좋겠다.

 

 

 

“아, 문대야 내일 정수 할아버지 댁에 우유배달 있다.”

“몇 시에요?”

“11시 전까지만 와달라시더라.”

“네 알겠어요.”



 

열 시 반쯤 가져다드리고 바로 세진의 집에 가면 되겠지. 문대는 조금 더 서두를 계획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누웠다고 잠이 바로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더 일찍 잠들 수 있었다.

 


 

 

 

 

“할아버지, 저,”

“아유 좀만 기다려봐. 매번 고마워서 그래. 응?”

“그럼 오후에 다시 받으러 올게요.”

“오후에는 내가 없다니까? 떡 금방 떼오면 맛있어. 고것만 먹고 가.”

“저 정말 가봐야,”

“어른이 주신다 할 때 받는 거야.”



 

평소에도 대답을 듣는 일보단 말하는 일이 더 많았던 황정수 할아버지는 오늘도 예외 없이 제 의견만을 밀어붙였다. 분명 우유를 들고 도착한 시각은 10시 32분이었다. 딱 냉장고에 넣어드리고 출발하면 11시쯤 여유 있게 대추나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시간이었다. 얼른 인사를 하고 가려니 떡 좀 먹고 가라며 할아버지가 발목을 잡았다. 한사코 사양했으나 듣지를 않았다. 분명 40분에는 온다고 해서 대충 입에 구겨 넣고 갈 생각이었는데 벌써 시곗바늘은 9를 지나고 있었다. 점점 초조해졌다. 낮부터 비도 온댔는데, 부디 이세진이 차 타고 가는 동안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 지가 4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망했다. 그래도 빠르게 움직이려고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세진아~ 트렁크에 짐 다 실었어?”

“…….”

“이세진~?”

“아, 네 엄마. 다 실었어요.”

“그럼 슬슬 갈까~?”

“1시 되면 출발해요~”

“그래? 뭐 기다리는 거 있어?”



 

지금 시각은 12시 40분, 출발한다고 해서 예정과 크게 다른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진은 자꾸 대문에 시선이 갔다. 조그만 발소리라도 들리면 부리나케 대문으로 달려갔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어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세진의 모습을 보니 그른 것 같았다. 세진의 엄마는 그런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들과 함께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머쓱하게 마루에 걸터앉자 세진의 할머니가 말했다.

 

 

 

“아마 문대 기다리는 걸 거야.”

“문대? 아, 세진이가 친해졌다는 또래요?”

“어. 둘이 잘 지냈거든. 어제도 만나러 갔다 왔고.”

 

 

 

세진은 점점 초조해졌다. 1시가 지나도 더 기다릴 순 있었지만 정말로 오지 않을까 봐. 저만 기다리는 것일까 봐. 저만 이… 이별을 아쉬워하는 걸까 봐.

 

 

 

‘박문대…….’

 

 

 

왜 안 오는 거야, 할머니가 나 1시에 간다고 안 전해주신 건가. 결국 우려했던 대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금세 맞고 가지는 못할 수준으로 내렸다. 세진은 엄마가 가져다준 우산을 들고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폰을 든 채 우두커니 대문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기대하지 말 걸 그랬나 하고 돌아서서 출발하자고 말하려는데,

 

 

 

“이세진!!!”

 

 

 

박문대가 지금까지 본 얼굴 중 가장 다급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거칠게 밟아 오고 있었다. 비도 이렇게 오는데. 빗방울이 눈에 들어가려면 어떡하려고 막무가내로 오는 건지, 손에 쥔 가방을 들고 자전거가 쓰러지든 어쩌든 신경 쓰지 않고 자전거에서 일어나는 걸 보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세진 또한 비가 오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달려가 문대를 가득 안았다. 할머니와 엄마가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우산을 쓸 여유도 없이 쫄딱 젖어가며 달려온 박문대가 제 눈앞에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문대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고맙다고, 너 있어서 나 많이 괜찮아졌다고, 서울 돌아가서도 보란 듯이 잘살거고 너 많이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박문대 좋아해….”

 

 

 

막상 나온 말은 무척이나 간결했고 지나치게 솔직했다. 비 때문이었다. 비만 아니었어도, 네가 비에만 젖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갑작스러운 고백, 아니 어쩌면 예상은 했던 마음이었지만 지금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문대는 안긴 채로 급히 대답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몸은 금세 떨어졌다.

 

 

 

“갈게. 연락해, 문대야. 잘 지내고.”

“어… 어….”

 

 

 

세진이 들고 있던 우산을 문대에게 쥐여줬다. 얼떨떨한 채로 제대로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대답했다. 세진의 엄마도 문대에게 다가와 얘기 많이 들었다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문대는 급히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했지만 사실 말소리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진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제 등을 가득 안은 뜨겁고 큰 손바닥, 귓가에 쏟아지며 박힌 고백, 우산을 건네받으며 스친 따뜻한 손의 온기까지… 이세진으로 가득해서 다른 것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아, 여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겉은 종이 가방이라 금세 너덜너덜해질 테지만 다행히 책과 엽서는 비닐 포장을 해둬서 비 좀 맞는다고 큰일이 나진 않을 것이다. 문대는 세진이 가방을 건네받고, 저를 보고 웃고 손을 흔드는 장면까지 눈에 가득 담았다.

 

세진을 태운 차는 빗방울이 살짝 약해지자마자 출발했다. 연락한다며 얼굴까지 내밀고 인사하던 이세진의 모습이 벌써 흐려졌다.



 

[문대문대야]

[떡이랑 쿠키 잘먹을게]

[책도 잘 읽을게~]

[문대문대는 앞으로 답장을 성실히 하도록]



 

…울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세진은 문대 덕에 여름방학을 심심하지 않게 보냈고, 깎여있던 멘탈도 회복했다. 지쳐있기 때문이었는지 온통 복잡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문대의 말대로 간단하게 쳐낼 수 있었고, 어쨌든 저를 음해했던 것들은 사실은 허구에 기반했던 것이어서 진실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을 키우기 싫어서 세진이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 감았던 사람들은 마지막 양심이라도 챙기는 건지 세진의 말에 더 귀 기울였고 세진은 그 길로 인망을 쌓아 학생회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적당히 거리 두고, 챙길 건 챙기고. 전엔 뭐가 그렇게 아쉬운 게 많았는지 뭐든 꾸역꾸역 잡고 있기 바빴는데 두 손으로 잡기에도 버거운 것들을 하나둘 씩 놓아주고 나니 더 편해지고 쉬워졌다.

 

 

 

문대와도 종종 연락했다. 매일매일 연락하는 그런 체질은 아닌 것 같아 최대한 문대의 연락 텀에 맞춘 게 이틀이었다. 사실 그보다 더 뜸한 인간이었지만 문대 또한 세진을 제법 신경 썼고, 세진이 워낙 연락으로 투정을 부린 결과였다.

 

 

 

[문대문댕]

[보구십당]

 

 

 

답장이 어떻게 오려나. 세진은 자습실에 앉아 공부하다 말고 글씨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아 문대에게 문자를 했다. 문대도 다르지 않은지 답장이 제법 빨리 도착했다. 입꼬리에 웃음을 걸고 문자를 주고받다 꽤나 노골적이게 낯 간지러운 문자를 보냈다. 이런 문자를 보낼 때마다 문대의 반응이 꽤나 재밌어서 답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광대가 잔뜩 솟아올랐다.

 

 

[나도]

 

 

와악!!! 세진은 자습하다 말고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나도래! 나도래!!! 이 문자 전까지 오늘 문자 텀은 1분 내지는 2분이었다. 그리고 방금은… 무려 4분. 4분 동안 뭐라고 답할지 고민했을 모습이 선해서 주먹을 꽉 쥐고 허벅지를 꾸욱 눌러 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든 퍽퍽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자습실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할 게 분명했다. 세진은 여전히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꾹꾹 답장을 눌러썼다.

 

 

 

[웅 세지니두♡♡♡]

 

 

그러니까, 문대와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영상통화도 제법 했고, 문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연락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연락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문대문대]

[바빠?]

 


[문대문대 대답하라]

[아 이틀에 한번은 답장하기로 햇자나!!!!]

 

 

[문대씨바쁘십니까다름이아니고세진이가문대답장을많이기다리고잇는데용]

 

 

 

[박문대 무슨일있어?]

 

 

연락을 재촉하는 게 부담스러워 보일까봐 전화도 못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전화를 걸었을 땐 박문대의 목소리 대신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들렸고, 혹시나 싶어 카톡을 열어 확인하자 몇 번 나누지 않은 대화방의 이름은 (알 수 없음)으로 바뀌어 있었고 목록에서도 박문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박문대 어디 간… 할머니!!”

 

 

세진은 재빨리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가지 않은 수화음을 듣는 것도 애가 탔다.

 

 

-여보세,

“할머니!!”

-응 우리 강아지~

“할머니 잘 지내시죠~ 세진이는 안 보고 싶구?”

-아유 할머니는 우리 세진이 늘 보고 싶지~ 전처럼 또 내려와 있으면 좋겠구만.

“겨울에도 내려갈까보다~ 아, 할머니 혹시 문대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아이고 또 깜빡했네…

“네??”

 

 

뒤이어 전해진 건 문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 찾아온 머나먼 친척과 함께 집을 정리해서 할머니도 더 이상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도 가까이 지내서 삼촌이라 칭한 거지 사실 혈연관계는 아니었다고 했다. 세진은 적당히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혼자 장례를 치렀을 문대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좀, 알려주지… 돌이켜보면 세진이 항상 문대에게 힘든 얘기를 먼저 했던 것 같다. 물론 문대가 힘들단 얘기를 꺼낸다면 늘 들어줄 준비가, 편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문대에게 그럴 기회나 줬던가. 세진은 더 이상 유효한 전화번호가 아닌 걸 알면서도 문대의 번호로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흘러나왔지만 쉽사리 종료 버튼이 눌러지지가 않았다.

 

 


/여름의 기록/

 

 

책상 위에는 항상 문대가 선물해줬던 책이 올려져 있었다.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을 펼쳐보지 못한 것이었다. 돌아온 날에는 정신이 없어서, 학기가 시작하고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리고 거의 매일 문대와 연락할 수 있으니까, 박문대가 무슨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했는지 알고 싶은 간절함이 없었던 탓이었다.

 

세진은 잠시 망설이다 책을 손에 쥐었다. 비닐 포장에 정갈하게 싸인 책은 앞표지가 색이 책등과 뒤표지와는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책방에 전시되어있을 때 빛에 바랜 모양이었다. 표지를 넘기니 엽서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박문대 여기다 편지라도 써놓은 거 아냐? 뒤집으니 정갈한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미친, 미친놈아 이걸 이제 꺼내 보면…! 스스로를 매우 치고 싶은 걸 참고 한 자 한 자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세진이에게

 

편지를 쓰는 건 오랜만이라 어색하네. 그래도 매일 보던 사람이 내일이면 간다니까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편지를 써 보려고 해.

너는… 진짜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시끄럽고, 거리낌 없고, 그런데도 부담스럽지 않은 신기한 사람이었어. 욕 같이 보여도 칭찬이다. 눈치챘겠지만 난 조용히 지내는 게 좋다. 지루하게 가게만 보고 있는 것도 사실 나쁘지 않았어. 근데 니가 자꾸 놀러와서 떠들썩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신기하지? 나도 좀 신기해.

처음엔 한 달도 안 돼서 돌아갈 거면서 왜 자꾸 정 주지 싶은 생각도 했다. 근데 그냥 너랑 있으면 별로 생각이 안 났어. 그냥 너랑 있는 순간에 집중하게 됐어. 그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 부모님 돌아가신 뒤로는 할머니가 있어도 늘 혼자 미래를 걱정하게 됐는데 너랑 있으면 그런 게 하나도 생각이 안났어. 너 진짜 대단한 놈이다.

가서 연락 끊기면 죽는다. 니 생각보다 내가 너를 많이 가까이 여기니까.

아프지 말고 기죽지 말고 살아. 잘하겠지만.

보고 싶을 거 같기도 해. 나도 서울 갈게. 또 보자.

20XX. 08. XX. 박문대가.

 

 


…연락 끊기면 죽는다며 박문대야.

편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살짝 구겨졌다. 아차 싶어 책상 위에 엽서를 올려두고 다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엽서는 또 비 오는 날 그림이네…….”

 


좋아한다고만 안 했지 이 정도면 고백한 거 아니냐 문대문대야. 그런데 왜,

세진의 눈에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전화번호까지 없앤 마당에 SNS 같은 거 할 성격도 절대 아닌 건 알지만 뭐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 SNS를 뒤졌다. 당연하게도 문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세진은 그 후로도 종종 문대의 흔적을 찾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선명했던 여름의 기억은 점점 다른 기억들에 밀려 나가고 고3이 되었을 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선거운동을 하고, 당선된 뒤로는 학생회 일을 하고 공부하고 입시 챙기느라 다른 것들에 신경 쓸 여유가 아예 사라졌다. 가끔 귀가 후 씻고 나와 방에 들어올 때 책상 위에 있는 ‘여름의 기록’이 눈에 들어오면 잠깐 문대를 떠올리다 이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잘 지내겠지, 어디선가 잘 지낸다면 그걸로 된 거 같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걔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걔가 어디선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수시로 총 세 군데를 썼다. 그중 두 군데가 붙었고, 세진이 선택한 곳은 Y대 경영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안전빵으로 쓴 곳이라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도 공부를 못하지 않았던 데다 학생회 활동으로 생기부에 쓸 것도 많았고 교내 수상 실적도 꽤 있었다. 자기소개서에는 아예 대놓고 1학년 때 뒤집어썼던 학폭 이야기를 썼다.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저를 가해자로 지목한 무리는, 솔직히 어떻게 됐는지 관심도 가지 않았다. 확실한 건 세진 만큼 잘 되진 않았을 거였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

“어~ 세진이 왔네? 우리 잠깐 밥 먹으러 갈 건데 과사 좀 봐줄 수 있어?”

“안 잠그시고요?”

“김연호 교수님 계절학기 듣는 학생들 오늘까지 과제 제출이라 아마 계속 올 거라서~ 그것만 받아줄래? 거기 우산도 써도 되는데.”

“그러죠, 뭐.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고마워 금방 갔다 올게. 과제 받으면 내 책상에 올려두면 돼!”

“네~”

 

 

빗줄기가 영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은 과사로 왔다. 우산만 빌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발목이 잡혔다. 평소에 세진의 편의를 많이 봐주던 조교의 부탁이라 쉽게 거절하기도 뭐 했다. 어차피 비 좀 그치면 갈 생각이었으니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세진은 우산을 챙기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기껏해야 30분 안 돼서 돌아오실 것 같고… 그냥 과제 제출만 안내하면 되니까 뭐. 세진은 습관적으로 폰을 들었다. 단톡방마다 알림이 가득했지만 어쩐지 숫자를 보자마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사람 들어왔는데 자고 있으면 좀… 그런데.

 

 


“안녕하세요.”

 

 

문소리와 말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휴, 민망할 뻔했네.

 

 


“김연호 교수님 과제 제출하러 왔는데요.”

 


발성 좋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공간을 채웠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 여기 조교님 책상에 두시면…”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곧장 책상으로 향하는 옆모습이 익숙했다.

 

 


“…박문대?”

“네?”

 

 


세진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박문대였다.

 

 


나도 서울 갈게. 또 보자.

 

박문대가 그 약속을 지키기까지 딱 1068일 째 되는 날이었다.

 Playlist

 ​♥     눈기린  /  도리  /  마리
​ ♥     팽  /   bdb-

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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