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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포함 22,707자

0. 노플랜, 벗럭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게다가 매사엔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지.

늘 최상의 선택과 완벽한 타이밍을 거머쥘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선 안 될 사실이 있다. 인생이란 선택을 종용하면서 뜻대로는 쉬이 굴러가지 않는 우당탕 속성을 가졌다는걸.

그렇다면 방법은 달리 없지 않은가. 자기 기준에 최선의 선택을 하되, 때로는 앞뒤 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할 것. 그냥 냅다 상황에 몸을 맡겨버릴 것. 

대체로 마음 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계획’은 무쓸모가 되곤 하는데, 참 얄궂게도 구깃구깃 작은 점이 되고 마는 ‘계획’이 실은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는 거다. 하필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면 쓸수록 빛을 보지 못하고 침몰하는 결말마저도. 절망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결국 감을 따르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쩌다 마주칠지도 모를 행운을 기대하기 때문에. 

 

여기, 명석한 두뇌와 눈치를 겸비한 제법 계획적인 두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철저히 무계획적으로 행운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1. 시그널

 

아우터까지 갖춰 입어야 했던 무렵에 출발한 투어는 계절이 반 바퀴를 더 돌 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장소인 일본 공연을 앞두고 무르익은 더위에 기온은 나날이 치솟기만 했다. 출국 전 최종 연습이 한창인 연습실도 예외는 아니어서, 곡과 곡 사이 짬 날 때마다 손부채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10분 쉬고 다시 갈게요~”

 

군무 난이도가 엔딩으로 갈수록 극악인 곡을 방금 끝냈다고는 믿기 힘든 가지런한 목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툭 툭 쓰러져 눕는 소리가 이어졌다. 체력에 아무리 신경을 써도, 연차동안 쌓인 노하우가 있다고 한들 그만큼 안무의 수준도 높아져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정작 그 안무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은 여전히 곧게 선 채로 땀만 닦아낼 뿐이었지만. 문대는 아무래도 그 순간만큼은 세진을 향한 얄미움을 떨칠 수 없었다. 얼마나 노력해 갈고 닦아 만들어낸 결과물인지 곁에서 지켜봐 알면서도. 체력 같은 건 아무리 똑같이 단련한들 타고난 출력이 같아지지는 않으니까.

바닥에 잠시라도 누울지 고민하다 단념한 문대는 거울에 기대앉았다. 자세를 잡고 나니 그제야 목이 탔다. 주변에 있을 거로 생각했던 물병은 하필 애매한 거리에 놓여있었다. 아, 귀찮네. 지쳐있긴 한 모양인지 의식적으로도 떠올리지 않으려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래도 갈증 난 채로 귀찮아하는 것보단 낫겠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손가락 끝부터 작게 움찔거려 봤지만, 전신은 시위라도 하듯 딱 버티고 말을 듣질 않았다. 그럼 심호흡 다섯 번만 하고 가지러 가자. 그때까지만이다. 문대는 타협에 응해줄 의사가 있는지 상대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어차피 자기 몸이었지만-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세 번째를 헤아렸다.

 

“문대문대, 오늘은 잘 버티는데? 세진이랑 한 운동 효과인가?”

 

눈을 가리고 있어 느닷없이 감돈 찬 기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문대가 목표로 하던 물병을 저쪽 손에 들고, 막 냉장고에서 꺼냈는지 표면이 불투명한 물병을 든 다른 한 손이 문대의 볼에 닿아있었다. 아. 짤막하게 놀랐음을 표현하자 늘씬하고 탄탄한 팔이 눈앞에 드리워지더니 물병을 내밀었다. 

이게 아니라 저건데, 내 물병.

 

“시원한 거 마셔. 차가우니까 급하게 마시지는 말고.”

 

말로 하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내어놓은 세진은 새 물병을 건넸다. 선뜻 받지 않는 문대의 시야 안에서 그것은 시계추같이 좌우로 흔들렸다. 받아들 때까지 요지부동일 게 뻔해 손을 뻗어 쥐고 나자 문대가 가졌던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아, 갈증 난다~”

 

물병을 열어 남은 물을 마시는 동작엔 망설임이 없었다. 자칫 자기 물병을 세진의 것과 착각했던 게 아닌지 되돌아볼 정도로.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됐다. 헷갈리지 않으려고 물병에 둘러놓은 강아지가 그려진 손목밴드는 그대로였고, 이것의 주인이 박문대임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물병의 소유권을 이제와서 주장하기도 머쓱할 정도로 세진의 행동은 빨랐다. 게다가 보는 사람의 갈증도 해소될 만큼 시원하게 목울대를 움직여가며 물병을 비워냈다. 미지근해졌을 게 뻔한데 마치 갓 꺼내온 냉수를 마시는 것처럼 맛있게도 말이다. 황당했지만 그러고만 있기엔 세진이 베푼 것은 명백한 호의였다. 그러자 의문이 떠난 자리에 새로운 의문이 피어났다. 저놈이 왜 저러지? 나한테 시원한 물 주려고? 그렇다면 식은 물은 왜 지가 마시는데? 말릴 틈도 없이 물음표는 빠르게 증식했고 저들끼리 머릿속에서 엉켜 들었다. 

내버려 뒀다가는 생각에 매몰될까 봐 잠시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한껏 젖힌 고개 덕분에 드러난 목선이 바로 보였다. 쭉 뻗어서 과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미 넘치는 모양새였다. 자기 관리에 진심인 만큼 그의 곳곳에서 잘 다듬어져 있다는 게 느껴지곤 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에도. 

자각도 없이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던 걸 퍼뜩 깨달은 문대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왜 저기를 보고 있었지? 어디 홀리기라도 했나 기억 한 뭉텅이가 빈 느낌이 들었다. 방금 물을 마셨는데 왜 또 목이 타는 것 같은지. 문대가 홀로 생각의 꼬리를 무는 동안에도 세진의 동작에는 변화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같은 곳을 바라봤다. 단조로운 목울대의 움직임에 조금씩 목선을 따라 올라가니 앵글이 얼굴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번엔 투명한 물체에 닿아 살짝 짓눌린 혈색 좋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정전이라도 일어난 듯 쉴 새 없이 늘어나던 물음표는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러다 화면도 나가서 까맣게 물든 사방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었다. 

정적. 혼돈. 세상이 잠깐 멈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모든 게 정지했다. 시스템의 장난질이라면 위급 상황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마자 문대는 급히 세진의 상태를 살폈지만 특이점은 없었다. 잘못 짚었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책 한 권 어치 다양하게 일어났던 삶이라도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는 당황부터 하게 되어있다. 콩알만 하던 물음표 하나는 차츰 사이즈를 키워 어느덧 문대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거대 물음표를 비집고 현실로 빠져나오니 단체로 일시정지 되어있던 주변은 절찬 재생 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입술과 입술의 접촉이 이어지고 있다는 거다. 엄밀히 말하면 그사이에 투명한 물체가 있긴 있었지만서도. 그래도 제 입술이 닿았던 곳에 저 입술이 닿았는데 그건 입술과 입술이 닿은 셈이 아닌가. 입술 탈트붕괴를 일으키며 대차게 가동을 멈췄던 머리가 안간힘으로 위태롭게 굴러가다 기어이 퍼져버렸다. 한계였다. 더는 물음표를 증식시킬 여력이 없었다. 싸움을 시작한 적도 없이 전의를 잃은 문대를 앞에 두고 드디어 물병을 다 비운 세진이 고개를 바로 세웠다. 마침내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아, X발. 

 

문대는 그대로 이마를 바닥에 갖다 붙였다. 쾅 내리박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건 자기 몸 자체가 자산임을 한 톨의 이성이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박력은 다소 없더라도 일단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세진의 시야에서 저를 감추는 게 급선무였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건 다음 단계였다. 

왜 뻔질나게 봐 왔던 얼굴이 유달리 멀끔해 보이는지. 적당히 예측하고 넘겼던 것을 하나하나 궁금해하는지. 숱하게 해 왔을 행동에 의도를 찾게 되는지. 어째서 입이 말라 오는지.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나는지. 입술과 입술 사이에 가로막힌 것에 대한 다른 가정을 하게 됐는지.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특별해졌는지.

 

그만, 그만하라고. 

 

차가운 지면에 열이 올랐던 살갗이 닿으니 치익 소리가 나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빠르게 냉기가 퍼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빙글빙글 도는 눈앞이 영 탐탁지 않았다. 열사병이라도 온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너무 더우면 실내에서도 걸릴 수 있다지만 확실히 그건 아닌 게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멀쩡하지 않은 것도 맞는 얘기다. 자체 평가했을 때 범상찮은 반응과 상상의 흐름은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 나가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무정한 시간은 흘러갔다. 

 

“문대문대? 괜찮아? 어디, 얼굴 좀 봐…”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세진과 저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곤란하겠는데. 꿈쩍도 않고 시위를 벌였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의 몸은 잽싸게 움직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문대는 아무 일도 없고, 나는 괜찮다는 뜻을 담아 손을 휘저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세진을 등진 채 곧장 출입문 쪽을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상태창조차 반응하지 않는 별난 상태 이상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게 큰세진, 저놈 때문이라면.

 

완전히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마저도 생생해서 문대는 고개를 세차게 털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2. 일대일 승부

 

“그럼 짐 풀고 쉬다가 나중에 내 방에서 모이자.”
 

공정한 절차를 거친 독방 뽑기에서 당첨된 청우는 당연하다는 듯 자기 방을 멤버 전원이 모일 공간으로 헌납했다. 그의 말에 짤막하게 답한 나머지 여섯은 하나둘 손에 들린 카드키와 동일한 숫자가 적힌 문 앞으로 흩어졌다. 흘끗 본 방 번호가 약간 떨어진 숫자임을 확인한 문대는 숫자끼리의 간격이 곧 방끼리의 간격일 것이라 추리했다. 그 예측은 맞아떨어졌는지 앞장선 이의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숙소가 2인 1실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룸메이트 뽑기는 무조건 제가 유리한 게임으로 골라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결국 문대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비행 대기 중에는 시간이 부족해 서면으로 대신하기로 한 인터뷰 답변 작성에 바빴고, 비행 도중에는 빠듯한 일정이 앗아간 수면을 채우느라 게임 할 여유가 없었다. 내려서도 정신없이 이동하다 보니 눈 깜짝할 새 호텔 앞이었다. 이럴 때는 대체로 속전속결의 운빨 게임밖에 선택지가 없었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래… 뭐 설마 걸리겠냐.

초조함을 애써 숨기며 결과를 펼쳐 보았을 때, 문대는 자신의 행운에 절망했다. 

 

“어! 문대문대, 우리 같은 방이네~”

 

하필이면. 웃는 얼굴로 하이 파이브를 청하는 손을 빤히 보다가 마주 쳐 주면서도 문대는 갈피를 잡지 못해 오락가락했다. 널뛰는 속을 다스리지 못해 자리를 피했던 게 며칠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감정을 낱낱이 파헤쳐 원인을 밝혔다면 더는 회피로 맞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잠깐 주어지는 여유마저 온전히 공적인 스케줄을 위해 소비해야만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그날 이후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와중에 단둘이 있어도 괜찮을지… 확신이 없었다.

‘세진’과 ‘어색함’이란 두 단어를 함께 떠올렸을 때 매칭률이 바닥을 친 지는 꽤 됐다. 그러니 그의 존재를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이 또 올 거라고 상상이나 해 본 적이 있던가. 그만큼 마음을 터놓은, 가까운 친구 사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서 있는 세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작정하고 원인을 찾자면 저에게 있을 터였다.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내가. 너를. 자꾸 의식하지 않았다면. 하나하나 반응하지 않았다면.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았다면.

그런데도 이 난감한 상황이 불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적인 행운, 딱 그랬다.

 

“이야~ 방 좋다~”

 

아무리 내부가 넓다 한들 방으로 들어가는 문 사이즈는 여느 호텔과 다르지 않아서, 세진의 감탄이 사실인지 그의 커다란 뒷모습에 가려져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좀 들어가 봐. 등을 툭툭 치자 그제야 아아, 미안미안. 하며 비켜주었다. 정면이 모두 트인 창이라 바깥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감탄사가 절로 날 만큼 시원스러운 풍경에 자석처럼 이끌려 내다보기를 수 분, 조금 먼 곳에서 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혹시 스위트룸인가?”

 

이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문대는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훑어야 눈에 다 담길 정도의 너른 공간. 그곳만이 아니었다. 문대가 서 있는 곳이 거실이라고 한다면 세진이 간 곳은 침실이었나보다. 적어도 문대의 시야에 침대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고급스러운 탁자와 가죽 소파만이 놓여있었다. 

테스타의 인지도가 올라갈수록 회사에서 해주는 지원이 나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대기업 산하 시절에도 복리후생은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겨야 한다고 여겼던 문대는 독립 이후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선에서 소속 구성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티스트는 물론 스태프 한 사람까지도. 그중에 해외 투어 때 묵는 호텔 객실의 등급도 아마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렇다고 스위트룸이라니. 전례 없는 파격 대우였다. 설마 다른 방도 이런 건가? 한 호텔에 스위트룸이 몇 개쯤 있지? 온전한 휴식을 위한 훌륭한 환경 조성은 당연히 기꺼운 일이지만, 과한 정도에 대해서는 언질을 주는 게 낫겠지... 회사 경영진 마인드로 심각해진 문대가 여전히 응접실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는 사이, 한 바퀴 투어를 마친 세진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그에게 다가왔다. 

 

“따로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누구한테?”
“방 예약해주신 분이랑, 매니저 형? 또… 멤버들?”
“갑자기?”
“아, 문대문대 단톡방 안 봤구나? 우리 방만 스페~셜 하더라고.”

 

세진의 손에 들려있던 화면이 성큼 문대의 눈앞에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움직이니 돌아다니며 찍었는지 방 이곳저곳을 담은 사진이 연달아 표시되었다. 뒤이어 현란한 영문 감탄사와 스티커 여러 개, 그리고 세진이 왜 수상소감 읊듯이 감사를 전해야 할 사람을 언급했는지에 대한 진상이 쓰여있었다. 

 

“생일…”
“와, 진짜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 투어 막공 날 생일인 것만 해도 충분한데 말이야.”

 

멋쩍어하는 걸 보니 문득 몇 해 전 이맘때가 떠올랐다. 첫 휴가 때 긴장이 풀려 혼자 숙소에서 앓고 있던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던 세진의 모습이. 처음엔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침착하게 저를 추슬러 병원까지 동행해 주었고, 숙소로 돌아와 화제가 그의 생일로 향했을 때도 크게 내세우지 않던 기색이 의외로웠다.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챌 수 있다는 건 이미 세진의 곁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그날 자리를 떠나면서도 문대의 상태를 염려하던 인사가 줄곧 마음에 남아있었다. 단순한 고마움, 그 이상의 감정이 혼자 남은 문대의 곁을 채웠음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타인의 진솔한 호의와 온기 어린 관심이었다. 

과거에는 그저 나쁘지 않은 기분, 정도로 정의되었던 감정이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커다래진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마음 위를 거침없이 덮어 버려서, 문대는 속수무책으로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 

 

 

 

“다들 모였으면 스케줄부터 같이 확인하자.”

 

청우가 혼자 쓰는 방도 일곱이 편하게 앉을 수 있게끔 공간이 넉넉했다. 모두가 얌전히 주목한 화면에는 일본에서의 일정을 정리한 목록이 띄워져 있었다. 이틀간의 주말 공연까지는 앞으로 3일. 전날 최종 리허설을 제외해도 하루가 남았다. 우리 이날은 놀아요? 단도직입적인 유진의 질문에 설마, 하면서도 모두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놀러 온 게 아니란 건 다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외를 다니면서 최소 하루 이상의 자유 시간은 주어졌던 터라 충분히 근거 있는 추측이기는 했다. 

 

“아, 저희도 하루를 다 비워 보려고 했는데 여의찮아서요. 짤막하게 사진 촬영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이쪽 팬클럽 회원에게 정기적으로 발송하는 회보용이라는 추가 설명이 덧붙었다. 이왕 현지에 온 거 현지 배경의 사진이 들어가도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다면서. 당연히 단체 촬영이라 생각했는데, 넘어간 다음 페이지는 네 가지 패턴의 계획서였다. 각각 다른 장소와 몇 가지 컨셉 후보가 적혀 있었고, 인원수도 표기돼 있었다. 

2/2/2/1 

집중해서 내용을 읽던 문대의 눈동자가 나열된 숫자 위에서 멈추었다. 어째 익숙하다 싶더니. 이거 숙소 방 인원 분배랑 똑같잖아…

 

“촬영 그룹은 그럼 룸메이트로 갈까? 숫자도 딱 맞고.”

 

혹시나가 역시나… 어째서 이런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딱히 세진과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휘황찬란한 스위트룸이 달갑지만은 않았던 건 그런 분위기의 공간에 단둘만 남겨진다는 상황을 피하고 싶을 뿐이었지, 세진이 문대에게 있어 불편한 사람은 아니기에. 그러니 둘이 한 조가 되어서 촬영을 하고, 나란히 찍은 사진을 길이길이 남기기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문대의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그를 이 이상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세진과 떨어져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나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반드시 위험 요소가 있을 테니까.

 

“그러면 조합이 너무,”

 

흐름을 가로막기 위해 뱉은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뚝 끊어졌다. 답지 않은 모습에 모두의 시선은 문대에게 집중되었다. 어차피 룸메이트 조합은 투어 비하인드 영상에 담길 테니 팬들에게 보일 기회는 있고, 그럼 사진 구성을 똑같이 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덧붙일 생각이었다. 납득 가능한 의견은 채택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면 문대의 계획대로 흘러가기에 다른 문제는 없었겠지만.

입을 열며 눈을 드는 순간, 더는 태연할 수 없었다. 어디를 바라볼지 미리 알고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저를 기다리던 세진의 두 눈과 마주치고 나니 문대는 하려던 이야기가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서로 똑같은 생각을 떠올려서 눈빛을 주고받으며 소통한 때와는 달랐다. 

세진은 문대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도 그의 눈 속에 채워진 감정이 문대의 온 신경을 앗아갔다. 마치 일렁이는 불꽃 같기도 했고, 파동이 인 수면 같기도 했다. 무엇도 아니지만 반대로 무엇도 될 수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반토막 났던 말을 마무리하며 문대는 세진의 곁에서 멀어지려 떼었던 한 걸음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어렵사리 정의 내린 감정의 이름.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욕망’이었다. 

 

 

 

문대는 손에 든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폈다. 필름을 넣어 쓰는 일안반사식카메라와 클래식한 외형은 빼닮았지만 속은 디지털인 요즘 모델이었다. 이번 촬영에서 카메라는 소품이면서 동시에 수단이었다. 이것으로 직접 찍은 사진이 세진과 함께 채울 분량의 메인으로 들어갈 거라 했다. 너무 잘 찍을 필요는 없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달라는 게 촬영을 지휘하는 스태프의 유일한 주문이었다. 

작동법은 이전에 쓰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금세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지만, 난관은 따로 있었다. ‘대관람차 안’이라는 장소와 ‘자연스러운 모습’ 담기.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했더라도 눈치 빠른 세진은 최근 문대의 태도에서 석연찮음을 느꼈을지 모른다. 호텔 방보다 더 제한된 공간에선 도망칠 방법도 요원했다. 그래도 이건 일이니까. 카메라 앞에서 허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두 사람의 공통된 직업정신이었다. 진짜 표정이 어떻든, 실제 감정이 어떻든 간에 가공되지 않은 이세진과 박문대가 카메라에 담길 가능성은 0%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문대, 이 상태에서 깨끗하게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카메라 뒷면에 붙은 화면을 보고 있는 세진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똑같은 카메라인데도 세진의 커다란 손안에 들려 있으니 꼭 장난감 같았다. 이 일을 하다 보면 피사체가 되는 경험은 숱하게 많아도 반대는 빈도가 적은 편이었다. 장비까지 마련해서 즐기는 취미가 아니고서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건 스마트폰 카메라 정도고. 세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 설정을 바꿔봐.”

 

문대는 자기 카메라의 설정 화면을 불러와 세진에게 보이도록 각도를 기울여 주었다. 그거 어디 들어가면 나오는데? 아. 메뉴 버튼 눌러서, 위에서 두 번째. 그다음에 이걸 이렇게… 

서로의 화면을 비교하느라 좁은 공간 안에서 둘 사이는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질문 공세가 끝나고 잠잠해진 세진이 설정을 하나씩 바꾸어 제 것과 완전히 똑같은 상태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문대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세진과는 생각이 워낙 비슷한 방향으로 튀고 머리 굴러가는 경로가 겹쳐서 의견이 불일치한 적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생활 속 사소한 습관, 고르는 취향,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순서 같은 건 꽤 달랐지만…

아닌가? 취향도 습관도 원래 비슷했던가? 

최근 기억은 어째 항상 같은 걸 고르고,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것들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크게 다르지 않았거나. 그런데 왠지 다 아닐 것 같았다. 그의 의지로 문대를 곁눈질하며 하나씩 바꾸어 갔는지도 모른다. 점점 일치해 가는 두 개의 화면처럼. 그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세진이라면 이제 훤히 읽을 수 있다고 과신하는 사이에.

 

“다 했다~ 테스트 해 봐야지!”

 

문대문대, 여기 봐봐~ 간격을 넓히며 멀어지는 세진의 부름에도 문대는 카메라를 쳐다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는 세진을. 얼굴을 감추고 싶은 순간들이 늘어간다. 시선을 빗겨내며 눈에 스친 청량한 미소는 피사체에 바람직해 보였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아쉬울 만큼. 문대는 마주 들어 올린 카메라 뒤로 표정을 숨겼다. 이건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욕심낼 기회라고, 누구도 듣지 못할 거창한 이유도 붙여가면서. 

 

“아, 뭐야아~ 세진이가 못 미더워?”
“움직이지 마라.”

 

눈가에 댔던 카메라를 내려 완전히 드러난 얼굴을 놓치지 않고 새겨 넣었다. 연달아 터지는 셔터 소리에 문대는 필사적인 마음을 숨겼다. 뷰파인더에 가득 담긴 세진의 미소는 이내 영글어 함박웃음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몇 컷 담으려고 하니까, 편하게 한 바퀴 더 타고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촬영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시설을 통째로 빌린 덕분에 대관람차에 오르는 건 세진과 문대, 그리고 촬영할 스태프 셋뿐이었다. 매무새 체크를 받고, 먼저 탑승한 이들을 배웅하고. 몇 대의 빈 관람차를 보내고 나자 두 사람이 탈 관람차의 열린 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자리에 앉는 사이에도 점점 육지와 멀어지는 중이었다. 사진을 찍어야 했던 처음과 달리, 유유자적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있자니 새삼 추억이 밀려들었다. 대관람차를 마지막으로 탄 게 몇 년 전인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상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종의 ‘대리만족’. 날지 못하는 인간이 조금이라도 하늘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퍽 인상적이었나보다. 이번에도 같은 감상일까. 문대는 궁금해졌다.

 

“아, 좋다.”

 

대화를 연 세진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서로 말없이 보낸 몇 분 남짓한 시간 속에서 어색한 기류를 느꼈을까 봐 문대가 가졌던 염려가 무색하게도, 그 말에는 꾸밈이 없는 듯했다. 항상 바르게 유지하는 자세가 살짝 흐트러진 채였다. 세진의 주변 분위기 자체가 느긋한 템포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에 고정된 것을 확인한 문대가 먼저 정면을 응시했다. 날렵한 선으로 이루어진 옆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동안 바쁘긴 했지.”
“오~ 문대문대 입에서 바빴다는 얘기 나올 정도면 우리 바빴던 거 맞네~”
“넌 어차피 달가웠을 거 아냐.”
“역시 문대 눈은 못 속인다니까. 그래도 쉬니까 좋긴 좋다~”

 

좁은 공간에서 긴 팔다리를 다 펴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기지개를 켜는데도 서서히 마주한 얼굴은 어딘가 개운해 보였다. 자, 다시 열일 해 볼까! 세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빙긋 웃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화는 반년 넘게 이어온 투어의 회포와 남은 마지막 공연, 노래와 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지났다. 워낙 붙어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자주 꺼낼 수 있는 화제임에도 주고받는 말은 끊이지 않았다. 공통의 관심사, 함께 이룬 기적, 걸어갈 같은 미래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어느새 촬영 중이라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카메라 앵글 밖에서처럼 그때를 온전히 즐겼다. 덕분에 문대의 전신을 내달리고 있던 묘한 긴장감도 분위기 속에 녹아들었다.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데. 평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관계에 반사적으로 든 감정은 안도였다. 세진은 그대로였고, 자신도 그대로라면, 우리는 변한 게 없다. 안절부절못했던 며칠 간이 허무하게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이게 맞는 거니까. 

 

-세진 씨, 문대 씨 촬영 마무리됐습니다! 내려오실 때까지는 편하게 계셔도 돼요!

 

 

세진과 문대가 타고 있는 차가 마지막 사분면에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 마련되어 있던 무전기를 통해 소식이 전해졌다. 슬쩍 곁눈질한 창밖으로 이미 도착점에 내린 스태프들이 자그맣게 보였다. 이제 지켜보는 눈도 없는 진짜 일상으로 장면이 전환된 거다. 더 편안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마주 앉은 사이에는 대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아까와 달리 침묵이 흘렀다. 

이대로 조용히 내려가도 괜찮겠지. 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문대는 세진과 있을 때 늘 누렸던 편안함을 되찾고 싶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떠올린 몇 가지 화제는 모두 시시콜콜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돌파구를 제시한 쪽은 세진이었다. 

 

“문대문대, 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안 돼. 본능적으로 그렇게 뱉을 뻔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이 그랬다. 지금은 세진의 질문이 무엇이든 그게 애써 유지한 평정심에 파문을 일으킬 것 같았다. 와중에 우스운 건, 막고 싶다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버티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는 끝내 네 뜻대로 하기를 바라게 될 텐데. 

문대는 아무런 말 없이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깐의 침묵이 허락의 의미임을 세진이라면 알아줄 거였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요즘 묘하게 나한테 거리 두나 싶어서. 혹시나 그런 게 있으면 풀고 가야 좋잖아~”
“...그런 거 없는데.”

 

잘못이라면 나한테 있겠지. 그 말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올랐던 관람차는 지면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고 있었다. 그게 꼭 제 마음 같았다. 그래도 그에게는 정확히 알려주어야 했다. 자책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게. 그런 건 감정에 휘둘린 자신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말라고. 

 

“너는,”
“응, 문대야.”

 

분명하게 일러주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문대는 밀려드는 낭패감에 굳어버렸다. 세진의 두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얼굴이 선명히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여서, 세진의 목소리가 놀라우리만치 가라앉아 있어서 그랬다. 아무 준비 없이 맞닥뜨릴 게 아니었는데. 한번 의식하고 나니 서로의 무릎이 닿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챘다. 회피가 바람직한 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안은 전무했다. 모른 척이라도 해야지 저가 살 것 같았다. 

 

“잘못 없지…”

 

수그러드는 목소리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초라했다. 패배자의 음성이었다. 

결국 문대는 시야 밖으로 세진을 밀어낼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눈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그의 집중이 오롯이 여기로 향해있다 가정하니 고양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짜릿함으로 비명을 지르던 뇌가 진실 한 조각을 툭 내뱉었다.

네가 놓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놓고 싶지 않은 거라고. 

착각이 아니라면 이것은 ‘욕망’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차분한 표정으로 문대를 보던 세진은 눈까지 휘어 웃으며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손에 움찔 몸이 움직거렸다. 티가 났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대의 얼굴을 죄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나비처럼 살포시 내려앉아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가 묻어서. 말은 그게 전부였다. 닿은 시간도 찰나에 불과했다. 다만 이미 멀어진 손길에 대한 여운은 길었다. 다른 의미라도 내포한 듯이. 

 

‘괜찮아? 어디, 얼굴 좀 봐…’

 

찰나가 주는 여운, 문대에게 첫 경험은 아니었다. 연습실 바닥의 냉기가 몸 안에 번져 나가도 금세 열기에 사라지고 말던 감각. 가까이 다가온 세진의 손바닥이 아주 잠시였지만 문대의 귓바퀴에 닿았던 순간에도 똑같은 전율이 흘렀다. 

이젠 모르겠다. 정말 나만의 착각이냐고.
문대는 저를 곧게 바라보는 두 눈을 향해 묻고 싶었다. 

 

“박문대.”

 

왜 저렇게 부르는 걸까. 안 그래도 궁금한 것투성이인데. 

 

“왜.”

 

다행히 평소의 톤을 되찾은 목소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 우리가 말야.”

 

다음 말을 기다리며 멎어있는 문대를 보다가 세진은 처음으로 먼저 눈을 피했다. 멀지 않은 관람차들의 문이 차례로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 시간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절제력이 희미해진 심장은 눈치도 없이 요란하게 굴었다.

 

“우리가…”

 

처세술도 언변도 훌륭한 놈답지 않았다. 어렵사리 말을 이어가는 세진은 몇 번을 보아도 낯설기만 했다. 문대는 재촉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가 내놓은 건 말의 형태를 띤 진심이었기에. 그래서 이번에도 문대는 세진이 꺼낸 이야기의 매듭이 알고 싶었다. 네 입을 통한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여전히 친구인지.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름을 붙일 여지가 있는 관계일지. 너는 우리가 어떻길 바라는지.

철커덕-

두 사람이 타고 있던 관람차의 문이 기어이 열리고 말았다. 줄곧 세진만을 바라보고 있던 문대는 열리는 문과 동시에 서서히 닫히는 입술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두 담았다. 둘만이 존재하던 세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얕은 잠을 자며 꾼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처럼 전신에 기운이 쭉 풀렸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붉게 물든 세진의 두 뺨이, 난감해하는 표정이 그가 전하려던 나머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밟고 선 땅 위에서, 문대는 제 안에 기록된 대관람차의 감상 아래 새로운 한 줄을 추가해 넣었다. 

일종의 ‘대리만족’.
황홀한 ‘간접체험’. ◀new!

 

언제는 하강하는 관람차 타고 땅으로 처박히던 것이, 쉴 새 없이 박차 오르는 방향으로 갈아타기라도 했는지 가만히 있어도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래서 문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긴 다리로 반보 앞서가는 세진의 등과 자신의 걸음 사이에 드리워진 관계의 선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음을.


 

 

촬영이 끝난 후에도 대화가 재개되는 일은 없었다. 흩어졌던 멤버들과 다시 모여 짧은 자유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 돌아와선 새벽까지 마지막 점검을 했다. 다음 날은 예정대로 하루 꼬박 최종 리허설이었다. 휴식 시간에도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바쁜 일정을 휩쓸리듯 소화하던 템포로 모든 것이 진행됐다. 그러니 대화는커녕, 단둘의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자정 가까운 시간, 방에 돌아와 각자의 침대에 뻗어 누울 때까지도.

 

“문대, 잘 자라~”
“어, 너도.”

 

첫 공연을 앞두고 저물어가는 밤, 잠을 청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고요함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 그리고 멋대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말들을 아직은 가두어 놓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은, 둘의 필사적인 침묵이었다.

 

3. XX을 하면 바보가 된다던데 

 

“러뷰어들,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외치기예요!”
“준비됐어요?”
“하나!”
“둘!”
“셋!”

“생일 축하해!!!”

 

함성이 커다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응원봉의 밝은 빛이 일제히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늘 인생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잠시 홀린 듯 바라보던 멤버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로 순서를 이끌어갔다. 자, 우리 준비한 거. 시이작! 이어지는 익숙한 멜로디. 그곳에 모인 모두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소리를 자아냈다. 

 

사랑하는 세진이, 생일 축하합니다~ 

 

마지막 소절이 끝나고 함성과 불빛은 다시 이어졌다. 무대의 한 가운데, 멤버들의 가장 중앙에 서서 하염없이 관객석을 눈에 담는 세진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붉어진 눈가에서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의 고조가 전해져 왔다. 약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세진이 드물게 눈물을 보이는 상황은 기쁨과 감동이었다. 그래도 흘러내리는 걸 보일세라 금방 닦아내거나, 손에 들고 있는 타올에 얼굴을 숨기고 한참 마음을 가다듬을 때가 많았는데. 이곳에 모인 모두가 보내오는 애정을 고스란히 받아내고자 눈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방울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름답다. 문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한한 사랑을 보내주는 고마운 사람들, 모두의 바람으로 만들어진 이 무대라는 장소, 함께 공유하는 꿈같은 시간. 그리고 내 곁에 선 너. 모든 것이.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을 때처럼 감정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어디서 자꾸 샘솟는 사랑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뻥 하고 터져버리기 전에 막아서야 하는 걸 머리는 알면서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몸과 마음을 맡겼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이번에도 감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에 혼란을 느꼈던 지난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짜릿함이 문대를 지배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진솔한 감사 인사를 전하는 세진의 등을 문대는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팬들의 박수갈채에 화답하듯 마지막 앵콜곡을 소개하는 멘트가 이어졌다. 성대한 마무리만을 남겨둔 공연은 다시 힘차게 달려갈 준비를 마쳤다. 경쾌한 비트의 전주가 시작되어 가운데 모여있던 일곱 멤버가 무대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기 직전에 문대의 손이 세진의 등에서 떨어졌다. 아주 작지만 선명하게 파고드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고마워.”

 

귓가에 재빨리 닿고 멀어진 온기를 따라가자, 온기의 주인은 이미 함박웃음으로 멀리 달려 나간 후였다. 하. 또 당했네. 문대는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호흡을 정돈했다.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한 열기가 몸 안에서 활발히 돌고 있었다.  

 

 

 

“그럼, 러뷰어들~ 한국 가서 만나요~ 너무 고마워요! 쪽! 쪽!”

 

공연이 마무리되자마자 켠 라이브 방송에서 한참 고맙다는 인사를 연발하더니, 뒤풀이 겸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는 길을 찍고 있는 비하인드 카메라 앞에서도 눈물의 인사는 이어졌다. 팬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인색함을 모르는 세진답게 평소보다 훨씬 간지러운 말도 참지 않았다. 팬들과 한 공간에서 교감하며 서는 무대는 어마어마한 아드레날린을 동반했기에, 모두가 들떠 있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세진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콘서트는 성공적이었고, 오늘은 세진의 생일이었으니까.

 

“다들 오늘 너무 고생 많았어. 늦지 않게 자자.”

 

피곤함도 잊은 목소리들이 아쉬운 기색으로 인사를 나누며 흩어졌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늦게까지 한데 모여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남은 일정을 고려하면 쌓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했다. 잘 자. 내일 봐. 언제나와 다름없는 인사. 거기에 특별한 인사가 더해졌다. 축하해.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인사에 오늘의 주인공은 웃으며 화답했다. 멤버들이 차례로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복도에 남은 건 둘 뿐이었다. 몇 걸음 더 단둘이 나아가는 동안에도 문대의 인사는 세진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축하한다 말고, 다른 말도 함께 밀려 나올까 봐서. 그렇게 둘은 말없이 걸었다.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입구 조명등만 밝힌 채 실내는 여전히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먼저 방으로 들어선 문대가 스위치로 뻗은 손이 가볍게 가로막혔다. 당혹스러움에 돌아보려던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뒤에서 끌어안은 힘이 몸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구속했다. 팔을 가로막았던 커다란 손은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려온 다른 손과 겹쳐져 문대의 심장 근처에 놓였다. 제 것이 아닌 숨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들렸고, 항상 세진에게서 나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자극에 몸속을 맴돌던 열기가 더욱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거울을 본다면 얼굴이 붉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호흡이 가빠지는 만큼 심장도 빠르게 뛸 텐데. 세진의 손 아래서 요동치고 있을 박동을 생각하니 더 열이 올랐다.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박문대.”

 

들떠 있는 목소리만 한참을 듣고 왔는데 갑자기 낮아진 톤으로 불리는 이름은 이유 모를 중압감을 주었다. 또 왜 그렇게 부르는데. 속 시끄러워지게…

 

“왜, 이세진.”
“나 하고 싶은 얘기 한다, 지금부터.”
“......”
“오늘은 안 물어볼 거야. 얘기할 거야. 알았지?”

 

왜냐면, 내 생일이니까. 들어줘야 해. 무대 위에서처럼 작아진 목소리여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로 너무나 가까웠다. 세진의 목소리가 내는 울림이 꼭 몸 안에서 나는 듯했다. 마치 하나가 된 느낌. 그와 밀착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문대는 가만히 기다렸다. 신호를 영락없이 알아챈 세진의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우리가 만약, 친구가 아니게 되면… 어떨 거 같아?”
“안 물어본다며.”
“아차, 그럼 물어보기도 할래. 대답해 줘.”

 


말끝이 늘어지는 게 술이라도 마신 사람 같았다. 알코올 한 방울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길 주저 않던 세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나에게 주려는 게 그런 거라면. 

 

“절교하자는 뜻이냐?”
“진심이야? 세진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뭔데.”


“친구로서가 아니라, 너한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됐다는 얘기야.”

 

왜 하필 그때 시간이 지나 꺼졌던 조명에 불이 들어왔는지. 왜 하필 그때 몸의 방향이 돌아가 그와 마주 서게 됐는지. 왜 그 눈을 보게 되었는지. 다른 의미가 무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확실한 ‘욕망’이 거기 있었기에.

 

“그런데 친구를 왜 못해?”
“...뭐?”
“설마 친구 하면서는 다른 거 할 자신 없냐?”
“......”
“쫄리면 관두고 하나만 하든가.”
“와… 진짜 박문대.”

“근데 너라면 안 그럴 거잖아. 다 잘할 수 있잖아.”

 

아니야? 세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던진 물음은 스스로에게 박아넣는 쐐기이기도 했다. 감정의 혼란을 겪고 그것을 그저 털어내야 한다고만 여겼던 이유. 그 본질에는 어쩌면 평생 다시 만나기 힘들, 친구 이세진과 테스타라는 기적 같은 존재가 세진을 앞에 두고 들끓던 감정과 공존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은 고민을 낳았고 고민은 끝을 몰랐다. 세진의 앞에서 자꾸만 숨기고 싶었던 건, 사실 얼굴이 아닌 커지는 감정이었다. 류건우와 박문대의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해법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었을까 할 정도로. 버티고 견뎌내면 체념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었다. 문대의 속도 모르고 다정한 세진은 자꾸만 웃어주고, 눈 안 가득 저만 담았다. 욕망을 숨기지도 않았다. 자기를 잘도 숨길 줄 알던 놈이. 그러니 자꾸 착각하게 됐다. 모험을 하기에는 결정적인 확신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문대는 도발을 택했다. 발끈해서라도 알아주길 바랐다. 자신의 마음 역시 세진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걸.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우리가 친구 말고 다른걸 해 보자는 그런 말이라는걸. 끌어모아 내어놓은 용기라는걸.

 

“이세진.”
“...어?”
“한 번만 얘기할 테니까 잘 들어라.”

 

문대는 내리고 있던 양 팔을 세진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고 꼭 붙잡으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둠 속에서도 무슨 영문인지 세진의 눈동자는 햇살 아래 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파도같이 일렁이던 욕망 대신에 차오른 기대가 빛나고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 …아아! 어, 고마워. 아하하. 깜짝이야, 난 또…”
“그리고,”
“그리고?”
“친구 말고 다른 것도 해. 나도 이제 친구만은 못 하겠다, 너랑.”
“진심…으로?”
“진심으로.”

 

말이 없어진 세진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빛이 모두 사라진 공간이 어둠에 잡아먹히기 전에, 문대는 재빨리 어깨를 잡았던 손으로 세진의 양 뺨을 감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조명에도, 세진의 눈에도 여전히. 

 

“야, 너…”

 

설마 빛나는 게 눈물인지 염려가 앞서 건넨 문대의 말은 다가온 세진의 입술에 막혀 맺어지지 못했다. 맞물린 입술은 참을성 없이 벌어졌고, 그 사이로 호흡과 서로의 혀가 뒤섞였다. 고개를 기울여 더 깊이 파고드는 세진의 손이 문대의 목뒤를 쓸어내리자, 세진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문대의 손에 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오래 이 마음을 참아왔는지. 그 시간만큼 입맞춤은 깊어져 갔다.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은 몸이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길고 커다란 몸이 폴짝 뛰어오르듯 그 옆에 들러붙었다. 저리 가라. 기운 없어… 손사래 쳐도 히히 웃기만 하지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더 거리를 좁혀왔다. 

 

“뭐야, 문대문대. 세진이랑 붙어있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안 돼. 오늘은 나 하자는 대로 해!”

 

문대의 어깨에 기대며 머리를 밀어 넣은 세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제 막 친구 끝. 다른 거 시작. 하기로 했다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는 따라가기 어려웠다. 침대도 널찍하게 두 개나 있는데, 굳이? 솔직히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곁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체온이 문대의 머릿속에 오래 굳어있던 사고를 흐물흐물하게 녹여냈다. 

 

“이거 꿈 아니겠지?”
“꼬집어 줄까?”
“아니아니! 아니야. 믿어. 믿지 당연히~”

 

세진이 소리 내 웃자 작은 진동이 문대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마치 하나가 된 것 같은 감각. 따뜻하지만 심장이 터질 듯한 자극. 늘 이런 식이면 어떻게 버텨야 좋을지 막막했다. 차라리 물어볼까? 네 심장은 안녕하냐고. 어떻게 버티냐고. 

저도 모르게 움직인 문대의 시선이 심장 근처에 닿은 걸 알아챘는지, 세진은 자세를 바꾸어 팔을 둘러 문대를 감싸 안았다. 서로를 향한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자 문대의 눈 바로 앞에 세진의 심장이 있었다. 그래봤자 안녕한지 어떤지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만져볼 수도 없는 것에 문대는 공연히 손을 대 보기나 했다. 그러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심장은 지금 똑같은 상태 이상을 겪고 있다고. 손바닥 아래에서 실감 나게 느껴질 정도로 세진의 심장은 요란하게 달리고 있었다. 

 

“야, 박문대.”
“왜, 이세진.”
“한번을 양보 안 해줘. 성 꼭 붙여서 부르고.”
“습관이야. 어쩔 수 없어.”
“그래, 알지.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문대야.”
“왜.”

“고마워. 정말.”

 

공연의 막바지에서 전해 들었던 것과 꼭 같은 말이었다. 똑같이 귓가에서 흩어지는 목소리. 속삭임보다는 더 분명하고, 크게 문대에게 전달됐다. 뭐가 그렇게 고마운 게 많은지. 이번엔 자신도 되돌려줄 차례였다. 세진에 대한 고마움을, 작게나마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 한마디를. 

 

“나야말로. 고맙다.”
“어떡하지. 나 또 눈물 나려고 해, 문대야.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한다.”

 

더 이상 세진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는 것이 두렵지 않은 문대는 자기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는 두 눈동자를 보며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이 될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맞은 편에 놓인 시계는 어느덧 오늘의 막이 내려갈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축하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내심 기쁜 마음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 볼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멀어졌다. 소리도 나지 않은 찰나의 접촉에도 불이 붙은 것처럼 몸 안의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방이 좀 덥나… 딴청을 피우며 세진의 품을 벗어날 생각을 하는 와중에, 문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더 꽉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세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축하할게.”
“뭐를?”
“문대문대가 세진이를 위해서 기꺼이 선 넘을 결심을 한 거.”
“바보 같은 소리네.”
“그래~ 사랑하면 너밖에 모르는 바보가 된다잖아.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 난.”
“그럼 나도 바보게.”
“...어?”
“그 선, 나만 넘었냐? 너도 넘었지.”

 

세진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떠 문대를 봤다. 그러다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깨달은 듯 큰 소리로 웃는 것이다. 

 

“어, 그러면 혹시 우리 엇갈렸어?”
“답지 않게 자꾸 바보 같은 소리냐. 같은 방향으로 같이 넘은 거잖아.”
“아아. 그게 그렇게 되나? 미안미안,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던 세진은 문대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곧게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 문대의 머리카락에 살짝 내려앉은 손길이 금방 멀어지지 않고 천천히 가닥가닥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접촉은 나른함을 불러와, 문대의 눈이 조금씩 느리게 감기고 뜨였다. 혹여 잠이 들까 조바심이 났는지 세진의 부름이 짧은 틈을 메웠다.

 

“문대야.”
“왜.”
“솔직히… 너 나랑 이럴 계획 있었어?”
“너는?”
“나? 글쎄~”
“...없었던 거 다 안다.”
“뭐야~ 그래서, 문대문대는 어땠는데?”

“나는 뭐, 이럴 계획은 없었지.”

 

문대가 팔을 들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세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멀어지지 않는 손을 더 곁에 잡아두고 싶었다. 깊이 닿아있어도 이젠 그저 편안하기만 했다. 

 

“나도. 이럴 계획은 없었어. 이렇게 될까 봐 조심할 계획은 있었지만.”

 

문대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조심할 계획이 있었다는 놈이 그런 원색적인 눈빛을 보냈단 말인가. 알아차려 달라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세진도 자기도 대차게 말아먹었다는 거다. 선을 넘지 않으려는 계획에 관해서는.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있었나 봐.”
“무슨 기대?”
“이렇게 대박 나기를.”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말이야. 이건 진짜 나답지 않았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나직하게 이어지는 세진의 말에 문대는 깊게 공감했다. 마음의 방향이 제 쪽을 가리키기를, 그렇기만 하다면 그 마음에 화답하리라는 각오가 어느새 자라나 있었기에.

문대가 잡은 손을 허리로 이끌어 온 세진이 문대의 몸을 돌려 바짝 당겨 안았다. 얼굴만 마주 볼 수 있게 좁혀진 거리에서 저를 보며 웃는 세진이 마치 그림 같았다. 관람차 안으로 들이치던 아침 햇살이 아직도 그 위로 드리워진 듯 부드럽고 따스한 미소였다. 그 온기가 그리워서 문대는 조심스럽게 햇살에 입 맞췄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무계획적으로 마주친 하나의 행운이, 두 사람에게 온전히 깃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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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기린  /  도리  /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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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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