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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moondd_22

공백 포함 6,378자

일정이 끝난 후의 새벽은 끔찍할 정도로 피곤하다. 특별 무대를 위해 동선을 맞춰보느라 평소보다 취침 시간도 늦었다. 너무 피곤하니 오히려 잠이 잘 오지 않았지만, 내일의 일정도 오늘만큼 난리였다. 제대로 소화하려면 당장 잠들어도 모자랐다.
바쁜 건 싫지 않다. 테스타를 위한 일정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쉬는 시간조차 쪼개어 쓰며 휴일 없이 달리는 일정은 덜 좋았다. 잠깐 눈 붙이는 시간이 행복해지면 슬슬 현타가 온다. 다음 활동은 진짜, 여유롭게 준비해본다….
컨셉을 미리 정하고 휴가를 가는 게 어떻냐는 말을 다음 회의에 올려볼까 생각하며 눈을 감는데, 옆자리의 큰세진이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다년간의 내공으로 머리만 대면 잠들던 놈도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이쪽과 사정이 비슷해 보였다. 언제나 그랬지만 의견 일치는 잘 되겠군……

“문대문대… 자?”
“…….”

어. 잔다. 

“내가 지금 엄청나게 황당한 소리를 할 건데… 듣고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자는 척해도 돼.”

넌 피곤하지도 않냐, 왜 하필 지금인데…. 내가 자는 척하는 거 알고 있으면서……

“있잖아, 문대야.”

…뭐……

“나 사실 지구 말고, 다른 별에서 왔어.”
미친 소리 말고 자라, 새벽 3시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큰세진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봐버렸다. 복잡미묘한, 웃음기가 일절 없는 표정의 놈을. 
큰세진은 양손으로 베개와 이불을 동시에 구기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뭘 하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어느 날의 자신이 떠올랐다. 자신이 박문대가 아니라는 걸 고백했던 그때….
나도 딱 저런 표정이었겠군, 그 생각이 들자 잠이 확 깼다.

 


더는 피곤하지도 않았다.
“…자세히 말해봐.”

 


-

 


회귀하는 놈도 있고 몸 바뀐 인간도 있고 상태창-상태창은 외계생물 비슷한 걸로 보이지만 본인 입으로 말한 게 아니니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도 있으니 외계인도 한둘쯤 있을 수 있다.
근데 몸 바뀐 놈이랑 외계인이 같은 시기, 같은 장소, 그것도 일곱 명에 불과한 그룹에 같이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심지어 소속사 하나에 모인 것도 아니고 서바이벌로 선발된 놈들 중에 있다? 모르긴 몰라도 번개에 일곱 번 맞는 게 빠를 거다.

“운명이라니까? 문대문대랑~세진이랑~”
“헛소리 그만해라.”

그리고 헛소리인 척 진심을 말하는 짓도 관둬라….


그날 밤의 큰세진은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 애썼다. 잘 되진 않았지만. 사정을 말할 때까지 안 재우겠다고-“문대문대, 그 대사 좀 야한 거 아냐?!” “닥쳐.”-윽박질렀지만 큰세진은 아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엔 제대로 말하라고 할까 했지만, 그래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저놈이 저렇게 두서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주제는 끝없이 다양했다. 오로지 큰세진의 이야기만 들으며 밤을 보냈다. 영양가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하얗게 밝아오는 밖을 보며 같은 침대에 쓰러졌다 일어난 후 소화한 다음 날의 일정은 역시나 끔찍했지만 뭐… 평소보다도 더 이쪽을 보는 큰세진과 시선을 맞추는 일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끝났으면 찝찝하지만 좋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세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조금씩 꺼냈다. 
헨젤이 뿌리는 빵가루를 따라가는 새처럼 조각을 주워 소화한다. 알지 못하는 장소와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꺼낼 때 큰세진은 즐거워 보였지만, 때때로 멈출 필요가 없는 곳에서 침묵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

 


큰세진은 자기가 아주 먼 곳에서 왔다고 했다. 지구인이 셀 수 있는 한계를 넘고 설명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끌어다 써도 공백이 남는 어떤 곳에서.

“그래서 좀 설명하기 어려운데….”
“할 수 있는 만큼 말하던가.”
“음, 다음에~? 문대문대가 좀 더 상냥하게 말해주면?”
“장난치냐.”

빡쳐서 한 대 팼다. 소리를 지르며 드러누운 큰세진이 내 다리를 잡아당겨 눕혔다. 꽉 안고 놔주지 않는 놈은 무겁고 따뜻했다. 지구인과 어디가 다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큰세진이 외계인이라는 증거는, 본인이 하는 말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믿었다. 그렇기에 믿는다. 
숨길지언정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성정을 알아서, 말을 돌릴지언정 정말로 남을 불안하게 두지 않을 다정함을 생각한다.
오로지 나 하나를 위해 꺼낸 그 말의 무게를 안다.

 


이곳에 불시착했을 때 큰세진은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다고 한다. 정말로 몇 살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학교에 가는 거였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 있으면 안심됐고, 이곳의 삶을 차근차근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랑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서….”
“그 어찌어찌는 무슨 뜻이냐.”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잘 해결됐고 지금도 잘살고 있다! 의 줄임말?”

아무래도 가족은 그냥 지구인인 모양이다.
표정이 추억을 얘기하는 정도로 밝은 걸 보면 나쁜 기억은 아니겠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걸 알아챘는지 큰세진이 씩 웃으며 먼저 말했다.

“하여튼 문대~ 너무 예리한 거 아냐?”
“뭐.”

자기가 힌트 다 줬으면서 이런 말을 하냐.

“맞아, 내가 외계인이라는 걸 말한 건 네가 처음이야.”

그 밤, 나는 큰세진의 얼굴에서 찾아낸 긴장을 잊지 않았다.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 긴장은 날카롭고 뚜렷했다.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비밀을 속삭이는 사람처럼, …지구인에게 처음 말을 건넨 외계인처럼 굴었다.
그래서…

“그럼 문대, 가자!”
“재촉하지 않아도 갈 거니까 뛰지 마라. 아직 시간 좀 있잖아.”

 

큰세진이 아는 한, 이 지구에 외계인은 오로지 자기 하나라고 했다.
어쩌다 여기 왔는지 캐묻지 않았다. 불시착이라는 단어도 꺼냈으니 혼자 이런 곳에 떨어진 게 좋은 이유 같지도 않았고, 한 번 지나가듯 물었더니 ‘문대문대가 원한다면 세진이가 말해야지!’ 같은 소리를 했다. 본인은 정말 말하기 싫다는 뜻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오롯이 혼자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큰세진은 내내 이방인의 화법으로 말했다.
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풍경에 대해 흘렸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게 된 우주선을 그리움을 담아 불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인다. 거기에 섞여 흘러나온 농담에 홀로 웃는다.

…….
큰세진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이제 있을 만큼 있었다, 우리를 만나서 즐거웠다고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다 가버리는 것도 제법 있는 클리셰가 아닌가. 영화나 소설이었다면 감동적인 마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테스타에 필요한 건 감동이 아니라 큰세진이다. 저놈이 없으면 안 된다.
간절하게 이를 갈았다.

“…문대문대? 뭐 빡치는 일 있어? 일단 진정하고….”
“진정한 상태다.”
“전혀 안 진정한 것 같거든?! 세진이 무서운데?!”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렇다고 큰세진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멤버들에게는… 큰세진이 말한 후에야 의논할 수 있겠지. 문제는 저놈이 나한테 털어놓고 만족했는지 당장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당연하다. 빡센 일정이 여전히 우리를 후려 패고 있었다. 최소 2주는 꼼짝없이 혼자 고민해야 한다….


일을 더 주면 말라 죽을 것 같았고, 일을 줄이면 슬퍼할 것 같았다. 이외에 해주고 싶은 건 없었다. 큰세진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그게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좀 빡치기도 했다.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거지.

“근데 너 이러고 있어도 돼? 멀더랑 스컬리(THE X-FILES(1993)의 주인공, 초자연 현상을 파헤치는 미국 드라마)가 잡아가는 거 아니냐.”
“그게 누군데?”
“…….”

그 뒤로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쪽팔려서는 아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대체로 나만 쪽팔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문대문대, 있잖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뭘 잘못했는지 얘기해주면 안 될까… 세진이 무서운데…….”

처음엔 재밌어하던 큰세진이 슬쩍 와서 이런 말까지 하길래 때려치웠다.
결국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던진 후에야 큰세진은 웃었다. 반은 농담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불안해했음을 안다. 큰세진은 나중에 슬쩍 다가와 물었다. 자기가 그렇게 불안해 보였냐고.
혼란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한 번 노려보고 말았다. 큰세진은 알아서 납득하고 가버렸다. 뭔데.
그냥 평소처럼 대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름 잘해준다고 한 건 모조리 실패했다. 평소에 그렇게 못 해주는 건가 싶어서 좀 반성하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굴자 큰세진은 오히려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

 


까마득히 먼 곳에서 날아온 외계인은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만 건넸을까.
어째서 내가 처음이었을까.

 


나도 결국 수많은 지구인 중 하나에 불과한데.

 


내가 저놈에게 비밀을 말해서? 하지만 그런 걸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놈은 아니었다. 우리의 비밀이 서로 교환하자며 건넬 만큼 만만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말로만 전해지는 비밀을 주고받으며 큰세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는, 어째서.

 


-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큰세진에 대해 많은 걸 안다고 자부한다. 저놈이 알려준 것도, 알려주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어떤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예를 들어, 저놈의 출신이라던가-큰세진은 그것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모를 수도 있지.

 


이쯤 되니 그냥, 더 알고 싶었다. 해줄 수 있는 게 많아졌으면 했고,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저놈이 또 멀어지거나 나 때문에 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웃는 얼굴이 제일 밉상이지만 그래도 그 웃음이 가장 잘 어울리는 놈의 감정을 일그러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그것이 나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만큼 모르는 걸 인정하고서 하고 싶은 일만 많아졌다.

 


나는 큰세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이유가 묻고 싶었다. 너는 여전히 고향 생각을 하는지, 우주를 돌아다니던 시절은 즐거웠는지 추궁하고 싶다.
큰세진을 곤란하게 만드는 얄궂은 인간들을 보면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변호하고 싶었다. 그 사실을 이미 너도 알지 않느냐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지, 생각나는 게 있지는 않은지, 이곳의 삶은 너를 위해 준비되었는데 괜찮은지….

 


네 생일은 줄곧 여름이었는지.
나는 그런 게 궁금했다.

 


-

 


“문대문대, 있잖아.”
“없어.”
“에이~ 안 들을 거야?”
“내가 하지 말라면 안 할 거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문대가 듣고 싶다고 하면 더 힘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진이의 아픈 과거~”
“그래, 미친놈아… 해라 해….”
“에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강요한 것 같잖아.”
“하아….”
“…내가 원래 살던 곳에는 이제 어떤 생명체도 남아있지 않아.”
“…그러냐.”
“응.”
“…….”
“외롭더라.”
“지금도?”
“응.”
“…….”
“그쪽에 아무도 없는 건 괜찮아. 이젠 얼굴도 기억 안 나는걸.”
“…그럼, 왜.”
“여기 오니까 우연으로 만나도 어떻게든 다들 이어진 것 같아서 신기했거든. 사실 거기서도 이 정도로 끈끈하진 않았는데 여기서는, 다른 걸 볼 수 있었어. 친구라던가, 연인이라던가. 딱히 피가 이어진 것도 아닌데, 신기했어. 우리는 한 번도 타인과의 관계에 이름을 붙여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그게 엄청 좋아 보여서, 나도 노력했어.”
“그런 것 같더라.”
“아하하! …근데 진짜 안 되더라. 엄청나게 노력했는데 좀 어렵더라고. 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는데 가끔은,”
“가끔은?”
“외로웠어.”
“그래.”
“사실 언제나 외로웠던 것 같아….”
“…그랬냐.”
“근데 너랑 만났잖아.”
“…….”
“아, 지금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있지. 근데… 너는 좀 특별했거든.”
“…내가?”
“…너도 나처럼 외로워 보였어.”
“…….”
“너는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이 행성의 주민인데도 그렇더라.”
“그랬던가.”
“그랬어~ 그래서 그냥 말 걸었던 거야.”
“흠.”
“물론 다른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그보다 그냥… 너랑 말해보고 싶었어.”
“…그래.”
“너도 외계에서 온 것처럼 굴어서~ 신기하더라~”
“이제 아닌 거 알았네.”
“그러게. 그래도 지금은 별로 외롭지 않아.”
“그래?”
“응. 너랑 다른 사람들이랑… 모든 사람과는 아니지만 이어져 있는 기분이 들어. 물론 세진이는 여전히 외계인이라서 좀 외로울 때도 있긴 한데~”
“……응.”
“그래도 이제는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자라.”
“에이, 문대문대 쑥스러워하긴! 그보다 나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말할지 생각 중인데 같이 고민해주라~”
“자라고….”

 


-

 


별이 쏟아지는 밤 나는 바란다.
이세진의 외로움이 아주 조금만 덜어지기를.

 


그렇게 많은 건 필요 없다. 아주 약간이면 된다. 나머지는 본인이 어떻게든 할 테니까. 저놈은 그런 놈이다.

 

 

더는 소원을 빌지 않는 외계인의 생일에 나는 소원을 빌었다. 아주 가끔 저 바보가 외로워할 때가 온다면, 그게 언제라도 괜찮으니….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Playlist

 ​♥     눈기린  /  도리  /  마리
​ ♥     팽  /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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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비공식 2차 창작으로 원작과 관계가 없으며, 게재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원작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_백덕수 / 주최, WIX 제작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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